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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2:1~4 2022-02-06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앞장에서는 천사와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이신 분임을 증거하였다면 여기서는 그러한 절대자를 순종할 것을 권면하면서 시작부터 그를 통하여 주신 모든 좋은 것들을 순종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순종도 경계로 증거한다.

이2장에서도 천사들의 이야기는 마지막절까지 계속되지만 유다서에서 경고하는 불순종하고 자기 지위를 떠난 배역한 천사들과는 다르게 긍정적인 역할로 증언하는 것도 주목할 만한 것으로 이 권면의 실제적인 권고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또한 천사들처럼 잘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다루는 이 부분에서는 다음 v5에서부터 다시 이어지는 천사들의 이야기 사이에 끼어 넣은 감이 들 정도다. 창조주요 최종적으로 죄인 된 인류를 위해 구원을 창조하신 그 놀라우신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이 안되면 복종이라도 드리지 않는다면 구원에서 떠내려갈 것이라는 두려운 투의 경계를 주고 있다.

사실 아무리 완벽한 것이라도 그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의 원리에서도 소용이 없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하나님의 불변하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주신 영적인 원리는 더욱 그럴 것이다.



Ⅰ. 주신 구원을 위해 힘써야 한다(1)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인 된 우리를 위해서 최고의 희생과 사랑을 통하여 주신 구원을 값없이 선물로 거저 주셨다는 사실 때문에 너무 안일하게 신앙을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은 1세기 때부터 이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보게 된다. 사실 오늘 이 권면도 그런 논지의 경고이다.

노력없이 거저 받았기 때문에 더욱 귀하고 그것을 지키고 이루어 가는데 온 힘과 정성을 다해야 하겠는데 오히려 공로 없이 주시는 사랑 때문에 받는 입장에서는 받고 나서도 여전히 너무나 안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OT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엄청난 구원의 역사와 예언을 따라 메시야를 주신 것을 너무나 잘 아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모습이라서 이 히브리서 기자는 안타까움으로 이런 경계를 주고 있다고 본다면 오늘 우리 또한 깊이 생각해야만 한다.

다른 성경보다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경계를 더 자주 거론하는 것도 사실 이 히브리서의 특징이다. 그러면서도 항상 외치는 확신은 ‘구원은 사람의 공로로 받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받을 때와 받은 것을 관리하고 누리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도 알아야 한다.

입양의 조건은 없지만 일단 자녀가 되었다면 합당한 교육을 통해서 자녀다운 모습을 갖추어 가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도 귀한 선물을 주고 그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잘못 관리하는 것을 보면 왜, 줬을까 후회하는 일이 더러 있다. 우리는 거저 받았지만 그것이 주어지기까지 하나님께는 얼마나 큰 희생과 아픔이 있었는가를 생각한다면 결코 안일할 수 없는 것이 그 사랑을 받고 사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다.

여기 “그러므로”는 1장에서 말했던 천사들의 섬김과 경배를 받는 아름다운 이름과 창조주로서 결코 피조물인 천사들과 비교될 수 없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다면 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들은 것에” 했는데 들은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역사와 지위를 들었다면 거기에 합당하게 응답해야만 할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그의 생의 마지막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계하기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니라 그런즉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을 부인하지 못하도륵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수24:27)고 말했다. 돌이 어떻게 들을 수 있겠는가 만은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신실해야 할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연이어 “더욱 유념함으로”라는 당부를 하고 있다. “유념함[προσέχω, 조심하다, 전념하다, 유의하다, 주목하다]”이란 그렇게 어려운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두는 사람들이 적은 것이 사실이다.

왜, 이미 우리가 들은 것에 더 전념(專念)하고 유의하고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쓰고 있다.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떠내려가다[παραρῥυέω, παρά 옆으로 + ῥέω 흐르다]”라는 의미로 힘없이 물살에 떠내려가는 것을 묘사한다. 그래서 더욱 경계되는 교훈이다. 이것은 분명히 진흙탕물 같은 세상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떠내려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구원을 잃을 수도 있음을 전제로 하는 교훈이다.

전반절에서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하라는 개역개정에서 조금은 약한 번역으로 들린다. 오히려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한글)라는 표현이 더욱 호소력 있게 들리고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신앙의 사람들에게는 당연하다는 호소이다.

여기서도 역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가”하는 것은 생명의 모습으로 그리고 맥없이 흐르는 대로 맡겨 두고 흘러 떠내려가는 것은 이미 생명을 잃은 모습이다.

힘겨워도 노를 저어 상류를 오르는 것은 생명 있는 모습이지만 생명 없는 것이 떠밀려 내려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다. 마치 다음 세대를 지속하기 위하여 강을 거스르는 연어와 상류에서부터 물결 따라 떠내려가고 있는 나무토막과 같이 비교될 수 있다.

오늘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복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섬겼던 세상 떠난 조상이나 다른 일반적인 우상과 다른 분으로 듣고 알고 섬기게 되었다면 더 이상 힘없이 세상 흐르는 대로 맡겨 두는 것은 자신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세가 아닐 것이다.

이제는 생명 있음을 나타낼 때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Ⅱ. 이미 역사 속에 확증된 것이다(2~3)

과거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율법조차도 순종하지 않아서 그 율법에 명령하신 형벌을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이루시고 그를 따르던 사도들을 통하여 확실이 증거하신 복음을 가볍게 여긴다면 OT의 육신에 그치는 형벌이 아니라 영원 속에서의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두려운 경계를 주고 있다.

이미 갈라디아서에서 나누고 인용한 말씀이지만 모세를 통한 율법도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으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3:19)는 내용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은 다른 것이 아니라 복음을 주시기 전까지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율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한 자들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2) 이라는 교훈이 과거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사실을 확인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여기에 비교되는 복음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경고가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3) 라는 옛언약과 새언약을 비교하는 것이기도 하다.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2f)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고도 거역하는 완악한 유대인들에게 스데반을 통해서도 같은 경계를 주신 바 있다.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행7:53)

다만 여기서는 직접 “천사들을 통하여 주신 율법[νόμος]” 이라는 표현 대신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λαληθεις λογος]”이라고 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더욱 강조점과 무게를 두고 있다.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한 자들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2b)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강론하면서 율법에 대한 부분을 충분히 다루었지만 그 율법은 결코 영원한 법이 아니라 임시조치법이라고까지 표현한 바 있다.

위에서 인용한 내용도 다르지 않다.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으로 더하여 진 것이라…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3:19)하여 이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기존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더하여 진 것이라는 성격과 함께 그 유효 기간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하여 무게(권위)와 기간을 분명히 한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런 법이었음에도 그것을 어긴 것에 대한 형벌을 분명히 하셨다는 사실을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한 자들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2b)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과거를 추억하거나 협박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전한 생명의 법을 받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해서다.

앞에서 말한 대로 천사를 통해서 임시적으로 주셨던 법에 순종치 못해서 그 법을 어김으로 받게 되는 형벌을 피하지 못하였다면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면서까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삼는 이 엄청난 법을 어긴다면 어떻게 감당하겠느냐는 안타까움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구원을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이라고 말한다. 비교될 수 없이 매우 큰, 매우 위대한(τηλικοῦτος) 것으로 이것은 하나님 외에는 불가능한 것임을 확인하는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σωτηρί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따르는 표현이 “등한히 여기면[ἀμελέω, 무관심하다, 멸시하다, 등한히 하다, 관심 갖지 않다]”이라는 경계이다. 하나님께서 온 갓 부정적인 것을 다 참으시고 허락하신 구원이 자신의 자존심까지 다 내놓으신 구원을 멸시하는 정도의 태도는 용서하실 수 없으신 것이다.

바라건 데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않는 구원받은 사람 답게 공로 없이 선물로 주신 구원의 가치를 인생의 최고로 여길 수 있는 그래서 이런 비극적인 표현이 적용되지 않는 사랑입은 자 다운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계속 주어지는 경계는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라는 것이다. 아니 역으로 말해서 그 저주의 보응을 피하지 않고 받으려면 십자가의 복음을 등한히 여겨도 좋고 무관심해도 괜찮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구원과 정비례 되는 형벌 또한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영원의 비극일 것이다.

희미하고 분명하지 못한 것은 그렇다 치고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한 구원의 은혜를 저버린다면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말씀이다. 이제 우리에게 확증된 진리가 우리에게 확인된 순서를 증거하는 내용이 이 v3b이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3b) 여기에서도 적어도 세가지 경로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 첫째가 “주로 말씀하신 바요” 앞의 v2이나 갈라디아서3:19에서 “천사들을 통하여” 주신 율법과는 다르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직접 말씀하신 것이라는 출처에 더욱 무게가 있다.

게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즉, 일찍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르시고 택하신 그 사도들을 통하여 오순절부터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증거하고 기록한 것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는 증언이다.

우리가 보는 대로 사도들은 세상에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대부분 목숨을 바쳤던 것은 볼 수 있는데 확실치 않은 것에 목숨을 바치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사도들을 통한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라는 증언 역시 권위가 있는 증거이다.

세번째로는 이러한 사도들을 통한 증언이 기록되어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전달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 속에 어두움의 하수인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말살시키려는(없애려는) 시도가 수없이 있어왔지만 그런 수천년의 역사를 뚫고 오늘 우리 각자의 손에 성경이 들려져 있다는 사실 자체도 우리가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의 일면이다.

천사들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 통해서 증거된 생명의 복음 수 없이 생명의 증거를 없애려는 시도가 있었음에도 그의 사도들이 목숨을 바쳐서 증거하고 조금도 가감되지 않고 우리 손에까지 전달된 생명의 복음은 절대로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주님의 제자들이 목숨을 바치며 전했던 그 복음은 오늘 우리가 생명 바쳐 지키고 다음 세대에 전달해야 할 사명이기도 하다.

이러한 증거로 주어진 구원을 외면한다면 영원히 영원히 다른 구제책은 있을 수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 오늘 나는 과연 이 엄청난 확신과 감사의 과제인 복음을 혹시라도 세상의 어떤 좋은 것들보다 가볍게 여긴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반드시 회개하고 가장 귀중한 인생의 과제로 회복해야 할 것이다.



Ⅲ. 표적들과 기사들로 증거 된 것이다(4)

앞에서도 이미 새롭게 주어진 구원의 진리를 외면하면 안될 이유를 세가지 정도로 증거하였지만 거기에 덧붙여 여기의 내용은 더욱 분명해짐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말이 사실임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그 말에 따라 나타나는 증거들이 있을 때 인정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시고 직접 증거하신 구원의 역사는 물론 사도들도 목숨 바쳐 증거하였지만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단순한 말보다는 그 말이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증거들을 요구하는 것을 표적의 역사를 살아온 예수 그리스도의 주변에서 유대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

대표적인 두 곳을 보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마16:1)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요6:30)라는 요구를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요구를 주님께서 거절하신 이유는 진정으로 믿고자 하는 의도에서 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려는 저들의 간교함을 주님께서 이미 아셨기 때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표적이라는 사실을 요한복음을 강론하면서 증거한 바 있다.

이 v4의 헬라어 원문에는 “…함께 증언하셨느니라[συνεπιμαρτυρέω, 더욱 조화되도록 증거하다, 증거를 더하여 합치다, 공동으로 증거하다, σύν + ἐπιμαρτυρέω]”는 말씀이 맨 앞에 나타나 강조적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 증거자는 하나님 자신이시고 그 증거의 도구들을 보이고 계신 것이다.

여기 그 도구들은 성경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의 증거의 도구들이다. 즉, 표적들, 기사들, 여러 가지 능력,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들이라고 사실을 낱낱이 죽 나열하고 있다. 그것들이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이다.

결국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표적과 기사들을 허락하신 이유는 주신 계시의 말씀을 확증하기 위해서임을 다시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막16:20)

여러가지 증거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16:17~18) 확신시키셨던 사실이 제자들을 통해서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 불림을 받은 사도들 외에도 같은 역사를 보는데 그것은 바울과 바나바의 이고니온에서의 말씀 증거를 확증하시는 사실을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행14:3)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일련의 역사들은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한 것처럼 구원의 복음의 확산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와 은사들로 통하여 그들이 증거하는 말씀을 확증하는 역할로 있어졌던 하나님의 인류사랑의 또 다른 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지금은 이런 역사로 말씀을 확증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나 능력을 보이시고 역사하실 수는 있으시지만 절대로 의미 없는 역사를 나타내시는 하나님은 아니시기 때문에 이미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는 확인은 우리 손에 기록된 말씀이 확증된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말씀을 확증하기 위한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들은 이제 필요하지 않다.

특히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하신 것은 이 모든 도구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하나님 사랑의 확증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같은 낱말이 쓰인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형태를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5:7~8)는 요한 사도의 기록에서 함께 볼 수 있다.

지금도 증거하는 복음이 인정받기 위하여 표적, 기사, 능력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모든 증거를 통하여 구원의 계시를 확증하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부인하는 것이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은 순종만 하면 구원받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는 완벽하게 검증된 생명의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찾아 주신 생명의 복음을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의 것보다 절대로 가볍게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과거 천사들의 손을 빌어서 주셨던 율법도 지키지 않음으로 율법에 경계되는 모든 두려운 보응을 그대로 받았다면 이 놀라운 엄청난 구원을 가볍게 여긴다면 복음을 불순종함으로 받게 될 무서운 형벌을 역시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우리 손에 주어진 이 언약과 생명의 복음은 표적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들과 성령의 은사로 나눠 주신 것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확증하신 것이다. 믿으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