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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5:1~10 2022-04-10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오늘 첫 부분에서 아론의 계보를 따른 대제사장을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받아 줄 수 있는 것은 자신들도 연약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라는 표현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서 속죄의 역할을 하였다는 이야기는 어쩌면 오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처럼 들린다.

다만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 때문에 연약하고 어리석기 이를 데 없는 나(우리)를 그냥 백성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인하여 세상 사람들을 중보 하는 제사장들로 삼으신 것을 헤아리면 감사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되심의 서론을 간략하게 거론한 저자는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되심의 자격을 7장까지 다루게 된다. 오늘은 먼저 대제사장은 반드시 사람이어야 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은 자여야 하는데 이 자격에서 주님은 합당하고 땅에서 끝나는 대제사장이 아니라 영원한 대제사장 되심을 증거한다.

먼저는 과거의 레위가문의 계보를 따른 땅에서의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역할을 하긴 했지만 그들의 불완전을 거론한 다음에 하늘로부터 직접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육신적으로 영적으로 완전하시지만 하나님께 온전히 의뢰하여 이 귀한 사역을 감당하셨음을 확인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이렇게 절대적으로 아버지께 순종하여 구원의 근본이 되시고 모범이 되셨음도 증거한다. 그런 다음 7장에서 더 구체적으로 다루게 되겠지만 유명한 다윗의 시편110:4의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 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라는 언약을 확인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제사장의 역할을 과거 아론의 후손들과 이제 영원히 변치 않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모시고 주님 오실 때까지 아니 요한계시록에서 보는 대로 영원 속에서의 제사장 역할 점검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계20:6)



Ⅰ. 땅에서 난 대제사장(1~4)

먼저는 사람들의 사죄의 일을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과거의 율법 속에서의 대제사장에 대하여 거론한다. 그럼에도 이 사람가운데 택함을 받은 대제사장도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위하여 선택되었음을 증거한다.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1) OT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는 세가지의 직책이 있었고 이 일들의 우두머리들은 반드시 기름부음을 받아 세웠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 전달하는 선지자를 비롯하여 사람들의 죄를 하나님께 해결 받는 제사장과 하나님의 대리자로 사람들을 다스리는 왕이 그것이었다. 이 세 직책이 모두 중요하지만 오늘의 요점은 죄 지은 사람을 용서받기 위해 제사를 주도하는 제사장직을 중심하고 있고 이 논리를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한다.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대제사장은 반드시 사람이어야 할 것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여야 한다는 것이 제사장으로서의 첫번째 조건이다. 절대로 제사장은 천사나 영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람이어야 하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자이어야 한다.

그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인을 용납하실 수 없기 때문에 죄인을 속죄하는 일이 하나님께 속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사람을 위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인 된 사람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존귀하고 영화로울 수 있으시기 때문이다.

이 역할이 바로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한 것이다. 예물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라면 죄의 용서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는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방법이다.

그럼에도 사람가운데서 택함을 받은 사람들인 제사장 조차도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2)고 표현되고 있다. 이 말씀을 “자신도 연약에 휩싸여 있기 때문에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다”라고 어순(語順)을 바꿔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사람이 미혹되는 것은 당연히 알아야할 진리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 즉, 무지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용납하실 수 없으시다. 그래서 그걸 천사가 아닌 가장 구체적으로 인생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 가운데서 뽑으시는 것이다. “휩싸여 있다”는 것은 주위에 널려 있다는 사람의 환경 그대로를 말하고 있다. “휩싸여 있다[περίκειμαι, 주위에 놓여 있다, ~에워 쌓여 있다 = περί, 주위에+ κεῖμαι, 눕다, 놓여있다]”

늘 거론하는 바지만 아론은 하나님 앞에 부적절한 행동을 한 일들이 더러 있다. 창세기34장에 의하면 바로 위 형인 시므온과 함께 하몰의 아들 세겜과 그의 사람들을 거룩한 예식인 할례로 속여 죽인 일이나(창49:5~7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모세가 40일간 하나님의 산에 올라 거룩한 명령을 받고 있을 때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일(출32장)들이 그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이 아론의 후손들을 변함없이 하나님을 가까이하여 백성의 죄를 용서받게 하는 일을 맡기신 것은 자격 없고 범죄한 이방인이었던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삼아 주신 것에 예시(豫示)라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모세의 중보기도로 아론을 용서하셨음을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진노하사 그를 멸하려 하셨으므로 내가 그 때에도 아론을 위하여 기도하고”(신9:20)

레위가문의 대제사장들이 이 같은 초라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3; 레16:6~14)는 절차를 거쳐서 먼저 자신들의 허물을 사함 받은 후에야 백성을 중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하나님께 백성의 사죄를 요청하는 존귀한 역할 역시 앞에서 지적한 대로 사람이 지명할 수 없고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가능했음을 다시 증거하고 있다.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4)

여기 중요한 것은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라는 부정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는 선택의 중요성이다.

그래도 수천년을 이어온 레위가문의 대제사장직은 사람 가운데서 취하셨지만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가능했고 꼭 같은 연약에 휩싸인 백성들 가운데서 선택되었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허물을 위해서 먼저 제사를 드리고 그 일을 감당하였다는 다음에 증거할 예수 그리스도와 다름을 먼저 설명하였다.



Ⅱ. 하나님께서 친히 보내신 대제사장(5~7)

이제 앞에서 대제사장직을 사람 가운데서 취하고 하나님께서 부르심으로 가능하게 됨을 육신의 아론의 후손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옮겨온다. 그런 이유에서 앞에서의 경우와는 다르게 그 순서를 거꾸로 말하고 있다. 그 첫번째는 역시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실을 증거하고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람 되심을 증언하고 있다.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5f)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어떤 것도 스스로 하려고 하지 않으시고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과 뜻에 의한 순종이었음을 고백하심을 더러 보게 된다.

대표적인 곳을 인용하면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5:30, 6:38)시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그리스도이고 이것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메시야의 의미이기 때문에 물론 OT의 삼중의 중재자를 다 겸하시는 사역이시다. 아들이시면서도 대제사장은 이미 그리스도 안의 한 사역이다. 그럼에도 여기 중요한 것은 영광을 위하여 스스로 취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5b) 이미 1:5에서 인용된 시편2:7의 말씀이지만 거기서는 천사와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확증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인용하였다면, 여기서는 주님의 대제사장 되심을 증언하기 위하여 같은 말씀을 다시 인용한다.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6f) 이것은 당연히 시편110:4의 영감을 받은 다윗의 메시야 찬양을 표현하는 말씀이다.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6b) 이 멜기세덱에 관한 내용은 7장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게 되겠지만 성경에 단 한번 등장한 그의 삶이 공개되지 않았다는 데서 신비에 속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도 역시 주님처럼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창14:18)는 그의 지위와 그가 아브라함을 위하여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준 것 역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한다는 데서 영적인 신비를 볼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예정과 계획에 따라 대제사장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보내 지셨고 이제 다음절부터는 사람으로서 죄로 죽을 인생들을 중보하기 위해 탄식하시고 기도하신 사실을 통하여 그러한 절대적인 아버지께 드린 확신의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7f)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목숨 즉, 생명에 대하여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8) 선언하신 바 있다.

주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그의 누이 마르다에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증거 하심으로서 자신에 국한되지 않고 자신을 믿는 사람에게 까지도 이 생명의 능력이 미칠 것을 말씀하셨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7f) 중요한 것은 자신이 육신을 입고 인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 스올에서 능히 건져 내실 것을 확신하셨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속한 어떤 사람도 죽음에 빼앗기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당연한 것 같은 이 역사에도 아들의 간절한 기도가 올려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7m) “통곡 & 눈물 [κραυγή, 외침, 외치는 소리, 울부짖음; δάκρυον, 눈물, 눈물방울]” 이러한 표현은 적어도 하나님 아버지만이 들으실 수 있는 표현이 아니라 전 우주적인 외침의 소리였고 사망에 절규하는 인류의 눈물과 절규를 모두 모은 것이었기 때문에 더 강력하고 호소력 있는 간구였을 것이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 절규하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비롯한 투정과 원망 어린 탄식을 들으시고 무덤에 누워있는 썩어가는 나사로를 생각하시고 눈물을 흘리시던 너무나 인간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조용한 탄식을 볼 수 있다.

그런가하면 멸망할 평화의 도성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23:37; 눅13:34)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탄식하시는 주님의 흐느낌을 들을 수 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은 졸고 있었지만 그들과 자신에게 다가오는 안타까움을 내다보시고 세 번씩이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막14:36; 눅22:42) 라고 땀방울을 피방울처럼 떨어 뜨리시며 기도하신 그 기도가 거절 된 것 같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보는 대로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7b) “경건하심[εὐλάβεια, 공경, 존경, 두려움, 걱정]” 기록되고 있다.

어떤 기도이든지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함으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의 기도라면 어떤 사람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확신을 증거하고 있다.



Ⅲ. 순종의 모범이신 대제사장(8~10)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면에서나 하나님 아버지를 받듦에 모범이셨다. 주님은 대제사장 되심도 앞에서 거론한 아론처럼 하나님께 절대적이지 못한 것과는 다르게 모범이셨음을 증거한고 있다. 이것은 처음 사람 아담의 불순종에 대비되는 절대적인 순종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8) 먼저 앞에서 이미 인용한 시편2:7b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는 영광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육신을 입은 고난을 위해 난 사람과 다름없이 시간과 공간에 갇히셔서 구원의 완성을 이루심으로 그것 자체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모범이 되신다.

그러므로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라는 표현 자체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광의 위엄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표현이라고 이해해야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으로 어떤 배움도 필요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그러므로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8)라는 표현 자체가 우리 모두의 모범을 삼아야 할 귀감이다.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9) 사실 비슷한 표현이 이미 앞에서 쓰인 바 있다. “…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2:10)

사람의 표현을 빌리다 보니 오해의 소지들이 더러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완전한 분이셨는데 온전하게 되셨다는 그런 일반적인 뜻이 아니다. 어원적인 의미를 살펴봐도 “온전하게 되셨다[τελειόω, 완성하다, 수행하다, 이루다, 끝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극적인 역사인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구원을 완성하신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온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시고 그 희생은 이제 구원의 출발이며 완성이 되심을 증거한다. 이 사실이 이어지는 내용에도 연결되고 있는 표현이 다음절이다.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10) 이미 앞의 v6에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하였던 내용의 확인이지만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v6에서는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는 반면에 여기서는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이 어떤 다른 큰 차이 같지는 않다. 멜기세덱을 창세기14:18에서처럼 “제사장”(6, 7:1, 3, 7:17)로 표현하고 히브리서 기자도 그 멜기세덱에게는 “대제사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께는 “대제사장”(2:17, 3:1, 4:14, 15, 5:5, 10, 6:20, 7:26, 8:1, 9:11-10회)이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도 그냥 “제사장”(7:20, 21, 8:4, 10:21)으로 기록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계급의 차이 같은 것으로는 볼 수 없고, 다만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역할을 하는 자로서의 역할을 귀중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쨌거나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10)는 표현은 율법 이전에 최초로 언급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으로부터 율법 속에 언약으로 사용하셨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불완전한 아론의 계보를 따른 레위가문의 제사장들의 모든 부족함을 온전히 충족시키신 대제사장이시라는 데 무게를 둬야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히7:26f) “…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히8:1f)는 감격의 고백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가다가 죽을 것을 염려하여 금방울을 달고 제사를 드리던 불완전한 제사장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 우편에 계셔서(롬8:34, 골3:1, 벧전3:22) 우리를 중보하시는 대제사장을 오늘 우리가 모시고 섬기며 영광과 위엄의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하고 섬기고 있다는 사실이 말 할 수 없는 감동이다.



하나님께서 택하셨을지라도 땅에서 난 것은 온전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결국 이 죄악과 죽음의 역사를 치료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이 역사 속에 보내셔서 사람을 입게 하시고 사람과의 중보의 일을 감당하게 하셨다.

불완전한 짐승의 생명이 아닌 영원한 생명의 보혈인 자신의 아들의 피를 죄에 대한 진노의 대가로 받으시고 모든 인류를 그 아들의 십자가 아래로 부르시고 지금도 우편에서 중보하시는 아들의 헌신을 받으시고 용서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절대적으로 순종하여 자신을 의지하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의 시작과 끝이 되시어 모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모범이 되시는 그 희생과 헌신의 순종을 따라오게 하셨다.

확실하고 믿음직한 대제사장을 보좌해서 세상을 중보 하는 우리 또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그대로 본받아 어느 때보다 제사장의 중재의 역할이 필요한 이 때에 부끄러움이 없는 중보의 사역을 감당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