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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지 못하면 종노릇 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 논리이다.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벧후2: 19~20)
오늘은 좀더 근본적인 입장에서의 승리할 수 있는 근거들을 생각했으면 한다. 인류는 하나님을 위하여 영적인 존재로 디자인 되었다. 이러한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람이 어디로부터 왔는가?, 왜 나는 지금 여기에 있고?,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존재이유에 대한 답변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원까지 사람으로 하여금 그와 관계를 즐기기 위해서 그 자신의 영적인 모습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사실 이 이유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이 지구에 살게 하시고 갈보리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는 죄와 사탄을 영원히 이기게 하셨다. 이 사실을 모른다면 인생의 진정한 목적을 볼 수 없는 영적인 소경에 불과할 것이다.
오늘 읽은 시편의 기자는 아주 흥미로운 던지고 거기에 답변을 얻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 모든 사람이 실패하지 않을 충분한 이유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패배하지 않도록 창조함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럼으로 우리의 승리하는 삶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에덴에서 패배한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시 자신의 독생자를 희생제물로 삼으심으로 보다 완벽히고 영원한 승리를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이다.
Ⅰ. 마음을 두시고 돌보시는 대상이다.(3~4)
(3)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고 하는 사실을 확인할 때 비로소 사람이 무엇인가에 답을 얻게 한다.
영화롭고 위대한 우주에 관한 질문을 하나님께 드리면서(V3) 사실에 있어서는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4) 묻고 있는 것이다. 그의 질문은 현대의 우주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최고 성능의 망원경보다 더 가치 있는 질문이다.
우리 사람이 살고 있는 이 지구는 다른 우주에 비교하면 하잘것없는 작은 것이지만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십니까…?” 라는 물음은 우리의 존재가치에 대한 답변을 찾고 있다.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실제적으로 하나님께 있어서는 가장 귀한 관심의 대상이 그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마태복음16:26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막8:36; 눅9:25) 이 말씀은 적어도 온 우주와 한 사람을 저울에 올려둬도 하나님의 보실 때는 한 사람의 생명이 우주의 가치보다도 훨씬 가치가 있다는 말씀이다.
무엇 때문에…! 다만 하나님의 영적인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이유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광대한 우주에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가치에서 보시는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자존심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 나는 적어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 우주보다 귀중한 존재이다. - 누가 과연 사람의 가치를 이렇게 봐 줄까! 그래서 또 우주 가운데 가장 귀한 독생자를 값으로 지불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사 주신 것이다. 할렐루야!
이렇게 우리 인생을 귀하게 보시는 하나님의 가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이 우주에 없다. 그래서 사실 사탄은 하나님께 사람을 참소해 보지만 그것은 마귀 사탄의 생각일 뿐이지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생각은 바꾸지 않으신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4) 라는 시편 기자의 관심에 사탄은 하나님께 ‘무엇 때문에 죄진 인생을 생각하고 돌보십니까?’ 라고 참소해 보지만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관심은 바뀌지 않으셨다. 아니 바꾸실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감격할 수 있다. “내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래서 다윗을 비롯해서 이것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Ⅱ. 하나님 다음의 영화를 주신 존재다.(5~6)
(5)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이러한 질문에 다시 이 시편기자는 답을 찾는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을 바로 아는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신에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한 존재들은 스스로를 높이려 하고 교만하지만 거기에는 늘 한계가 있다.
①“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5f) 때문에 이 우주 중에 사람보다 귀중한 존재는 없다. 하나님 다음 가는 존재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천사들보다, 위대한 태양보다 더 우월한 존재는 사람외에 없다. 그러나 중요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셨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넘어서려고 하는 것 자체가 역시 창조의 질서에 있어서 우리 사람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②“…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5b) 누구를 말인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이러한 영광의 가치를 믿음의 사람들이 알기를 원해서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8~19)고 호소하고 있다.
이렇게 영화로운 존재인 사람의 창조를 지으심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필요가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 육신의 창조;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 영적인 창조다. 그럼으로 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라는 표현은 단순히 호흡을 불어 넣는 것 이상이었다. 그러한 영육의 창조 결과물이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肉靈-순서대로는]는 것이다.
③“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사람에게 관리하도록 맡기신 것은 권리의 이임을 증거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의 권리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이임 받은 것이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월권이 되는 것이다.
④“…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이 표현은 하나님 외에는 사람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말씀이다. 천사조차도 성도들을 섬기도록 보내셨음을 히브리기자는 선언한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1:14)
이러한 원리를 알면 알수록 겸손할 수밖에 없다.
Ⅲ. 다른 모든 피조물 다스림을 맡기셨다.(7~8)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겉으로나 이름만 영광과 존귀와 다스림의 권한을 준다고 하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에게 통치를 주신 것은 실제적이다.
6절에서 이미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했는데 여기는 좀더 구체적인 통치의 영역을 지적하고 있다.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7) 모든 가축은 지금도 여전히 길들므로 사람에게 순종하고 있고 야고보는 우리의 길들일 수 없는 혀를 말하면서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약3:7) 라고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다스릴 수 있는 짐승은 가축에 한하지 않는다. ‘들짐승’들 역시 하나님께서 창조시부터 사람에게 다스리도록 위임하셨다. “…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B) 이러한 내용은 오늘 본문에서도 확인해 주고 있다.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8)
이런 모든 것들이 가능했던 것은 창조시에는 짐승들이 약한 것들을 잡아먹는 弱肉强食의 피 흘림이 없었음을 본다.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1:30)
그러나 범죄 후부터 동물들도 짐승을 잡아먹는 형태로 변하여 피 흘리는 즉, 다스림에서 벗어나서 해치는 포악한 존재가 되었다.(창9:5f; 욥41:1~10)
그럼에도 메시야를 통한 회복 뒤에는 다시 동물이 본래의 창조의 상태로 회복될 것은 성경은 예언하고 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11:6~8)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사65:25)
이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보이는 이 변하고 없어지는 범죄로 인해 타락된 세계에 머물지 않고 회복된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의 약속에 소망과 기대를 두고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
이러한 존귀와 사랑에도 사람은 하나님을 거역하였고 범죄하여 잃어진 존재가 될 뻔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피로 값 주고 사셔서 보다 완벽한 존귀한 존재가 되게 하셨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회복된 약속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더 이상 패배시길 존재는 있을 수 없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마음을 두시고 돌보시는 대상이다. 하나님 다음의 영화와 존귀를 씌워주신 대상이다. 다른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도록 맡기셨다.
이 시편의 시작과 끝은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1, 9) 되어 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도록 창조하고 섭리 하셨다. 이것은 오늘도 우리가 지지 않고 이김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란 당연한 의미를 가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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