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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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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8~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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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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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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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을 부리는 영으로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기 위하여 지으셨다는 가르침과 함께 그 천사나 사람들과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증거하는 내용을 이 1장 중간에서 읽게 된다. 여기서 아들에 대한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와 전혀 다름이 없음을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신비와 속성을 항상 사람의 수준에 맞춰서 이해하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사실 하나님을 사람처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벌써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임에도 사람에게 알게 하시려고 주신 계시를 가지고 온전히 이해한다고 표현하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사실 사람의 행해야 할 구원의 이치나 방법에 있어서는 순종하려고만 한다면 전혀 어려움이 없도록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계시를 주신 것은 사실이고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오시기 전부터 예언된 내용을 보는 대로 그 묘사하는 내용이 사람에게는 적용할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와 전혀 다름이 없는 수많은 수식어들로 표현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 인용되는 시편45:6~7의 말씀과 거의 다르지 않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곳이 바로 이 땅에 보내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9:6~7)
뒤에서 다시 거론하겠지만 이 땅에 보내실 메시야에 대하여 이렇게 예언하고 있는데 이 고백은 사실 하나님 아버지께 올리는 고백과 다르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고백과 찬양을 드리면서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8)라거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11)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12)라는 표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합당한 고백들이다.
Ⅰ. 공의로우신 주님(8~9)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주권의 고백과 그 보좌의 영원성과 공의로우심에 대한 찬양이다. 먼저는 “아들에 관하여는”하였는데 앞 v7의 “천사들에 관하여는” 한 것에 대한 대응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아들에 관하여는” 또한 이사야를 통하여 오실 메시야의 고백과 다르지 않은 아들의 위엄을 선포하는 증언이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사9:6f)라는 표현과 다르지 않고 이어지는 내용들 역시 연결되어지는 표현들과 다르지 않다.
특히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했는데 이 표현은 “Ὁ θρόνος σου ὁ θεὸς, 당신의 보좌는 하나님이시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인용된 시편45:6 난외주에도 비슷하게 기록하고 있다. “주의 보좌는 하나님의 보좌라!” 바울도 같은 신앙적 고백을 기록하고 있다.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롬9:5)
이것은 물론 시편45:6의 인용 그대로의 표현이다. 그러면서도 2가지의 하나님의 속성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8b) 즉, [영원]하며 [공의로우심]을 묘사하고 있다.
어떤 조건이나 시간 속에서도 이 세상 속에 있는 것들과 비교될 수 없는 쇠하지 않으시는 보이는 처음과 나중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무시간의 존재이심을 v12b에서도 증거하는 것과 같다.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마치 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서 읽는 하나님의 위엄을 그대로 보게 된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계21:6, 13)
하나님의 공의는 이 나라의 대통령과 정치가들이 그대로 본받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진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권력을 친히 주시는 분이시지만(롬13:1) 주님은 최고의 권력자들도 책망(창12:17바로; 단4:31~32느부갓네살)하시고 부모 없는 고아나 불쌍한 과부의 권력도 결코 무시하지 않으시는 공의를 친히 행하시고 그의 일꾼들과 백성들에게도 수없이 당부하신다.
물론 다음 v9의 시작도 이를 강조하고 있다. “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한 걸음 다가가는 것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사람들조차 그런 사람이 많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v9b의 인용인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왕에게 부어 왕의 동료보다 뛰어나게 하셨나이다”(시45:7b)라는 시는 이스라엘 속에서 주로 왕의 혼인예식에서 왕에게 기름을 붇는 것을 묘사하는 표현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랑으로 영광스럽게 임하실 것을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계19:7)라는 예언에서 볼 수 있다.
다만 여기 “왕의 동료보다 뛰어나게 하셨나이다”라는 “왕의 동료”는 사람들이기 보다는 역시 같은 영적인 소양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좌하고 섬기는 천사들과 비교하는 것으로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도 다시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들의 섬김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분으로 천사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우월하심을 다시 강조하는 것이다.
Ⅱ. 창조주(10)
이 세상이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지으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자체부터 사실 바른 지식의 바탕이 된다. 성경의 창조를 인정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이 지식의 범위나 자연스러운 논리로 갈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것은 베드로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창조주께서 존재하시는 것 자체가 양심에 거리낌이 되기 때문에 일부러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벧후3:5)
사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삶의 질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술주정뱅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차이가 난다.
진화론을 진리라고 믿는 과학자들과 성경에 입각한 창조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과 이론은 엄청난 차이를 가지는 이유는 지혜자 솔로몬의 가르침에서 차이를 이해하게 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1:7)
가장 간단한 이론의 차이를 본다면 진화론자들이 지층의 구조를 두고 연대의 변화의 흔적이라고 하는 방법이나, 가장 최근의 과학적 측정법이라고 하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radio-carbon dating: C-14 dating-지식백과사전)”에 의한 이론에서 자신들의 논리대로 친다면 몇 억년의 지층의 간격을 가로질러 있는 나무 화석을 설명할 방법이 없지만 성경에 입각한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노아의 방주 때 일어난 현상이라고 이해하면 전혀 어려움이 없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이 v10은 시편102:25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두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라는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그 앞에 “주여!”라는 고백과 함께 시작하고 있는데 마치 앞의 v8에 “하나님이여!”라고 한 것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또 이 “주여!”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호칭은 역시 이 히브리서의 특징 중의 하나로 모두 16회나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는 창조주로서의 고백은 NT성경에 심심치 않게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찬양이다.
자주 인용하는 구절이지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1~3)는 요한 사도를 통한 증거가 그 대표이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시작이 바로 창조사역이라고 이해한다. 비슷한 증거는 OT에서 하나님의 시작과 끝이 되심에 주로 나타나지만 이사야48:13 같은 경우이다.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에 폈나니 내가 부르면 천지가 일제히 서느니라” 그러므로 창조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하셨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이 분명하다.
앞에서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는 것이 지식에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하다는 말을 하였는데 사실 이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는 처음 창조보다도 더욱 귀중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이루신 새로운 창조가 더욱 귀하고 영원하다.
바로 십자가로 창조하신 구원이 그것이다. 이렇게 반론할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는 예전부터 있던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만드는 창조라고 할 수 없지 않는가?’ 그렇다! 이전에 존재하던 어떤 것을 사용하여 다른 것을 만드는 것은 창조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입장에서 사람은 창조자일 수 없는 것은 이미 있는 재료를 사용해서 모든 것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경우는 간단히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사람들의 죄성으로 ‘사람을 어떻게 죽이는 것이 고통을 더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끔찍하고 잔인한 십자가를 형벌의 도구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죽이는 도구인 십자가를 살리는 도구로 새롭게 하신 하나님의 지혜는 마귀 사탄도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창조의 극치이다. 이것이야 말로 새로운 창조요 마치 보이는 세계의 하나님 창조를 믿지 않는 과학자들처럼 이 십자가의 구원의 창조야 말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지 못하는 생명의 창조역사다.
뒤에 연결되는 대로 최초의 창조인 땅과 하늘 그것은 이미 만드실 때부터 없어질 것으로 멸할 것으로 만드셨다.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11ff) 그런 이유에서 이 보이는 세계의 창조는 하나님을 거역한 일련의 마귀 사탄을 멸하기 위하여 창조하셔서 이것을 완성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마지막으로 이 땅에 오셔서 완성한 것이라는 이론까지 있다.
그 근거가 되는 말씀이 바로 2:14의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라는 말씀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3:8b)라는 말씀들이다.
그러나 두번째 창조인 구원의 십자가는 이제 사라지지 않을 영원한 창조로 사람을 구원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마귀를 멸하는 엄청난 새로운 창조의 역사라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연히 멸하실 것이지만 태초에 땅과 하늘을 창조하여 사람을 통하여 어두움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멸하려 시작하셨다면 십자가를 통한 제2의 새로운 구원의 창조는 더 이상 멸하지 않으실 영원 속에 지속될 그러나 죄와 상관없는 참 생명의 창조이다.
그런 이유에서 그 새로운 창조의 혜택을 입어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4:7~8) 라고 선언하였다.
하나님의 주신 진리를 순종하고 지키며 주님의 성품을 본받으려고 성령과 말씀을 의지하는 자들이 모두 이 복을 누리게 될 줄로 믿는다.
Ⅲ. 영원하신 주님(11~12)
마지막으로는 천사의 수종을 받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심에 대한 고백으로 역시 영적인 존재들인 천사들의 연령이나 생애를 완전히 알 수 없지만 보이는 물질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역시 영원에 함께 묻어가는 존재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갈아입는 옷으로 비유되는 것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여기 인용된 말씀 역시 시편으로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시102:26~27)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11) 했는데 여기 “그것들”이란 대명사는 앞절에서 언급한 바 있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과 땅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을 비교하는 것으로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바울 사도도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 하여 보이는 것들의 유한성과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약속하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영원성을 비교하고 있다.
이 히브리서 기자도 나중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11:3)함으로써 보이는 현실 세계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없어질 것들에 반하여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라고 증거하고 있다. 매년 한 해를 보낼 때마다 이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워진다고 생각하며 길어야 백여년을 살고가는 사람들에게 영원히 존재한다는 이해나 기대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이 세상이 창조될 때부터 수 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전혀 변함없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면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이해가 그렇게 어려울 것도 없다.
낡아지고 없어진 세상을 다시 비유적으로 확인하는 내용이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11b~12) 낡아지고 변하는 것들을 의복이나 옷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왜, 다른 것이 아니라 옷에다 비유하는가! 거기에는 적어도 두가지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계속 입으면 낡아지지 않는 옷이 있을까? 요즘 옷감의 변화를 보면 그것이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이 겨울에는 Heattech 기술이 응용된 의류제품들이 개발되어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옷은 계속 입다 보면 낡아지게 되어 있다. 요즘 청바지를 보면 일부러 처음부터 찢어서 판매하는 것도 오래 입어서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의 조급함이 그대로 반영된 모습이 적용된 것이다.
사실 청바지는 처음에 돌이나 흙을 캐내야 하므로 옷이 쉽게 낡아지는 광부들의 의복으로 만들어졌고 그 재료는 사실 배의 돛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광부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양으로 입게 되었지만 쉽게 찢어지거나 낡아지지 않기 때문에 만들면서 일부러 찢어진 부분을 만들어 판매를 하고 있는 변화의 역사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옷은 낡아지거나 찢어지지 않아도 갈아입을 수밖에 없다. 어려서부터 입던 옷은 비록 찢어지지 않을지라도 몸이 커지면 바꿔 입을 수밖에 없는 것도 옷의 특징이다. 이런 옷의 두가지 특징 때문에 이 땅에서 나서 죽을 때까지 입을 수 있는 옷은 없는 것이다.
물론 이 외에도 옷을 바꿔 입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더러 있을 것이다. 옷은 변하는 상황에도 맞춰 입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혼인 예복이 있는가 하면 엄숙해야 할 장례식에 맞는 옷이 있고 환자들을 돌보는 오염되지 않은 옷으로 방호복(防護服)이나 가운(gown)을 계속 바꿔 입어야 하는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또 불 가까이에서 소방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불에 강한 내열성의 옷을 바꿔 입고 불을 꺼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런 이유에서 없어지고 사라지며 바꿔질 수밖에 없는 것들을 어떤 것보다도 옷에 비유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보인다. 이러한 가르침의 요지는 보이는 이 피조물들은 닳고 낡아져서 수시로 바뀌고 사라질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12b) 한 것은 그 피조 된 것들과는 다르게 그 모든 것들을 지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如前)하시여 변함이 없으시다는 것과 함께 다함이 없으시다는 표현이다.
여기서 “다함[ἐκλείπω, 그치다, 중지하다, 그만두다]이 없으리라” 한 것은 우리말식 표현이다. 쉽게 말해서 [끝이 없다]라는 하나님의 영원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기대나 소망을 가진다고 해도 그 기대치에 이르면 자연히 기대나 소망도 사라지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는 이런 것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그에 대한 소망 또한 사라질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변치 않으시는 주님에 대한 확신을 표현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13:8)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우리 사람들의 기준에서 움직임이나 미동도 없이 굳어 있다는 것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변함없이 굳어 있는 석상과 같은 것에 대해 사람은 지루해할 수 있기 때문에 외형적으로 변치 않는 지루함이 아니라 이것을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과 더불어 지속되는 쪽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즉, 우리를 향한 [사랑]을 베푸심에 대한 것들이다.
사람들은 주고주고 또 주다가 실증 내고 포기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붇고 또 쏟아 부으시는 데도 그것이 지루하거나 거북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감격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르다는 것이다.
옷같이 낡아지고 바꿔 입어야 하는 것이 보이는 피조세계라면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는 끝없이 지속되는 것이다. 사실 이런 것 자체도 우리 사람들은 확실한 이해를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피조물인 사람의 한계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시기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존귀를 취하셨고 불변하는 영광의 주권과 공의로우심이 인정되고 영적인 능력을 가진 천사들과 다르게 기름부음을 받으신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구원의 창조를 이루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미움과 저주의 표상인 십자가를 사랑과 구원의 상징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 하셨다.
이러한 창조주요 구세주 이신 분이시기 때문에 세상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고 바꿔 입어 사라질지라도 새로 창조된 구원의 사랑은 끝이 없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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