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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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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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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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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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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끌었던 모세와 그럼에도 진정한 안식을 줄 수 없었던 모세를 비롯한 하나님의 종들과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완성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씀이다.
물론 이러한 내용에서도 이스라엘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지 못하고 역할을 여호수아에게 물려주었던 모세와 비교될 수 없는 진정한 안식을 이스라엘에게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게 마련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비교는 계속되고 있다.
인생은 어떤 일을 하고 있건 일이 없건 인생자체가 사람의 과제이기 때문에 쉼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또 일선에서 은퇴를 하고 물러나 사는 사람도 진정한 안식은 필요하다. 일주일의 사이클에서 안식이 필요하다면 희년과 같은 안식년이 필요하고 어쩌면 인생을 끝내고도 안식을 간절이 사모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사람이다.
안식이 필요한 사람 그 진정한 안식은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누릴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사람들의 일생동안 마음 쓰는 과제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쉬고 있다면 안식을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안식이 필요하다는 것 자체가 안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 세상에서는 퇴직을 하고 나서도 안식이 되지 못하는 것은 또 다른 수고가 기다리기 때문이다. 일을 손에서 내려 놓는다고 하는 것은 단순한 육신의 안식일 수 있지만 육신이 쉬면서 어쩌면 마음은 더 무거워지기도 하는 것이 퇴직 후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과제이다.
이런 인생들에게 우리 주님께서 초청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8~29)
예수 그리스도의 안식에 초대에서 헤아려볼 수 있는 것은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하는것과 함께 또 다른 과제를 감당해야만 쉼을 얻을 수 있다 말씀하시는 데 그 과제는 오히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과제를 주심으로서 쉴 수 있다는 다소 역설적인 초청이다.
우리 각자 자신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너는 안식을 가지고 있는가?” 결국 사람 스스로는 쉴 수 없다. 그것은 “죄[ὀφείλημα, 빚]”라는 짐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물리적인 것이나 화학적인 것이 아닌 영적인 과제라는 데서 진정한 쉼 즉, 안식은 죄를 해결하는 것 만이 인생으로 안식할 수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희생을 통한 사람들의 쉼을 약속하셨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결국 OT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땅의 안식은 그림자 적인 것일 뿐이고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나서야 이스라엘만이 아닌 온 이 지구촌의 인류에게 안식을 주실 수 있었지만 여기에도 중요한 단서는 이 안식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영원 속에 허락하신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약속이다.
모두가 바라고 사모하는 안식을 결국 오늘의 제목이 갈림길이 됨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분명하고 확실한 약속도 대상이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사실적인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약속은 또 믿음이라는 다른 면은 꼭 필요로 한다.
Ⅰ. 들은 말씀이 유익되지 못하는 이유(1~2)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안식은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이 다 들어간다고 해도 문제되지 않을 약속임에도 나 자신이 제외된다면 그것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이 은혜를 잃을 수 있는 원인을 아주 간략하게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그러므로”로 시작되고 있는데 앞의 3장 마지막 부분과 연결되어지는 내용이다.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3:19b)는 말씀에 연결되는 말씀이다.
믿음의 약속은 분명히 성경 어디에서나 “평안”이다. 그럼에도 여기에서는 그 약속과 어울리지 않는 경계를 주고 있다.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두려워해야 하는 사람들이 불신의 사람도 아니고 “우리는, 너희 중에는” 즉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 경계가 주어지고 있다.
그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그의 안식에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약속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의 안식에 …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는 염려로 두려워하라는 당부이다.
신앙은 항상 거룩한 긴장감으로 사는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그 주님을 경외함으로 두려워하며 세상 속에서는 성령을 의지하며 죄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성도의 삶은 바로 자긍하거나 완전히 얻은 것처럼 자만하지 않는 신령한 긴장감으로 사는 것이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2)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은 바뀌지 않음에도 이렇게 세상과 구별된 삶이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지속되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라고 분명한 여유를 말씀하고 있음에도 믿음의 삶에 있어서는 경각심을 주고 있다.
여기 “안식”은 다음 항목에서 좀더 보겠지만 적어도 이 “안식”이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약속[ἐπαγγελία, 통고, 소식 - 14회]”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약속은 언제나 상대적이고 어느 한쪽에서 어기면 성립되지 못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어기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언제나 스스로 어겨서 손해보는 것은 여기서도 광야의 백성들을 거론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당사자였던 주님의 백성들이었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2f) 여기서는 먼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완성된 복음을 받은 복음 속에 성도들을 비교하고 있다. 바로 앞에서 “약속[ἐπαγγελία]”을 거론한 저자는 여기서는 다시 “복음 전함[εὐαγγελίζω, v6]”을 거론하는 것은 다르지 않은 하나님의 언약을 강조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도 역시 “우리도” 라고 하여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포함한 그리스도인들로 막연한 OT의 약속보다 더 완벽한 언약을 받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2m) 하는 것으로 미루어 “그 말씀”과 “그들에게”라는 3인칭으로 쓰는 것으로 볼 때 2인층으로 쓴 “우리도”와는 다르게 과거의 가나안의 안식에 이르지 못했던 전례를 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앞에서 “약속”을 말했던 저자는 다시 “복음 전함”을 말하고 여기서는 다시 “말씀[λόγος]”으로 반복을 피하면서 더욱 확신을 주고 있다.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2b) 이것은 유익되지 못한 원인으로 과거를 들어 오늘을 경계하고 있지만 어느 시대나 바로 지금까지도 가볍게 들어서는 안될 안타까운 자세이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살후3:2b)고까지 하였다.
유다 말기의 여호야김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후디가 서너 쪽을 낭독하면 왕이 칼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두루마리를 모두 태웠더라, 엘라단과 들라야와 그마랴가 왕께 두루마리를 불사르지 말도록 아뢰어도 왕이 듣지 아니하였으며”(렘36:23, 25) 라는 안타까운 모습을 본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언제나 믿음으로 듣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말씀이 되고 생명의 말씀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믿음으로 듣지 못하고 그냥 소리로 듣는다면 새소리를 듣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결부시키다[συγκεράννυμι 함께 섞다, 혼합하다, 결합하다 ← σύν + κεράννυμι섞다, 혼합하다]” 귀에 들리는 것이 다 듣는 것이 아니다.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말씀에는 반드시 믿음을 합쳐서 들어야 하나님의 은혜가 되고 감사가 되고 찬양이 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나의 믿음을 함께 섞어야 그 말씀이 나에게 능력이 되고 구원이 된다.
그러므로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2b)는 말씀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3:19b)는 말씀의 반복이면서 오늘 더 완벽한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는 경종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1:20) 모든 말씀에 아멘과 함께 믿음을 합하여 여러분 자신의 생명이 되시는 말씀 되시기를…
Ⅱ. 누구에게나 필요한 안식(3~5)
사실 안식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범죄할 것을 미리 아시고 창조시에 벌써 준비해 두신 것으로 이미 그 약속에 들어가 있는 과거의 성도들이 있는가 하면 이제도 계속적으로 들어가고 있지만 불순종과 불신의 사람들은 그 안식을 누리지 못할 것을 말씀하신다. “안식[κατάπαυσις, 휴식, 거주 - 3:11, 18, 4:1, 3, 5, 8, 9, 10, 11]”은 창세기2:2에 맨 먼저 등장하는데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서론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범죄로 “땅이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3:18f)는 선언과 함께 이 땅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괴로움과 고난이 되었다. 욥기서에서 엘리바스를 통하여 말하는 것처럼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5:7)는 증거가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이 세상 나름대로 생긴 모든 도(道)라고 하는 것도 대부분 사람들 스스로 이 고난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었지만 땅에서 생겨난 것들이 하늘의 가치를 절대로 따라갈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 대한민국에 그리스도인들보다도 더 많은 수가 있는 불교도 본래 인생의 고난을 극복해 보려던 카필라 왕국의 왕자 싯달다에 의해서 시작되었지만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으로 인생의 고난을 극복해 보려는 나름대로의 도전은 상당한 깨달음으로 보여진다.
이분의 깨달음은 인생의 생노병사(生老病死)가 바로 고(苦)이고 이것의 원인이 집(執)이며 이것을 없애면 고난을 탈출할 수 있다고 하여 이 집을 멸(滅)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멸하는 방법으로는 도(道) 즉, 팔정도[八正道-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로 행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 불교의 유명한 사성제(四聖諦) 교리이다.
사람의 일생이 사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 모두를 안식 없는 고난으로 본 것은 옳다. 여기 처음 탄생은 분명 환희요 기쁨이지만 잉태시키는 어머니에게는 고난이고 욥기서에서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증거하는 것처럼 고난의 시작이라는 데서 그르지 않다.
그럼에도 집(執) 때문에 고(苦)가 온다는 것도 다른 편에서는 이해의 한계가 있는 것은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반드시 각 사람의 집(執) 즉, 집착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없이 범죄한 인류에게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찾아오는 안타까움 이기 때문이다.
안식 즉, 쉼이 필요한 사람들의 삶을 나름대로 제시했지만 이 분의 깨달음에 창조주의 의향이나 뜻이 전혀 반영되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까움이고 나름대로 이 사성제(四聖諦)를 성경으로 다시 배열해보면 고제(苦諦) 집제(執諦)는 인간 실존을 이해하고 있다는 데서 수긍할 수 있다.
다만 멸제(滅諦)와 도제(道諦)는 순서를 바꿔서 세번째가 도제(道諦)가 되어야 하겠지만 전적인 인간노력인 팔정도가 아니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요14:6)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의 도(道)로 사람의 죄로 인한 욕망인 집착을 멸하면 안식 즉, 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b)라는 주님의 약속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3) 긴 말씀이지만 이제껏 다루어 온 내용의 반복이다.
그러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3b)라는 말씀은 연이어지는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4) 하여 창세전에 이미 마련된 안식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시편 95편의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5) 인용이 3:11과 앞의 v3에 반복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리고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기록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거기에 불순종하는 사람들의 멸망도 분명히 반복적이다.
모두가 사모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 주님의 십자가 희생을 힘입어 약속대로 누리는 …
Ⅲ. 진정한 안식은 사람 스스로 얻거나 줄 수 없다(6~7)
여기서는 광야에서 안식의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들어가지 못한 그 안식이 남아 있다고 하므로 큰 역사의 범주에서 볼 때는 이스라엘의 일부가 꺾인 가지처럼 버려지고 다른 가지가 접붙임을 받았다고 한 로마서11장의 바울의 논리와 비슷한 내용을 본다.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6)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마련하신 그 안식에 아직 충분한 여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약속을 듣고 확인한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이 부르심에 합당한 순종을 드리지 못함으로 들어가지 못함을 과거 모세의 지도 아래에서의 이스라엘을 다시 거론하고 있다.
이러한 안타까운 본보기를 들어서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7) 라고 이제 모세 후 오백 년이 지난 다윗을 비롯한 시편을 들어 역시 경고하고 있다.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시편 95편이 다윗이 직접 기록하였다는 기록이 우리의 성경에는 없지만 주로 LXX을 인용하는 이 히브리서 기자는 LXX에 다윗의 시로 기록되고 있고 또 대부분의 시편들의 기록자가 다윗이라는 데 근거를 두고 이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7m) 이것은 주로 인용된 시편95편을 기록한 입장에서 과거 모세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고 시편을 쓴 당시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귀 기울여야 하는 내용은 “오늘이라고” 하는 시기(時期)이다. 모세의 때도 아니고 다윗의 때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완성되고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보다 분명히 이루어진 히브리서 기자가 이 경계의 교훈을 쓰고 있는 당시에서부터 지금은 물론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추수를 위하여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 안식의 약속을 듣는 모두에게 이 “오늘”은 중요한 과제이다.
이래서 하나님의 말씀이나 언약은 그 때 그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면서 동시에 오늘 나(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광야에서 모세를 통한 안식의 약속에서 왕국 시대였던 다윗의 때는 물론 모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은 오늘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자들을 대상한 것이라는 데서 이 시간에 이 말씀을 듣는 이자리의 우리에게도 그 “오늘”은 해당되는 것이다.
언제나 “오늘”이라는 주어진 시간이 우리에게 최대의 기회이고 그 “오늘”을 놓쳐버리면 그 기회는 잃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있어서 절대로 잃지 말아야 할 약속의 시간이 바로 “오늘”인 것이다.
창세기18:17에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을 앞두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하셨던 것처럼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3:7) 하심과 같이 하나님은 세상에 행하실 일을 절대로 숨기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그런 의미가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하신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복받을 기회도 심판하실 계획도 절대로 몰래 행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데서 역시 사람과 다르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좋은 비결조차도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공개하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감사한 것은 우리 사랑의 아버지 이신 하나님은 우리 죄인과 비교될 수 없는 영광의 존재이심에도 어떤 것도 티끌 같고 먼지 같은 사람일지라도 숨기지 않으시고 반드시 먼저 알리시고 행하신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영적인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전적으로 사람의 탓이다.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8) 모세와는 다르게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식의 땅이라고 일컬어 지는 가나안에 백성들을 데리고 들어갈 수 있었으나 이것 역시 상징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가나안의 안식은 또다시 잃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왕자처럼 자라고 하나님과 대면했던 모세가 아니라, “예수”와 같은 이름의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안식의 땅으로 상징되는 가나안에 데리고 들어가게 하신 것도 보다 완벽한 안식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의향이셨음을 알게 된다.
독특한 것은 여기 “여호수아[יְהוֹשׁוּעַ, 야훼는 구원이시다]”의 그리스식 발음이 바로 “예수[Ἰησοῦς]”이다.
다음 v9절에 이어지지만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8)는 말씀이 미래의 보다 완벽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한 안식을 염두해 두고 있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든지 죽기 전에는 누구에게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은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듣는 말씀에 믿음을 합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런 입장에서 듣는 말씀도 중요하지만 우리 각자의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 안식을 사람이 범죄하기 이전인 창세전에 이미 준비해 두셨다. 에베소서1:3~4과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안식은 곧 교회예정과 연결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약속에 믿음을 합하지 않으면 일방적인 헛된 약속이 되고 만다.
무엇보다도 이 약속은 모세나 여호수아 시대도 다윗왕조의 때도 아닌 오늘이라고 하는 지금 여호수아라는 이름과 같은 예수(야훼는 구원,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그리스도를 따를 때만 가능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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