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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3:7~13 2022-03-06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지난 시간(1~6)에는 유대인들의 영원한 존경의 대상인 모세보다도 우월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바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세보다 우월하시다는 가르침이 이방인들에게 주는 것이었다면 별로 충격이 없었겠지만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약속을 따라 났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그렇게 생각처럼 간단한 것을 아닐 것이다. 이것은 과거 사울이었던 바울을 보더라도 그럴 것 같다.

이제 논의는 좀더 진전되어서 그들이 존경해오던 모세였지만 그의 지도 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메시아를 탄생시킨 하나님의 약속 외에는 계속 실패했던 과거의 역사를 들어서 온전한 언약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아래서는 그렇게 실패하지 않도록 권면을 주는 것으로 보다 실제적이다.

과거 조상들의 문제는 여기에 지적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들으면서도 옥토 같은 마음으로 받지 못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받은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였음을 지적하면서 비록 복음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완고한 마음으로 불순종한다면 여전히 실패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시편95:7b~11까지를 인용하면서 특히 광야에서 물이 없어 원망하던 므리바나 맛사에서의 사건들을 돌아보며 안타까워하는 일들을 인용하고 있는 내용이다. 사실 광야는 이 세상이고 물은 일상 마시는 물이기 보다는 생명의 물에 대한 갈증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요한복음4장의 수가성의 여인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화에서도 볼 수 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풍부하지만 마음이 완악하여 불순종한다면 어떤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없는데 그것은 은혜의 통로가 바로 믿음이기 때문에 그렇다. 완악한 것은 바로 이 은혜의 통로인 믿음을 닫아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는 우리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시고자 하는 선한의지는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완악하게 거절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거나 싫어하는 사람까지 하나님은 절대로 억지로나 강제로 천국에 이끌어 가실 분이 아니라는 데서 각자의 순종은 중요하다.

이런 입장에서 바울 사도의 증거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하나님은 은혜를 넘치도록 베푸시지만 이 은혜의 기회를 외면하고 잃어버린다면 넘치는 은혜에도 불구하고 각박함과 안타까움만 남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과거 이스라엘의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Ⅰ. 과거 이스라엘처럼 완악하지 말라(7~9)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과 사랑에도 불구하고 구원에서 떨어지고 잃어지는 것 또한 다른 성경보다 히브리서에 자주 등장하는 특징 중 하나라고 하였다. 결국 이러한 경계를 OT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정적인 모범으로 다루고 있다. 이렇게 과거 이스라엘의 완악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한 것을 두고 오늘 본문은 “그러므로”로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께서 그의 쓰시는 종들을 통하여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1:21)

이런 입장에서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의 권위를 성령께서 이르신 것이라고 여기서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7f) 바울 사도 역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딤후3:16f)이라고 확인해 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계실 때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12:32; 눅12:10)말씀하셨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7b) 그 때 성령으로 이르신 말씀을 거역하여 망한 것을 오늘 우리가 보고 또 과거보다 완벽한 하나님의 언약인 복음을 들었다면이라는 자연적인 진행이다. 들은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경계되는 것이다.

완악함에 대한 경계는 뒤에서도 기록되고 있다. “너희는 삼가 말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12:25)

좀더 구체적으로 저들의 조상들이 은혜를 누리지 못한 사실의 경계를 연이어 주고 있다.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8) 이스라엘에 있어서 광야 40년은 저들의 하나님의 신뢰에 대한 시험 기간이었다. 불순종하는 저들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신 역사를 계속 보이셨다.

광야에서 순종하고 따르기만 하면 영광에 참여할 것임에도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시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제로는 은혜를 누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인지 하나님께서 저들의 상태를 시험하신 기간이었다.

가나안을 40일간 정탐한 후 돌아와 불평하는 열 지파의 대표들에게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 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민14:22, 34) 선언하셨다.

이러한 과거의 역사를 여기에 경계로 돌아보면서 주시는 지금의 권고가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9)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시험받으실 대상이 결코 아니시다. 그런 이유에서 야고보를 통하여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1:13) 말씀하신다. 그럼에도 사람이 하나님을 시험하겠다는 것은 약속이나 말씀을 믿지 못하는 불신의 완고한 마음에서 나타나는 불순종의 행동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끄셨던 과거의 역사에서 하나님은 맹세하시고 언약을 지키셨지만 항상 그의 백성들은 거역하고 불순종하여 하나님을 진노케 만들었고 거기에 대한 형벌은 고스란히 불순종한 당사자들이 당한 역사는 광야 40년뿐만 아니라 가나안에 정착해서도 바뀌지 않았고 그 결과로 앗수르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고 말았던 것이 불신의 역사의 결과였다.

이런 좋지 않은 역사를 왜, 복음시대에 그것도 복음을 받아들인 같은 민족에게 이렇게 구체적인 사실을 들어 경계를 주시는가 하는 이유가 이제 계속되는 내용이다.



Ⅱ. 약속에 참여하지 못할 수도 있다(10~11)

사람들의 관계에서 콩깍지가 씌우면 맹목적(盲目的)이 되는 경우들을 더러 본다. 사람에게 콩깍지가 씌워도 바탕이 사랑이라면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미혹을 당해서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비극의 결론을 맞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진실하시고 참되신 하나님께는 콩깍지가 씌워도 절대로 손해나거나 문제될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맹목적으로 자신을 따르고 섬기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너무나 분명하고 진실하시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자신의 백성들이 자신을 알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하나님은 전혀 목적없이 자신에게 맹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10) 이 말씀이 하나님을 진노케 하던 과거의 불순종의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말이면서 복음 속에 있으면서도 그럴 수 있음을 경계하시는 것이다.

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불순종하여 진노케 하는가 하면 이유는 간단하고 분명하다. 그것은 마음이 다른 곳에 팔여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어떤 때는 잠시 마음이 다른 곳에 팔릴 수도 있을 것인데 이스라엘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혹되다[πλανάω, (안전, 진리, 도덕에서 부터)방황하다, 속다, 죄를 짓다, 넋을 잃다, 길을 벗어나다]”는 결과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바른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가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하게 나아가야할 길을 바로 볼 수 있다면 곁길로 가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보여주시는 바른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은 주변의 우상들이 가장 큰 문제였었다. 오늘 우리에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신앙인들이 항상 바른 길을 벗어나서 곁길을 걷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지 우상에게 눈과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그렇게 까다롭고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면 되는 것이고 그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따르면 그만이다. 하나님께서 그 불순종하던 자신의 백성들에게도 친히 말씀하셨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30:11~14)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 가지이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였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말씀하실 수밖에 없으셨다. 그 결과는 당연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11) 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노여워하시게 하는 것은 결코 복이 되지 못할 것이다. 바울이 이를 언급한 바 있다.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고전10:22) 이 말씀 역시 귀신제사에 동참하는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경고다.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말씀하시도록 해야 하는데 진노가운데 말씀하시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선택이다. 그것은 복의 약속이 아니라 분명히 형벌의 선언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이것이 과거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진노하셔서 맹세하신 것이라면 그보다 더 분명한 영생의 약속을 주셨음에도 거역하고 외면한다면 그 받을 대가는 너무나 분명한 것이다.

여기에서의 경계는 분명하다.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빠져나왔지만 이집트에서의 우상숭배에 습관이 되어 계속 하나님의 언약과 능력을 의심하고 주시는 말씀에 마음을 닫아 버린 완악한 자들은 약속에 참예하지 못한 전례에 빠지지 말라는 권고이다.



Ⅲ. 은혜에서 밀려날까 조심하라(12~13)

과거는 과거로 끝나야 한다. 그럼에도 과거의 사실을 알고도 같은 안타까운 전철을 밟는다면 그것은 더 큰 비극이다. 불완전한 율법아래에서 모세의 지도를 받으며 거역했던 이스라엘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또 다시 그런 전례를 반복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경계가 마지막 말씀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유한하고 나약한 사람과의 관계를 연결하는 것은 그렇게 신비한 어떤 방법이 아니라 이미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을 믿고 순종하는 아주 단순한 것이다. 더 어려운 것을 사람에게 요구하셨다면 아무래도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단순한 방법도 순종하지 못하고 믿음에 이르는 사람이 많지 못한 데서 볼 수 있다. 또 그러한 이유에서 불신이 하나님께서 가장 심각하게 보시는 악한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12f)라고 하여 믿지 못하는 악한 마음을 품는 것은 조심하고 피해야 할 안타까운 자세라는 것이다. 친밀하게 “형제들아!” 불러 놓고 조심해야할 자세를 지적하는데 그것이 바로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이다.

왜냐하면, “믿지 아니하는[ἀπιστία, 믿음 없음, 불신, 불충실, 불신앙] 악한 마음” 즉, 불신은 앞에서 칭송한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πιστός, 믿는, 신뢰하는, 진실한]”과는 반대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12b) 대개의 경우 사람이 만든 생명 없는 우상과 구별되는 말씀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살아 계신(계시는) 하나님”으로 표현하였다.

(신5:26; 수3:10; 삼상17:26, 36; 왕하19:4, 16; 시42:2, 84:2; 사37:4, 17; 렘10:10, 렘23:36; 단6:20, 26; 호1:10 - OT 15회 마16:16, 26:63; 요6:57아버지; 행14:15; 롬9:26; 고후3:3, 6:16; 딤전3:15, 4:10; 히3:12, 9:14, 10:31, 12:22; 계7:2, 15:7 - NT15)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고백하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거듭난 그 사람 속에 성령께서 오셔서 그 사람의 인격을 지배하시므로 그 사람과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기 전에는 아직까지 신앙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앙은 전 인격적인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성령과 함께 하나로 사는 것이고 이것은 육체를 벗어날 때도 바뀌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성경에서 계속 경계하는 불신앙은 바로 이 반대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즉, 하나님과 철저한 분리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이유를 이해하고 나서 라야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12) 라는 경계의 교훈이 이해되고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비극이 바로 여기에서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12b) 특히 이 경계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안에 들어와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고 있는 경계라는 데 무개가 있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비극은 이 세상에서 명예를 잃고 재산을 잃고 건강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잃는 것보다 더 큰 비극이 바로 생명의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좋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은 육신의 평생에서 잃는 것이지만 하나님을 잃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잃는 것은 영원을 잃는 것이기 때문에 비극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이치를 깨닫고 나서야 바울의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8~9f)라는 고백이 비로소 이해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을 장치가 바로 이어지는 말씀이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13)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에 바르게 응답하지 못하는 것은 죄의 유혹 때문이다.

여기 할 구절 속에 육하원칙(六何原則)에 의한 신앙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고 이것은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함께 우리 신앙의 과제 중 일부이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13f)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은 v7b에서도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이라는 내용과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 가능한 모든 것은 “오늘이라 일컫는 매일”이다. 그 이상을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항상 “오늘”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도 “오늘”만 있다고 생각하고 행한다면 우리는 딴 생각을 하거나 잘 못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일 어떻게 될 것을 모르면서도 항상 내일로 미루는 것이 문제이다. 바른 신앙의 사람은 섬길 것 찬양할 것 드릴 것이 있다면 미루지 않고 “오늘”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드리는 것이다.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13m) “오늘” 그렇게 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를 가르쳐주고 있다. 역시 “피차” 즉, ‘서로 간’에 이며 그 대상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이다. 신앙은 하나님과 나의 개인의 관계 속에서의 구원이지만 또 혼자가 아닌 “피차” 즉, 함께 라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신앙에 권면이 필요 없는 예외의 사람은 없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는 장로도 집사도 성도도 전도자도 피차 서로의 권면의 역할을 잊어서는 안된다. 오늘 저를 통한 이 메시지 역시 그러한 권면이다. 이것은 여러분을 통한 저에게 주시는 권면이기도 한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13b) 누구든지 한 눈을 팔다가 죄에 유혹에 빠지게 된다. 죄는 항상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회를 틈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7:11)고 바울은 탄식하고 있다.

위대한 신앙의 사람 다윗을 보라! 요압을 비롯한 장군들과 군인들을 모두 랍바성에 진군시켜 두고 혼자 낮잠을 즐긴 후 저녁바람을 쏘이기 위해 궁전 옥상에 올라간 그때를 마귀는 놓지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삶의 자세는 세상의 영향이든 어떤 이유에서 이든 언약의 말씀에 대하여 마음이 완악하게 굳어지지 않는 것이다.

믿음의 후손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엄청난 이적과 능력의 역사를 보면서도 다른 것들에 미혹되어 믿지 못하는 불신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으로 약속의 땅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비극을 부르고 말았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애쓰는 것 못지 않게 삼가 하고 조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악하게 보시는 불신의 유혹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한다.

이것을 위한 장치로 이 땅에 함께 두신 같은 믿음의 사람들 간에 서로 권면하여 죄의 유혹으로 하나님께 완악해지지 않도록 권면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