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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4:9~13 2022-03-27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히브리서 시작의 특징으로 영적인 존재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 다음으로 두려워하는 대상인 천사들과 비교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결같이 사람으로서는 가장 우러러보는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전달한 모세와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시라는 사실을 오늘 말씀에까지 증거한다.

이제 NT의 다른 서신들에서 별로 다룬 바 없는 이 땅의 대제사장으로 선택되어 온전치는 못했지만 하늘의 모형을 따라 섬겼던 아론의 후손인 대제사장의 역할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자신이 친히 한번으로 영원한 제사를 완성하시고 하늘의 지성소로 들어가셔서 완성하신 온전한 대제사장 되심을 다음의 시간에서부터 ~10:18 계속 거론하게 되는데 이 내용이 히브리서의 본론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모세의 중보의 역할을 다루긴 하지만 그 율법을 전달한 모세보다도 그 모세를 통하여 전달한 하나님의 말씀의 귀중성과 그 말씀 즉 λόγος가 인격으로 오셔서 모든 범죄를 해결하고 드러내는 사실을 오늘 내용에서는 증거하고 있다.



Ⅰ.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9~11)

앞 부분에서 연결되어지는 내용으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안식, 그림자에 불과했던 안식 조차도 불신으로 들어갈 수 없었지만 이제는 온전한 하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권면하고, 역시 과거의 불신의 본에 빠지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온전케 하신 영원한 안식으로 초대하고 있다.

여기서도 계속해서 “안식”이라는 표현이 쓰이고 있지만 v9의 낱말과 나머지 v10, 11의 용어가 다르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 특별하다. 이 3~4장에서 “안식”이라는 표현이 무려 10번이나 사용되지만 9번은 모두 “안식[κατάπαυσις, 쉼, 휴식]”으로 사용되었다.

그럼에도 v9에 쓰인 단어는 “안식[σαββατισμός, 안식일, 휴식]으로 NT의 다른 곳에서는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낱말로 이곳에 만 쓰여지고 있다. 그런 이유에서 이 낱말의 어근을 통해서 차이를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낱말은 최초로 하나님의 안식을 표현한 창세기2:2의 히브리말 “안식[שָׁבַת]”의 음역을 그대로 헬라어에 가져온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그럼으로 단순한 휴식이나 쉼이 아닌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영적인 안식을 강조하기 위하여 쓰인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9) 했는데 앞의 v6f에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 라는 내용과 비슷한 감을 느끼지만 여기서는 안식할 때를 말하는 반면에 v6f에서는 들어갈 자들 즉, 안식에 들어갈 사람들을 거론하는 차이를 본다.

여기에 쓰인 “안식”을 생각했지만 v5에서는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셨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고 v8에서는 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는 그들을 가나안에 이끌고 들어갔지만 그것도 진정한 안식은 아니었다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참 안식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안식”이 다른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9b)라고 확인한다. 본래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 후손들이 이집트에 들어가 나라를 이룰 만큼 키우셨다. 마침내 그들을 이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이끄시면서 십계명을 주시기 바로 전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출19:5) 라고 하심으로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 삼으셨다는 말씀을 OT에 수를 헤아릴 수 없이 하셨다.

요단을 건너기 전에도 율법을 확인하시면서 “여호와께서 … 맹세하신 대로 오늘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그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신29:13)고 증거하셨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전 인류를 메시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 삼으시려는 그림자에 불과 했다.

드디어 구속을 완성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가 이 땅에 탄생한 후 이를 확인하지만 베드로를 통한 증언을 인용하면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2:10) 하는데 이것은 본래는 이스라엘이 아니었던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분명하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9b)라는 증거는 이스라엘이건 이방인이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힘입어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언약임이 분명하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10) 이것은 앞의 v9의 말씀을 설명하는 내용으로 연결되고 있다. 여기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에서 “들어간”이라는 표현 때문에 과거(過去)로 이해되는 것 같은데 과거는 과거이지만 정확한 시간을 의미하지 않는 일반적으로 완성된 사실을 의미하는 동사이다(不定過去 - 우리말에는 없는 형태로 유럽언어에 남아있는).

우리는 천국(天國),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할 때 흔히 이미와 아직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이미 이루어졌고 그것을 누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완전히 누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후인 것과 같다.

창세기2:2에 하나님께서 안식하셨고 범죄함으로 잃었던 그 안식이 온 인류에게 주어지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심으로 죄를 용서하시고 모두 안식에 들어갈 수 있게 준비되어 있으므로 불순종만 아니면 이제 그 하나님의 안식은 곧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것이 되었다는 확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11) 이 말씀부터 v13까지는 이 히브리서 첫 부분(1:1~4:13)의 결론이다. 그러면서도 안식에 들어갈 것을 힘쓰라는 권면이 중심이다.

창세전에 마련하시고 믿음의 선진들에게 언약하셨지만 조상들의 불순종으로 들어가지 못한 그 안식은 이제 말씀에 순종이라는 믿음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으므로 과거의 불순종의 전철을 밟으므로 잃는 일이 없게 하라는 당부이다.

그러면서도 인격이신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들의 감추고 있는 부분까지 드러내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참 된 순종의 믿음인지 믿는 시늉만 하는 것인지까지도 완벽하게 밝혀 내실 수 있으므로 진정한 안식의 주인이 될 사람들을 실수없이 완벽하게 가려 내실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기회는 주어졌을 때, 아직 기회가 있을 때 놓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안식에 들어갈 기회가 주어졌을 때 남아 있을 때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



Ⅱ.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12)

우리는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는 요한 사도의 선언을 자주 인용하곤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다만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된 글자로만 대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나라는 글자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없다.

이집트를 빠져나온 후 시내산에서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은 두려워했다.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20:19)

그런 이유 때문에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셨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1:2f)라고까지 유약(幼弱)한 우리 사람들을 배려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12f) 즉, 소설이나 신문처럼 어떤 사건을 묘사하는 글이 아니라 살아 움직일 뿐만 아니라 역사를 일으키는 생명이라는 것이다.

이 히브리서의 또 다른 독특성 중에 하나는 요한 사도와는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를 [아들]로 표시하면서 [말씀]이라고는 쓰지 않은 것이다. 다만 여기서 말씀의 능력은 v13과 함께 어떤 것이든지 숨기지 못하고 들어내시는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1:21)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이 말씀을 읽을 때는 그 기록하게 하신 같은 성령께서 기록할 때와 같은 감동으로 역사하심으로 말씀의 깊은 뜻을 깨닫게 하시는 역사를 말씀을 깊이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경험하곤 한다.

바울도 같은 진리를 증거하고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한 것처럼 죽어 있는 말씀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말씀에다가 “활력[ἐνεργής, 유효한, 효력 있는, 강력한 ἔν + ἔργον]” 하고자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의 손에 쥐어져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칼 스스로가 필요한 역할을 위하여 활동하는, 우리가 육신적으로 상상할 때는 상당히 두려운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고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안다면 그 말씀을 대상하게 될 때 두려워 떨게 되는 것이다.

OT에서부터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사용하셨다.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스9:4f)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들아 그의 말씀을 들을지어다…”(사66:2, 5)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대부분의 칼은 한쪽에만 날을 가지고 있다. 좌우에 양날을 가진 칼은 대개의 경우 전쟁의 무기로 사용된다. 그런 이유에서 믿음의 무장을 함에 있어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7)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한 것은 어떤 칼보다도 날카로운 칼이라고 묘사하는 것인데 이러한 표현은 계시록에 나타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기록되고 있다. “…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오고 …”(계1:16)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19:15f)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 …”(21f)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12m) 사람의 영육(靈肉)에 대한 이 묘사로 순서의 차이는 있지만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적극적인 표현과 대비된다.

이 표현을 읽다 보면 현대의 의술을 생각하게 한다. “찔러 쪼개기”라는 표현이 “찌르다” 나 “쪼개다”라는 묘사는 그대로 CT나 MRI 촬영으로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고 그것도 부족하면 내시경(內視鏡)을 통해서 내장까지 들여다본다 “찌르다[διϊκνέομαι, 꿰뚫다, 관통하다]”는 묘사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여기는 이런 현대의학보다 한가지가 더 추가되고 있는데 그것은 뼈를 쪼개 본다 “쪼개다[μερισμός, 나눔, 분리, 분배]” 라고 쓴 것은 관절과 골수를 말 그대로 쪼개 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X-ray를 찍고 CT나 MRI를 촬영해도 못 보는 것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관절과 골수를 꺼내서 쪼개 보고 뼈 속에 있는 문제를 긁어내고 다시 제자리에 위치시키실 수 있는 외과수술을 이미 하와를 지으시면서 행하셨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기록해 주고 있다(창2:21~22).

무엇보다도 이러한 역사(役事)들이 의사인 사람들은 육신에 밖에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영혼의 문제는 관여할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육신뿐만 아니라 육신적으로 볼 수 없는 영혼의 부분에까지 확실히 가능하신 분이라는 데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16:7)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12b) 이 말씀과는 가장 비슷한 OT의 표현이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대상28:9) 한 것이다. 물론 예레미야를 통해서도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10)라고 말씀하셨다.

여기 “마음[καρδία, (도덕적, 지적 생명의 자리로서의) 마음]”은 사람의 감정적인 면을 생각할 수 있다면 “생각[ἐνθύμησις, 생각, 반성, 숙고]”이나 “뜻[ἔννοια, 생각, 사고]”은 인격의 또 다른 부분인 의지(意知)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은 주로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인격(人格)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은 판단할 수 없는 이러한 부분까지도 하나님은 분명하게 “판단[κριτικός, 재판관의 태도, 능력, 권리, 행동을 함축]”이 가능하시다는 말씀이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사람이 스스로 안식을 가졌다 큰 소리 칠지라도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이를 분명히 판단하실 것이므로 절대로 속일 수 없다는 두려운 경계이다. 이제 이러한 사실을 다음절에서 더욱 분명히 해주고 있다.



Ⅲ. 하나님께 감출 수 없다(13)

앞에서는 우리의 육체이든 볼 수 없는 내면의 영혼이든지 결코 감출 수 없이 살아 역사하시는 말씀 앞에 꿰뚫어 보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부족하면 찔러 쪼개기까지 하여 사람의 어떤 부분도 감출 수 있는 부분이 없이 밝혀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확인했다면, 여기에서는 이를 좀더 확대하여 창조자 이신 하나님앞에 사람을 포함한 자연 모두가 세세히 드러날 수밖에 없음을 증거한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13f) 하나님께는 자신의 지음을 받은 어떤 것도 하찮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이 비록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풀 한 포기 돌맹이 하나일지라도 무가치하게 지으신 것은 없다는 것이다.

때로는 영광스럽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표현으로 오히려 자신을 미물에 비교하기도 하지만[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욥25:6) 빌닷] 어떤 피조물도 쓸데없이 만드신 것은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욥기서38:1~41:34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순결을 주장하는 욥에게 피조세계의 운행을 누가 하고 있는 가고 물으신다. 그 중의 한 구절을 인용해보면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38:41) 말씀하신 것인데 사람들은 별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까마귀 새끼까지도 친히 기르신다는 하나님의 사역을 말씀하신다.

물론 이미 앞의 2:6에서 시편8:4을 인용한바도 있다.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럼에도 이 모든 창조된 삼라만상(森羅萬象)을 모두 사람에게 맡기셨다고 하는 데서 다른 피조물과 비교될 수 없는 가치를 사람에게 주셨음도 이해할 수 있다.

또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13f)라는 표현은 모든 피조세계를 동시에 빠짐없이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심을 증거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가운데 사람이야 하나님의 눈에서 당연히 감춰질 수 없는 존재임을 확인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13m) 이 말씀은 바울의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14:10b~12)는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한가지 독특한 것은 여기 “결산을 받으실 이[ὁ λόγος]”라는 표현이다. 사실 이 λόγος는 요한복음1:1에는 인격으로 오신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지만 실제로 그리스시대에는 상당히 많은 의미를 가지는 낱말이다.

①이야기, 연설, 말로서의 설명; ②하나의 원리, 증명, (상업적으로는 계정으로서) 설명, 계산의 결과; ③수학적으로는 비례, 관계, 일반적으로는 기준이나 순서; ④주관적으로는 인간의 이성, 정신 또는 사상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여기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13m)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삶의 과정과 결과를 보고(報告) 받으실 분’이라는 의미로 앞의 로마서14:10b~에 언급한 내용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 바를 것이다.

마지막으로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13b)하였는데 마치 경기장에서 최소한의 가릴 부분을 가린 체로 경기에 임하는 모습과 함께 [τραχηλίζω, 목을 붙잡고 비틀다← τράχηλος, 목] 레슬링 선수가 상대방의 목을 감아 뒤로 젖히는 행위나 짐승을 잡기위해 뒷덜미를 젖혀서 목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된 표현이라고 한다(Leon Morris).

따라서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13b)는 표현은 모든 피조물들이 조물주 앞에 힘을 다 쓰고 탈진한 상태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여기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의 초라한 한계를 의미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죄가 관영 하는 이 세상에서는 진정한 안식은 없다. 그럼에도 다행히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자신의 것으로 믿고 복음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에게는 이미 창세전에부터 마련하시고 안식하셨던 하나님의 영광의 안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복종시켜 순종으로 그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당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 전쟁에 사용하는 예리한 양날의 칼처럼 우리의 모든 수치스러운 죄와 병패를 영육에서 꿰뚫고 쪼개어 잘라 없애서 이 영광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잘라내는 두려워해야 할 칼이다.

마지막에 우리 각자는 만물과 함께 가리지 않은 벌거벗은 모습으로 창조주요 구세주 이신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숨길 수 없이 정의롭고 능력 있으신 분이 하나님이셨음을 인정하면서 인생을 숨김없이 결산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 각자의 의지나 노력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더 유효하였음을 고백하고 인정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