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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4:14~16 2022-04-03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앞에서는 하늘의 천사들과 비교할 수 없는 신성과 우월하심을 증거하고 이 땅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중보 했던 모세와도 비교될 수 없는 대제사장으로서의 기반을 설명하였다면 이제 구체적으로 이 히브리서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되심을 논증하기 시작한다.

단 3절 속에 기록된 서론적인 이 내용은 앞의 비교된 대상과는 다르게 하늘에서 오신 분이심에도 죄성에 약한 인간 세계를 완전히 경험하셨지만 우리 일반 사람들과 같은 죄를 범치 않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 대제사장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거리낌없이 나아가는 자들이 될 것을 권면한다.

앞으로 5:1~7:28에서 대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의 자격을 다룬 다음에 8:1~10:18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인 사역을 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벌써 주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완벽한 자격을 논하는 것으로 이 서론적인 성격을 기록하고 있는 것도 독특한 말씀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완벽하게 중보 하는 대제사장이 계시고 그 주님은 이미 우리 사람들의 약점 조차도 완전히 경험하신 분이라는 데서 확실히 신뢰할 수 있는 분이시지만 역사 속의 위대하다는 지도자들조차 가졌던 허물이나 죄를 찾을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안심하고 우리 영원을 맡겨도 결코 후회됨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권면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 자신들에게 주고 계심을 감사함으로 은혜를 잃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Ⅰ.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14)

대제사장은 쉽게 우리식으로 이해하자면 제관(祭官) 즉, 제사를 주도하는 사람이다. 우리 나라에서 유교식 제사를 지키고 지금도 그대로 지내고 있는 것을 제주도에서 볼 수 있다. 제사를 초헌관(初獻官)으로 시작하여 아헌관(亞獻官)을 중심으로 종헌관(終獻官)이 제사를 마치는 삼헌관(三獻官) 제도를 그대로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성경에서도 그렇지만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백성에게 전달하는 사명을 감당했다면 제사장의 중요한 역할은 죄를 해결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세상의 많은 우상숭배 조차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모방하여 스스로 만든 신이라고 이름하고 믿는 절대자에게 그들의 방식;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그 신이 요구하는 제물로 진노를 잠재우고 복을 받게 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된 주변의 나라들의 이런 풍속들이 어쩔 수 없이 성경에 묻어 나타나는 것들을 볼 수 있다. “바벨론 왕이 갈랫길 곧 두 길 어귀에 서서 점을 치되 화살들을 흔들어 우상에게 묻고 희생제물의 간을 살펴서”(겔21:21)

하나님을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신이라고 섬기는 것들은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려는 어둠의 세력들의 속임수이고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에게 우상숭배를 하지말라 당부하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종교이든지 그 종교의 제사에는 반드시 제사장이 있고 그 제사장의 우두머리가 바로 대제사장이지만 이런 체계조차도 하나님 섬김을 모방하는 것들로 그 제물로 바치는 것들도 이스라엘 주변의 나라들만 봐도 그렇다.

어린아이를 바치게 하고 더 극악한 숭배를 하는 곳에서는 살아있는 사람의 퍼덕거리는 심장을 꺼내서 바치게 하는 지금 남미의 잉카, 아즈텍, 마야문명 같은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성경은 그런 인신 제사의 모양이라도 본받지 말 것과 우상숭배에서는 더러 나타나는 제사장들의 육체적인 훼손도 경계하신다.

“제사장들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지 말며 자기의 수염 양쪽을 깎지 말며 살을 베지 말고”(레21:5)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신14:1f)

NT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자녀나 백성들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베드로전서와 요한계시록에서는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벧전2:5, 9; 계1:6, 5:10; 20:6) 라고 말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증거하는 내용들도 이 히브리서의 특징(예수 그리스도께 10번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14f) 히브리 사람들 즉,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도 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익숙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직책이었다.

여기 “그러므로”는 앞에서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2:17)거나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3:1)는 말씀을 다시 환기시키는 말씀으로 연결된다.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14f) 광야에서부터 가나안 정착과 성전 제사의 제사장들을 이끌던 과거 그들의 대제사장들을 가르치는 3인칭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번으로 완벽한 우리의 속죄를 이루신 1일칭 대명사를 사용함으로써 더욱 가까이 이해시키려는 말투이다.

또 대대로 레위가문의 대제사장이 있었지만 생명이 다할 때마다 교체되고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의 정치적인 수완에 따라 대제사장의 직제가 바뀌기까지 했던 그런 대제사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 그들과 비교될 수 없는 “큰 대제사장”이라고 칭하는 것도 독특하다.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14m) 이 또한 과거의 대제사장들과는 격이 다른 표현이다. 하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죄를 해결하기 위해 제사라는 방법을 주셨지만 대제사장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죄를 위하여 먼저 제사를 드리는 한계를 뒤에서도 거론한다(7:27).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이 표현에는 인류를 위한 놀라운 역사를 담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그 아들의 이름 자체가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예수”시라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지성소로 직접 들어가신 대제사장은 여태껏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서에도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막16:19) 기록됨을 본다.

이미 이 히브리서를 시작하면서 1:3b에서도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선언하였고 뒤에 가서 대제사장으로서 사역을 증거하는 곳에서도 기록하고 있다(8:1, 10:12, 12:2).

여기서도 중요한 것을 다시 확인하면 그 대제사장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한 것이다.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14b) 유대인들처럼 의식적인 제사예식에서 뿐만 아니라 3:1에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하였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적 고백을 잃지 말고 지속적으로 “굳게 잡으라[κρατέω, 붙잡다, 체포하다, 굳게 지키다]”는 당부이다.

이와 같은 대제사장이라면 유약한 사람과는 관련을 깊이 가질 수 없다는 가정 때문에 이제 다음에서는 그럼에도 그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완벽한 인간성을 가지시고 사람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감당하셨다는 좀 더 가까운 대제사장으로서의 주님을 증거하고 있다.



Ⅱ. 모든 일에 우리와 똑 같은 인생의 경험자(15)

아무리 신령하고 완벽하며 온전하다고 해도 그런 분이 우리와 관련을 가지려면 그런 거룩함 만을 가지신 분이시라면 죄진 우리 사람과는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는 우려를 불식시키는 교훈이 이 두번째 내용이다.

여기서도 앞에 서와 꼭 같은 말투로 표현한다.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 우리가 믿는 도리를” 했던 것처럼 우리와 완벽하게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 우리의 연약함 …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사실 어떤 신령한 은혜도 큰 사랑도 그것이 나와 관련이 없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에게는 아무 유익이 있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해결해 주셨을지라도 나의 죄를 해결해 주신 것이 아니라면 그 속죄는 나에게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신앙의 과제나 역사는 철저하게 나의 것으로 삼아야만 한다. 이런 입장에서 유대인들에게 있던 대제사장도 아니고 성경속의 대제사장도 나의 것이 되기까지는 나에게는 생명을 주지 못한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하는 것으로 각자의 신앙을 확인하고 각자가 거듭나는 침례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제사장이란 직책의 성격상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보해야 하는 중재자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영적인 하나님과의 긴밀함은 말할 것도 없고 사죄를 필요로 하는 사람과도 역시 완벽한 교제가 가능해야 한다.

“동정하다[συμπαθέω, (σύν, + πάθος, 고난, 수난) 함께 고생하다, ∼와 같은 것을 겪다, 동정하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함께 모든 것은 겪고 견디는 것에서 과거의 한글에서는 “체휼(體恤)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라는 표현이 우리 말에는 더 호소력을 가진다.

과거의 역사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어진 임금이 저녁 때면 왕궁 옥상에 올라가 어느 집의 굴뚝에 밥짓는 연기가 나지 않으면 끼니를 굶는다고 생각되는 백성의 처지를 함께 체험하기 위하여 저녁수라를 들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꼭 여기에 어울리는 내용이다.

같은 처지의 입장에서 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당연한 것이지만

전혀 비교될 수 없는 높은 신분의 입장에서 낮은 처지의 형편을 함께 경험한다고 하는 것은 세상에서는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상호 간에도 이런 자세가 필요함을 베드로 사도가 격려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벧전3:8-한글)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바울이 빌립보서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주님의 사람 되심을 그대로 증거하고 있다.

열 달을 마리아의 배속에서 자라서 두 주먹 불끈 쥐고 태어나셔서 아버지 요셉의 일을 함께 하시면서 결코 부요하지 않은 가난한 삶을 친히 체험하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도 사십일간을 주리시는 광야의 고통이나 마귀의 시험은 사실 일반 사람들인 우리는 겪지도 않은 삶이셨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는 안타까운 사람의 심정을 그대로 나타내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간절한 절규 같은 기도 역시 육신을 입고 감당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었을 것이고 삼 년 동안을 함께 데리고 다녔던 제자들의 배신도 인간의 배신의 쓰라림을 그대로 경험할 수 있으셨을 것이다.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육신을 입고 있을 때는 우리와 하나도 다름이 없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그대로 전달해 주고 있는 표현이다.

여기 강조되고 있는 것은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즉, 한 가지도 다름이 없이 인생을 사셨다는 확인이다.

우리 각자가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꼭 같은 처지였다면 과연 어떠했을까!’라는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몰라도 나 같으면 그런 고비 고비의 인생에서 범죄하고도 남았겠다는 짐작을 해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의 삶에서 “…죄는 없으시니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때로는 재주부리고 꾀를 쓰며 할 수 있는 세상의 방법들을 다 사용해보기도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러시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세상적인 꾀를 쓴다면 주님은 아마도 ‘너 스스로 잘해보렴!’ 그러실 수도 있다. 그러나 우직하게 주님을 본받는다면 오히려 그런 일들을 해결해 주시려고 개입하시고 격려하시고 칭찬하실 것이다. ‘그래 그렇게 살게 하려고 내가 너를 위해 죽었단다!’라 말씀하실 것이다.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15b) 이것은 오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의 모범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백성이라면 알아야만 한다.



Ⅲ.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라(16)

이렇게 완벽하신 주님이셨음에도 과거에 우리가 의롭게 살지 못했다고 탓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 주셨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머리를 들 수 없을 정도로 황송하다. 그럼에도 주님의 은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고 이것이 오늘 우리가 다루는 마지막 부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여기에 “그러므로”는 당연히 앞에서 다루었던 내용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큰 대제사장이심에도 우리의 연약함을 낱낱이 경험하신 그 대제사장을 우리가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모시고 있기 때문에 라는 이유가 된다.

여기서도 먼 이야기가 아닌 아주 가까운 표현을 쓰고 있다.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속성 중에 가장 감사가 되는 속성이 하나님의 은혜와 관련된 “긍휼하심”이라고 감히 고백하고 싶다. 이 “긍휼하심”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들일 뿐이다.

그럼에도 또한 모든 사람이 “긍휼하심”을 힘입는 것은 아니다. 넘치는 주님의 긍휼의 속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들은 “긍휼하심”을 입지 못했다.

이집트의 바로 왕은 그의 완악함 때문에 그리고 가나안은 그들의 죄를 회개하지 못하기 때문에 같은 입장에 있던 이스라엘과는 다르게 “긍휼하심”을 입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긍휼하심”을 입을 수 없는 것은 교만과 회개치 못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럼에도 감사하게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한 것이다. 지금도 아직 긍휼하심을 입지 못했을지라도 아직 기회는 있다.

죄에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만 한다면 회개는 언제 어디서나 그러한 사람의 것이고 그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세상을 언제 떠날지 모르기 때문에 빠를수록 좋을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이 없다면 과연 우리가 믿음을 부지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긍휼에서 끝나지 않으신다. 죄의 유혹에 끊임없이 노출되어 있는 우리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신 도우심이 필요 없을 때는 한 순간도 없다.

아니 오히려 도우심 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전체를 다스려 주셔야 우리 천로역정(天路歷程)의 길은 감당 될 수 있을 것이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 그것은 적시 적소에 믿음의 백성들에게 있어야만 할 하나님의 능력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이미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 두시고 누구든지 필요하기만 하면 가져다 쓰도록 배려하셨지만 믿음이 없이는 이것도 불가능하고 깊은 신뢰를 바탕 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다.

앞에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라고 했다면 이것은 이미 과거에 속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없었다면 누구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은혜는 지금도 미래에도 지속적으로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차이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여기에 붙여지는 표현은 대단히 수동적이다. “얻기 위하여”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의 주체 이시라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제나 그 이미 허락하신 은혜와 사랑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신앙에 있어서 특히 영적인 삶에 있어서 사람은 스스로는 어떤 것도 만들 수 없고 다만 받아 누릴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존재이다. 구원도 긍휼로 말미암아 얻은 것이요, 모든 영적인 것은 죄인 된 사람에게서는 어떤 것도 생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얻어 쓰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긍휼과 은혜를 얻기 위해서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한 것이다. “보좌[θρόνος, 왕좌, 위엄의 자리; 영어의 throne이 여기서 나왔다. NT에 61회]” 이 “보좌”를 수식하는 몇몇 표현이 성경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영광의~ 위엄의~ 본문처럼 은혜의~ 라는 형용사들이 사용되고 있다.

이 히브리서에는 1:8, 여기 v16, 8:1, 12:2 모두 4회 사용되고 있고 하나님의 위엄과 존귀를 주로 다루는 요한계시록에는 이러한 “보좌[θρόνος]”가 무려 46회나 나타나고 있다.

본래 “보좌”라는 말 자체가 권위를 가진 심판자의 자리이기 때문에 두렵고 위엄스러워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곳임을 나타낸다. 에스더4:11에 보는 대로는 바벨론 나라에서도 “…남녀를 막론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 규를 내밀어야 살 것이…”는 권력의 냉혹함을 본다.

그럼에도 감사한 것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 이신 하나님의 “보좌”가 그분의 백성들에게는 다만 두려움의 보좌가 아니라 “은혜의 보좌”라는 것이다. 다가가기만 하면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선물의 보좌라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한 것이다.

위엄과 두려움의 자리에는 가까이 가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 되기 때문에 어떤 경우는 죽음을 각오하고 나아가야 하는 곳임에도 우리 하나님의 보좌에 그의 백성들은 담대히 나아갈 것이라 한다.

심판의 보좌에 대한 두려움은 사실 죄를 가진 사람에게 분명히 그렇다. 그럼에도 이 두려운 보좌 앞에 자신만만하게 용기를 가지고 나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의 은혜 때문이다.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죄를 짐승의 생명을 바쳐서 해결해 주는 제사장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다 먼저 자신들의 죄를 해결 받는 제사를 드린 후에 라야 백성들의 죄를 위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꼭 같은 사람으로서 제사장일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한계를 가진 사람인만큼 계속 바뀔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단번에 들어가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에 그에 대한 믿음만 잃지 않는다면 영원히 우리를 사죄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존귀하신 하늘의 위엄을 가지셨음에도 우리와 한결 같은 시험을 당하셨고 인생의 고뇌와 어려움을 겪으셨지만 우리와 같은 죄를 범하지 않으신 완벽한 대제사장이시다.

미래에 이 역사의 인류를 심판하실 분도 주님이시지만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우리의 연약한 인생을 붙들어 주시고

그의 앞에 문제를 가지고 나가도 거리낌이 없이 해결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항상 주님 앞에 거리낌없이 나아갈 수 있음에 감사한다.

이 귀한 권리를 썩히지 않는 하늘의 제사장으로 살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