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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하나님의 통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것 외에는 없다. 기도도 영광도 주님의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한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소통하지 못하는 당시의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 말씀을 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영원과 생명과의 통로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안타깝게도 생명의 진리가 인간에게 가까이 주어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뿐이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이 말씀은 단순하지만 귀중하고 영원한 약속과 연결되어 있고 이 말씀을 풀어가면서 그 의미들을 생명으로 나눌 수 있는 …
진리는 불편한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것이고 진리라는 말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쉽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이라는 말에 민감하지만 그 구원도 오늘 주님의 “내 말에 거하면” 이라는 한 마디에 관련되고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에 거하지 않으면서 구원을 얻으려는 교활한 꾀를 내곤 한다.
오늘 여러분들은 주님의 말씀에 거하고 계시는가? 이 단순한 질문은 바로 영원과 연결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과제이다. ‘또 이 말씀은 사실 예수께서 다른 사람들이 아닌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신” 말씀이라는 데도 무게가 있다. 좀 더 자세히 이해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중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음도 이 말씀은 전제로 한다.
Ⅰ.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거해야 한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말[, 예언, 교리, (신성한) 계시]”은 로고스는 당시 헬라 철학의 지고지선의 절대적인 원형으로 플라톤은 ‘Idea’로 표현했는데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원형이라고 했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별명이자 우리 하나님, 구원자’ 라는 의미까지를 가진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우리에게 주어진 이 계시의 말씀이 이렇게 놀랍고 위대한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헬라의 철학자들은 사람이 ‘로고스’에 이를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려 버렸지만 우리가 이 로고스와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최고의 학문이라고 하는 철학을 넘어서는 엄청난 은혜이다.
“거하면[헬, meno (주어진 장소, 상황, 관계, 또는 기대 속에서) 머물다, 거하다, 계속하다, 거주하다, 참다, 출석하다, 남아있다, 서다]”
더 중요한 사실은 주님께서 그를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인 우리에게 이 말씀 속에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주님 안에 약속한 것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때문에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이라는 귀한 약속이 반대로 “너희가 내 말에 거하지 아니 하면 …” 이라는 의미로도 이해하게 되는데 당연히 그렇다면 주님의 이 약속 뒤에 주어지는 것들은 모두 헛된 것이 되고 만다는 사실이다. 이 것은 누구에게도 예외는 없다.
뒤에 언급된 약속 즉,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되고, 자유케 되는 약속은 관계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는 주님의 말씀에 살고 죽어서 이 후에 주어지는 귀중한 약속이 …
Ⅱ. 비로소 주님의 제자가 될 것이다.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이것은 주님의 말씀에 거하는 첫 번째 약속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내 제자가 되고’ 하신 것이 아니라 “ ″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가르침은 거짓된 제자가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특히 요한 복음에서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헬, amen amen lego hymin; 34, 51, 58포함]” 이라는 표현을 무려 25회씩이나 사용하셨다.
“제자[헬, mathetes]”는 ‘배우는 사람, 따라가는 사람, 훈련하는 사람’인데 ‘아무나 주님을 배우고 따라가면 제자가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지속적으로 배우고 따르는 것은 쉽지 않고, 역시 주님과 함께 매 순간을 사는 사람을 진정한 제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거하지 아니하면 제자라는 이름은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참된 제자는 될 수 없다. 주님께서는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마16:24; 막8:34)고 당부하셨다.
주님의 말씀과 함께 同苦同樂 하는 자라야 비로소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2:11~12)
나는 주님의 참 제자인가! 각자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Ⅲ.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이것은 주님의 말씀에 거하는 두 번째 약속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진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그리고 여기에 “안다[헬, ginosko]”는 단순히 듣고 습득되는 학습으로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함께 한 결과로 ‘이해하게 되다, 인식하다, 깨닫다, 특히 동침하다’ 라는 의미까지 가지는 낱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지속적으로 함께 거함으로 알게 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구태여 [진리]가 무엇이다 라는 정의 보다는 반응을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①다수의 선택이나 결정이 진리는 아니다. 다수가 선택하는 것이 진리라면 인간 스스로의 구원도 가능했을 것이다. 오늘 세상은 다수를 따라가는 것이 가장 쉽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수의 선택이 항상 옳지는 않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도 다수의 군중들은 그를 죽이자고 선동했다.
하나님은 범죄하고 거역하는 자신의 백성들을 향하여 탄식하심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듣는데(사1:7~9) 이 말씀과 함께 오늘 우리 날 속의 진리의 도구인 교회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황폐된 주님의 나라…(7)“너희의 땅은 황폐하였고 너희의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의 토지는 너희 목전에서 이방인에게 삼켜졌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폐하였고” ⓑ망대같이 원두막같이 남았다.(8)“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참외밭의 원두막 같이, 에워 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 ⓒ주께서 남겨두신 것을 지켜야만 한다.(9)“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사실 진리를 아는데 대한 책임이 크다. 이 세상에서 다수를 따라 가는 것이 쉽지만 진리를 맡은 자로서의 자세는 아니다.
진리를 선택하고 버릴 자유가 사람에게 주어졌지만 이 자유는 언젠가 닫힐 때가 있을 것이다. 때문에 진리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해서도 감사해야 할 것이다.
②세상은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은 진리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요17:14)
③하나님께 속한 자만이 듣는다.(요8: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기적의 떡을 먹고도 생명의 진리를 증거하시는 주님을 떠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주님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6:44)
진리는 아무에게나 알게 되고 환영 받는 것은 아니다. 주님의 말씀에 거하는 자에게라야 진리를 알게 되고 환영하여 그 진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검증된 자라야 진리에 의해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Ⅳ. 결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것은 주님의 말씀에 거하는 세 번째 약속이다.
자유라고 하는 것 자체가 사실 수동적이다. 스스로 자유롭고 싶다고 자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애굽 속에서의 이스라엘이 그랬고, 죄에 매여 있는 인류가 그렇다. 그래서 자유는 절대적인 능력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은 그래서 중요하다. 진리라는 것 자체가 세상에서 나는 것이 아니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속성이다. 때문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것은 절대적인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 가능함을 말씀하고 있다.
우리 나라가 일본의 침탈을 당하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나 애국자들의 희생과 함께 36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서야 비로소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은 애국지사들의 나라를 사랑하는 희생을 약화해서는 안되겠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에 의해서였음을 역사가 증언하는 사실이다.
특히 인류를 죄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역사를 위하여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독생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희생이 있고서야 자유 할 수 있었고 그 놀라운 은혜에도 불구하고 100% 모든 인류가 다 죄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 나를 죄에서 풀어놓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임을 확신하고 하나님께서 열어놓은 십자가의 은혜의 통로를 통해서 영원한 자유의 세계로 감격하며 걸어 나오는 순종이 있고서야 자유의 사람, 생명의 사람이 된다.
아무리 자유를 주셨음에도 여전히 종노릇이 좋은 죄의 사람들은 꼭 같이 베푸신 이 자유의 감격을 함께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주님은 무덤 속의 나사로를 죽음의 저주에서 일으켜 세우시고 다시 선언 하시기를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11:44)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의 대가로 죽으실 뿐만 아니라 죽음의 저주를 박차고 부활하셔서 더 이상 죄와 죽음의 노예로 살아서 안될 인생을 자유케 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오르셨다가 이제는 영원하고 완전한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오실 것이다.
우리모두 이 영광에 이르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영원까지 주님의 말씀에 살고 먹고 거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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