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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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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2:5~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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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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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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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내용에서부터 이 2장의 나머지 마지막 부분까지는 천사와 비교될 수 없으신 친히 천사를 창조하시고 천사의 섬김을 받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잠시나마 천사보다 못한 사람이 되신 사실을 거론하고 있다.
결국 죄인 된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되실 수밖에 없으셨고 모든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영원한 세계에서 천사에게 복종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천사들을 섬기는 자들로 부리시고 존귀를 취하심은 당연한 결과이다.
먼저는 오늘의 내용에서, 제한을 받지 않으시던 분이심에도 제한을 당하는 육신을 입은 사람이 되셨고 아버지의 목표인 사죄의 십자가를 감당하시고 당당히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여전히 존귀하신 위엄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다음 시간에는 이러한 고난을 통한 인간 구원의 완성을 찬양하게 된다. 인간 세계에서는 높고 존귀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낮고 천한 사람들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 함으로서 무한한 영광의 자리에 계시면서도 죄로 고통 하는 사람의 자리를 친히 경험하신 겸손과 사랑을 찬양하고 있다.
우리를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하신 우리 주님의 이러한 사역은 오늘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겨야 하는 사람들로서 어떻게 섬기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모범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계시다.
Ⅰ. 사람을 귀중하게 여기심(5~6)
하나님께서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아 현 세상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모든 것들과 일을 계획하시고 준비하심이 너무나 감사하다. 부리기에는 분명히 천사들이 더 편하고 순종을 잘하는 데도 왜, 그 천사들이 아닌 범죄하고 불순종하는 사람에게 더 마음을 쓰시는가 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런 이유에서 한결 같은 감사는 인용되고 있는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8:4) 라는 감사의 고백이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보실 때도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 하신 것도 사람의 마음을 말씀하시고 그 부패한 심령을 들여다보고 계신데 그럼에도 왜, 굳이 마음을 쓰시는가 하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성경의 도처에 도배(塗褙)되어 있다고 본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시14:1~3)
그런 사람들을 또 제 자신을 봐도 마음 쓰실 만한 가치가 없는 존재임에도 이 우주를 운행하심이 모두 사람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하다.
현재도 그렇지만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올 세상을…”(5f)했는데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세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9: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 “10: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 13:14에도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라는 내용들이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세상을 바란다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기대할 것이 거의 없다. 평균수명이 많이 늘어나고 먹는 것 입는 것들이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지만 장래에 들어갈 나라가 이와 같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별로 가고 싶지 않다.
바울도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8:24) 라고 진실한 고백을 하고 있다.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우리는 적어도 2019년 이전에만 해도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한 적이 없다.
불과 1년전만 해도 마스크를 사기위해 재고가 있다는 마트 앞에 장사진을 치고 약국 앞에 한참 줄을 서야 한다는 사실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그것이 모두 현실이고 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현재처럼 모두가 마스크를 써야하는 천국이라면 기대할 수 있는가!
사람 사는 세상이 왜, 이 꼴이 되었는가? 그것은 죄로 인하여 그렇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렘5:25)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올 세상…”(5f)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셨고 재림하심으로 완성될 것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6~17)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현재의 이 불합리하고 모순된 세상을 끝내시기 위해서 다시 오실 것이다.
이런 놀라운 일을 사람보다 순종 잘하는 천사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에 약하고 하나님을 거역했던 그러나 회개하고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준비하신다고 한다.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5b) 너무나 황송하고 감사한 일 아닌가!
존귀와 위엄의 형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하고 타락한 사람은 우리 인간적인 입장에서도 그렇게 귀하게 여기고 마음 둘만 한 그런 존재가 되지 못함에도 보잘것없는 이 인생이 하나님의 관심 때문에 감격의 표현이 계속되고 있다.
(6)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인용된 시편8편의 이 말씀은 모든 피조물의 으뜸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관심가지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을 그대로 고백하고 있다.
차제(此際)에 생각할 것은 이 시편의 말씀 중에는 강제적이지 않은 찬양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고백도 앞부분에서 증거하고 있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시8:2)
이러한 증거를 두고 모든 피조물위에 사람을 세우셨다는 사실은 이런 놀라운 “장차 올 세상”을 기대하는 우리 모두는 당연히 이 모든 일들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당연함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사랑받을 만한 근거가 없음에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고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4)는 베드로사도와 같은 감격을 찬양으로 고백하는 …
Ⅱ. 천사보다 낮아지신 주님(7~8)
그럼에도 이 엄청난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낮아지신 사실을 영적인 눈을 가졌던 다윗은 감격스럽게 고백하고 있다. 유대인들의 사상에서는 천사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로 사람보다 우월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그런 이유에서 바울이 거듭난 믿음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로마서8장말미에도 그 대상에 천사를 포함시키고 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38)
“저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7f) 인용되는 시편8편에서 사람을 피조물의 최고의 위치로 감사하는 내용이라 했지만 결국 범죄하여 천사보다 못한 존재가 되었고 이 파멸된 지위를 회복해 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보다 못한 사람이 되게 하셨는데 다만 그것은 영원한 시간이 아니라 “잠시 동안”이었을 뿐이다.
물론 여기 “잠시 동안”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나셔서 구속을 완성하시고 하나님 우편으로 돌아가신 약 33년이 될 수도 있고 죽으실 수 없는 분이 죽어 3일 밤낮을 무덤에 누워 계셨던 기간일 수도 있지만 둘 다 의미가 있는 이해라고 봐 진다.
그럼에도 다시 회복시켜 주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7b)라는 것은 바로 앞에서 말한 의미에서 같이 생각한다면 절망의 죄악을 해결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의 영광과 함께 천사보다 못한 존재로 타락한 인류를 다시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로 회복하신 사람들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8f) 이 말씀은 낮아지시고 죽음에까지 순종하심으로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신 영광에 돌아가(昇貴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할 수도 있고 하반절을 볼 때는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찾아 주신 하나님의 자녀들의 회복을 의미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현실적으로는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8b)라 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회복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지위 즉 만물을 온전히 복종하게 하신 본래 창조의 회복이 완전히 이루어 지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 문제는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완성될 것을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도 증거한 바 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19, 21~22)
죽으실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이를 믿는 자마다 본래의 영광의 자리에 회복시켜 주셨지만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8b)라는 안타까움이 채워질 영광의 약속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공포와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는 COVID-19도 중단될 것을 명령하지 못하는 초라함 속에 있다. 분명히 바이러스를 향하여도 명령하고 질병까지도 예수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처럼 명령하면 치료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의 권세가 유효하지 못함을 본다.
이러한 안타까움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로 이루신 구원을 믿으므로 죄를 해결 받고 죄와 상관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된 자들은 영광의 왕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사모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기대요 소망이다. 그때가 되어서야 영적인 세계와 이 보이는 세상의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져서 처음 범죄 이전의 에덴에서 처럼 만물이 회복된 사람들에게 복종하게 될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는 이미 사죄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었지만 아직 육신을 입은 상태로 영육의 세계가 회복되는 것으로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8b)”와 같은 “아직”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분명한 이상 우리는 불평하지 말고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자녀 된 지위를 지키면서 서로를 격려하며 소망을 잃지 말고 이 복음을 전하면서 마지막으로 주어진 이 귀한 약속을 바래야 할 것이다.
Ⅲ.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심(9~10)
여기서는 “오직[δέ, 그러나, 게다가, 하지만, 그와 반면에]”으로 시작함으로써 바로 앞절에서 거론된 지위를 회복시켜 주셨음에도 그 권위를 완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과 대조하면서 대속의 역사를 완성하시고 하늘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면서 이 땅에 내려와 사람이 되신 이유를 더욱 확실히 하고 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9f)
앞에서도 “잠시 동안”이 33년의 전 생애(生涯) 이든지 3일간의 죽음의 기간이든지 하나님께는 별 의미나 차이가 없으시지만 천사보다 우월한 존재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 영원히 천사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하자 둘째 아담으로 오셔서 그 영원히 존귀의 가치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다시 본래의 자리로 회복시키는 일을 위하여 빌립보서2:5~에 보는 대로 스스로 천사보다 못한 자리를 자원하셨다.
영원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고후5:21f)이라 하였지만 사실 영원히 죽음과 관계가 없으신 분으로 앞의 바울의 표현대로 ‘죽음을 알지도 못하신 이’로 죽음의 고난을 받으셨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의 생명에 대하여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8) 말씀하신 것처럼 죄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빼앗기는 사람과는 다르심을 선언하셨다.
이 말씀은 물론 생명의 권한을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가지고 계시다는 확인이다. 그러므로 온 인류를 위하여 기꺼이 생명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9m) 라고 다시 회복하심을 증거하고 있다.
바로 앞의 v8b에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한 것과는 반대로 여기서는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라는 내용에서 구속을 받았음에도 완벽하지 못한 사람들과는 대조적이다.
그럼에도 다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을 사람들에게 주시기 위한 전혀 자의적인 선택이셨음을 다시 확인한다.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9b) 다음 주에 보게 되겠지만 스스로 죽음을 택하심은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15)라는 엄청난 사랑의 이유이셨다.
특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으로 볼 때 하나님의 놀라우신 선물의 전달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는 표현 역시 모든 사람의 죄로 인한 참담한 형벌을 주님께서 친히 맛보신 것이다.
이렇게 하심으로서 계속 죽음에 내던져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죽고 사심으로 영광을 얻으신 것을 보이심으로 이제는 죽음이 절망이 아님을 인생들에게 격려하시기 위한 의미도 담고 있는 사역이셨다.
철저한 하나님의 중보자로서 하늘의 제사장직을 보이시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17b)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3:1b) 4:14~10:18의 좀더 구체적인 제사장으로서 한 모습이기도 하다.
이제 오늘의 마지막 절은 다음절에 연결되기도 하면서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증거한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10f) NT성경에 비슷한 내용들은 바울뿐만 아니라 깊은 영적 진리를 증거하고 있는 요한의 서신들에서도 더러 나타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11:36; 골1:16)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4:11b, 계1:8)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만물은 당연히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라는 확인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결과를 다시 증거하고 있다.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10m)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바라고 기대하는 것은 이 보이는 세상과 같이 사라질 영광이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다.
사람은 범죄 후 단지 보이는 세계속의 소멸되어가는 피조물일 수밖에 없는 에덴에서의 생령이 아니라 육체가 되어 버렸지만 죄를 해결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의 회복을 위하여 오신 주님을 믿고 순종한다면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하나가 되어 영원한 영생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부정하고 불순종한다면 소멸하는 자연처럼 이 세상을 마칠 뿐만 아니라 영원속에는 불순종의 형벌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10b) 앞에서 제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는 새 생명의 창조자라고 표현한 바 있다. 여기서는 “구원의 창시자”라는 표현에서 이를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그 구원의 창조는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하여 자연적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죽음의 고난을 먼저 겪으시면서 다시 부활하심으로 이후부터는 죽음이 저주가 아니라 영원으로 돌아가는 통로로 변화시키신 역사는 공의의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다는 선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구원의 역사는 천사들을 위하여 하신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사람들을 위하여 하신 것이기 때문에 구속의 역사도 전적으로 죄의 고통과 저주에 힘겨워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을 죄의 저주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부리시는 천사보다 못하게 되셔서 죽으실 수 없는 존재가 죽을 사람이 되신 것이다.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종으로 오셔서 죄의 대가를 치루시기 위해 영생의 존재 즉, 죽음과는 영원히 관계가 없으신 하나님이시지만 죽음을 맛보시고 부활하셔서 이제는 영원히 그 죽음의 저주를 끝내셔서 구원의 창조자가 되셨다.
이제 여기에 우리 각자가 응답해야 할 차례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이러한 엄청난 희생이 다른 사람 아닌 나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씀하시는 데 나는 그 주님을 위하여 그의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할지 새롭게 도전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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