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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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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5: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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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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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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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의 특징 중 하나인 신앙의 성장에 대한 권면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바로 앞에서는 이미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야 마땅하고 단단한 식물을 소화할 수 있는 수준에 와 있어야 함에도 여전히 젖이나 먹는 상태에 있다고 책망을 하는 내용이었다.
여기에서 좀더 의무적으로 신앙의 성장이 반드시 나타날 수 있어야 된다고 권하고 그렇지 못하고 자라지 못한다면 거기에 대한 안타까운 결과를 예로 들어 경계하고 있다. 앞에서는 신앙해온 기간만큼 믿음이 자라야 함을 말했다면 여기서는 좀 더 두려운 결과를 가정하면서 믿음의 전진을 책망 투로 격려한다.
이 부분은 신앙의 이해에 있어서 특히 어려움이 있는 내용이다.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창세전부터 정해진 것이고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이끌려 가기 때문에 절대로 잃어질 수 없다.’는 이미 확정된 교리를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과연 거듭나서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사람이 타락하거나 버려질 수 있느냐?’는 의문을 가진다.
그럼에도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사람들의 의견으로 이미 확정된 어떤 것들 보다도 분명히 호소력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고 너무 신비적인 이해보다는 오히려 단순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떤 말씀에 이것 저것을 결부시키는 것보다는 분명히 멸망이 아니라 구원을 주시기 위한 말씀으로 듣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신앙의 초보는 영적인 것보다는 아직 인간적인 생각이나 판단이라고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말씀하신 것을 여기저기 견주는 것 보다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혼란하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구속을 통한 회복의 관점에서 이해하여야 옳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바람직한 것은 이 말씀과 함께 하는 한사람이라도 이 말씀이 경계하는 부정적인 것들 즉, 이 경계를 믿음으로 잘 받아들여서 한 사람도 잃어지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같은 권면을 주고 계신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하나님의 소원은 한 사람이라도 멸망이 아니라 한 사람도 멸망치 않고 약속된 영원한 영광에 들어 가는 것이다.
Ⅰ.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1~3)
앞에서는 어린아이와 장성한 사람의 음식을 예로 들었다면 여기서는 역시 신앙의 실제적인 단계를 들어 시작부분에서 멈춰서는 안된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반드시 초보적인 단계를 거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과정이지만 계속해서 깊은 경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머뭇거리고 있지 말 것을 주문한다.
이 앞 부분에서는 반드시 초보적인 신앙의 단계를 넘어서 보다 깊은 신앙의 성숙 즉, 하나님과 그리고 그의 백성들과 보다 영적인 교통을 가지기를 바라신다. 물론 늘 경계하는 것이지만 기초를 무시하거나 지나칠 수는 없지만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성숙이 육신적이든 영적이든 반드시 요구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1) 이미 앞의 5:11~14의 권면의 연장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1f) 이것은 앞에서 예를 들었던 음식이든지 지식이든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 내용도 복잡할 것은 없다. “도[λόγος]”는 신앙을 말하는 것이라면 “초보”는 기초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고 “버리다”[ἀφίημι, 보내다]는 우리 성경에 번역된 의미보다는 반드시 지나쳐야 할 어떤 것을 의미한다. 거쳐서 지나가야 할 것만 붙들고 있다면 거기에 더 이상의 생산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다음 절까지 이 초보들을 대략 나열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6가지 정도로 거론하고 있다.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1b) 생명의 하나님과 반대 쪽에 있었던 죄와 어두움으로부터 돌아서는 “회개[μετάνοια]”는 신앙의 첫째이다. 그 다음은 당연히 생명의 하나님을 믿는[πίστις] 것은 그 단계이다.
여기에 연결하여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2f) 이라 했는데 회개하고 믿음을 고백한 사람은 당연히 거듭남을 위한 세례를 받게 되는 것은 오순절날 복음을 듣고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행2:37b) 하는 복음의 응답자들에게 명령했던 순서 그대로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행2:38)
그럼에도 앞의 회개와 믿음과 세례 3가지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는 첫번째 즉, 거듭남의 실제적인 시작이라면 연결되어지는 3가지 “안수” 부터는 그 다음의 과정이 된다. 안수는 OT에서부터 연결되어지는 관습이었다.
축복(창48:14; 막10:16), 직분을 맡길 때(신34:9; 행6:6), 병을 고칠 때[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왕하4:34)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왕하5:11-아람) 막6:5, 막7:32] 행했던 신앙적 행동으로 NT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던 주로 은사를 전달하거나 특별한 경우 성령을 받게 하는(행8:17, 19:6) 경우였다.
그러나 꼭 안수를 통해서만 이런 역사가 있는 것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각자의 믿음에 따라 대응하셨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역시 안수를 필요로 하는 믿음은 무엇인가 실제적으로 행동을 필요로 하는 초보적인 신앙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지 성숙한 사람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아멘].
다음의 두가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은 미래적인 소망과 기대에 대한 사항들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하나님의 언약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적이고 당연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런 것을 기대하고 소망한다면 오늘의 삶을 여기에 맞추려고 도전하는 것이 성숙한 신앙의 사람의 모습일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요소들과 견줄 수 있다. 처녀 탄생, 우리와 같은 육신의 삶, 대속의 십자가 죽음, 3일만의 부활, 하나님 옆으로 승천, 다시 오실 재림 등 복음의 내용들이 그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런 당연한 것들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2)고 격려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완전하게 되는 실제적인 삶을 다짐하는 내용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3)한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이라는 표현이 하나님의 결재보다 실제적으로는 “하나님께 온전히 맡긴다면” 이라는 전적인 의뢰를 의미하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인용한 바 있듯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성숙하여 자신의 영광에 동참하기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이다(딤전2:4).
V2에서는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는 소원이었다면 여기서는 좀더 가까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고 다짐하는 도전을 주고 있음에서도 권면의 진보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v1~3 “우리가”라는 표현으로 저자 자신을 포함하여 일방적인 교육이기 보다는 더욱 호소력을 주고 있다.
Ⅱ. 영적체험만으로 온전할 수 없다(4~6)
적극적으로 믿음의 진전을 당부해 놓고 성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뒤로 물러날 경우를 부정적인 예를 들어 있을 수 있는 결과들을 예로 들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예로 드는 내용들은 신앙의 근본을 잃게 되는 두려운 예를 들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는 무서운 예가 그것이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4) 에덴에서 쫓겨난 후의 모든 인류는 사실상 어두움에 갇혀 빛을 볼 수 없었고 마음도 영혼도 칠흑같이 어두운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b) 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듣고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세례로 거듭남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비로소 영혼과 마음에 빛을 받는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이다. 이 빛을 맞보는 자체가 사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것이기 때문에 은사 즉, 선물이고 거듭 났기 때문에 비로소 거룩한 성령에 참예한 바 된 것이다.
이것 모두가 자연인으로서는 한 가지라도 가능한 것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즉, 주님께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b)는 불가능을 바꾸신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렇게 거듭나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가 된 사람의 은혜는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5)라는 역시 신령하고 신비한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이다.
세상의 아무리 고상한 시나 철학을 이해하는 사람도 지식적으로 아무리 높은 경지의 철학적인 식견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간적으로는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고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영원한 영광에 들어갈 약속을 믿음의 눈으로 이미 맛보고 있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이런 경지에까지 오른 영적인 사람이 다음에 나타나는 상황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점이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먼저는 이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 하나님은 기록하도록 하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확신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우주와 지구와 존재하는 삼라만상(森羅萬象) 즉, 존재하는 모든 만물 특히 움직이는 동물들을 지으시면서 모든 것들과는 다르게 사람은 특별한 존재로 지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모든 다른 피조물들 심지어 자연까지도 사람의 손에 맡겨져 있지만 사람에게만은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라고 한 것은 요즘 사람의 편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로버트 들과는 다르게 조종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대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부분에서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셨다는 의미로 이해하게 된다.
사람은 하나님처럼 거룩하거나 능력은 없어도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서 심지어는 창조주 이신 하나님을 순종하고 불순종하는 것까지도 자의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객체로서 인격을 부여하셨기 때문에 영원의 문제까지도 강제로 제어하지 않으시고 그 결정을 존중하심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특별하고 귀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또한 자신들의 결정에 당연히 책임을 지게 하는 것도 불순종에 대한 형벌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엄청난 배려에도 불구하고 거역한다면 거기에 대한 책임도 당사자가 지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 전능하시지만 다윗이나 솔로몬 같은 영광의 성군의 타락도 허락하셨는데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며 사람 스스로는 죄에서 구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제이(第二)의 창조의 역사도 강제적이지 않고 각자의 선택에 따라 대우하시는 것이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6) 거듭나서 하늘의 신비와 영광을 맛보고 다시 이전 죄악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알지 못하고 거역하는 것보다 더 극악한 것이다.
베드로 사도도 같은 경계를 나타낸 바 있다.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2:21~22)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성령에 대한 모독의 경계가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12:31~32)
거듭나기 이전의 거역(拒逆)은 그래도 어두움의 세력의 부추김과 죄성의 거절이라고 한다면 성령을 통한 하늘의 신비를 맛보고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고 모독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6) 한 것처럼 이러한 잘 못된 선택에 대한 형벌에 대해서도 다시 언급하고 있는 내용을 뒤에서 볼 수 있다.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10:29)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막15:34)라는 참담한 사실을 생각한다면 다시 과거의 죄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Ⅲ. 열매가 아니면 버림을 결과한다(7~8)
마지막으로는 복음에 대한 올바른 순종과 거역의 결과를 식물을 자라게 하는 땅에 비유하여 차이를 추론하는 내용이다. 여기 흙 즉, 땅을 의인화(擬人化)하여 경작되는 밭을 복 받음과 형벌의 상태로 나타내고 있다. 먼저는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결과를 그리고 부정적이고 버려 짐으로 불태워지는 마치 천국과 지옥의 양면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7f)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잘 받아들이는 것도 복이며 감사의 이유가 된다. 유다 말기 예레미야 시대에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백성들을 표현하기를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렘5:24) 라고 하여 때를 따라 주시는 은혜에 감사를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을 비유하였다.
그러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잘 흡수하는 것 못지 않게 어떤 씨를 심고 어떤 열매를 내는 가도 중요하다. 물론 본문에는 긍정적으로 사용된 표현이 열매보다는 채소로 비유되고 있다.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7b)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 여기 밭 가는 자들이란 복수로 쓰였지만 당연히 좋은 결과를 기대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창1:12)라 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땅을 생각해 볼 때 더욱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포도원 비유를 하실 때도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요15:1) 말씀하심을 볼 때도 무리가 없고 야고보를 통한 말씀도 이를 뒷바침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약5:7)
다만 이렇게 채소이든 열매이든 하나님의 기대하시는 결실을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라는 결과는 과거의 죄의 뿌리에서 도저히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없었던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생명의 씨앗으로 심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당연한 기대일 것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게 되는 것 또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결과가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한 것인데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8f) 참으로 독특한 표현으로 좋지 않은 영적인 결과를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이 땅에 있게 한 두가지 식물을 가시와 엉겅퀴 그대로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3:17b~18f)
여기에 대한 형벌도 보다 분명하다.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8b) 하였는데 ‘과연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버리실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바울도 자신의 민족의 불신앙에 대하여 한탄하면서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롬11:1) 항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절대로 자신의 소유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는 것은 어쩌면 사랑이신 하나님의 속성에 당연한 것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버리신다는 표현보다는 버려지는 당사자의 외면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KTX 표를 서울까지 끊어줬는데 차를 탔다가 대전에서 내려버리는 것과 비슷한 이해를 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교통수단의 티켓은 도중 하차 시 무효라고 표시되어 있다.
그럼에도 부정적인 열매의 대가는 좀더 비극적이다.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8b) 마치 유익하지 못한 잡초를 뽑아 던져 마르면 불에 던져지는 것과 같은 비유를 주고 있다.
신앙에 있어서 완전한 구원이거나 완전한 멸망이 있을 뿐이지 중간지대는 있을 수 없음을 확실히 하고 있다.
육신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한 평생의 어려움과 아픔이지만 신앙에 있어서 초보에 머무르는 것은 영원에서 잃어지는 무서운 것이다. 누구보다도 하나님께서 나의 성숙을 바라시기 때문에 하나님만 온전히 의뢰한다면 반드시 믿음은 완전할 데로 나아갈 수 있다.
육신적인 삶에서는 도저히 경험할 수 없었던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제대로 맛본 사람이라면 나에게 그런 은혜를 가능하게 하신 그리스도를 절대로 욕되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매 순간 끊임없이 변함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활용하여 하늘에 합당한 결과들을 냄으로 복될지 언정 저주와 불사름의 형벌과는 영원히 관련 없는 천국의 백성으로 성장하며 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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