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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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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5: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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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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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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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앞의 권면v4~8이 냉정하고 두려운 경고 형태였던 것을 생각하면 여기서는 거기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확신과 소망을 주는 격려의 내용으로 말투가 바뀌고 있다. 행여라도 버려지고 불태워지는 앞의 부정적인 말에 너무 낙심하고 절망할 것을 생각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언약에 확신을 가질 것을 당부한다.
사람들은 음식을 먹고 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소망을 먹고 산다고 할 수 있는 동물과 다른 존재들이다. 어떤 절망과 어두움 속에서도 소망을 찾아 격려하고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자세는 어쩌면 사람에게 당연한 것이다.
믿음의 사람 바울도 하나님을 여러가지로 표현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소망의 하나님으로 증거한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15:13)
그럼에도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이 필요한 소망은 참된 소망과 허황된 소망 즉 아무 가능성도 없는데 억측으로 만들어 스스로를 위로하는 거짓된 전혀 다른 두가지의 소망이 있다. 참된 소망은 바람직하고 모두를 살리는 것이지만 거짓된 소망은 속이는 것이고 결국은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구분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제 이 히브리서의 저자는 진정한 소망이 없는 이 죄와 죽음의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참된 소망을 제시하면서 이 소망은 점점 확실하고 풍성한 소망으로 최종적으로는 반드시 언약하신 영광에 들어가게 될 것을 확신시키고 있다.
다음 시간에도 역시 이 소망을 다루게 되겠지만 꾸며진 거짓 소망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희박해지고 잃어버리는 반면에 복음으로 인한 참된 소망은 환란이나 어려움을 당할 경우에는 더욱 견고해지고 확실해짐을 증거하고 있다.
Ⅰ. 진정으로 좋은 것을 확신하라! (9)
앞의 v4~8에서는 강력한 말투에 두려운 결과를 제시한 것에 비해 말투는 완전히 바뀌었고 격려와 소망을 제시하면서 그럴 수 있는 믿음을 지속적으로 견지할 것을 당부하고 자신의 경고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한 것임을 확신하는 응원의 메시지이다.
어느 때나 배도자들은 있었고 그것은 하나님이나 그의 백성들이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두움은 빛을 비집고 들어와 자신들의 종들을 만들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약화시키고 은혜와 사랑이라는 달콤한 말로 성도들을 속이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시도했다. 성령(聖靈)이 충만한 1세기에도 그랬고 성경(聖經)이 대중화된 오늘의 시대에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어려운 가운데서도 진리를 순종하려고 애쓰는 진리의 백성들에게는 언제나 격려와 위로가 담긴 사람의 고백이 쉬지 않는다. 배도자들을 한바탕 책망한 후에 이제 돌이켜 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애정 어린 말투로 ‘지금까지 해왔던 말이 결코 너희들을 향해 한 것이 아님’을 확인한다.
그것이 바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라고 자신이 한 두려운 협박처럼 들리는 표현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고 사랑하려고 애쓰는 신실한 사람들에게 한 것이 아님을 증거하고 있다.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사실은 앞에서는 좋은 것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하는 것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비교하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즉,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8)는 그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진정으로 좋은 것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죄의 사람들은 사실에 있어서 진정으로 자신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가도 알지 못한다. 왜 그런가를 바울은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롬1:21b~22)있기 때문이라고 증거한다.
심지어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정죄받을 일을 하면서도 스스로 옳다고 하는 잘 못된 선택과 판단을 하는 일도 있기 때문에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롬14:22)라고 말하고 있다.
이만큼 우리의 바른 선택이 중요한데 죄성의 사람 스스로는 절대로 바른 선택을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로부터 거듭난 바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야 현재의 세상이나 영원한 세계에서 참으로 좋은 것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지금 히브리서를 기록하고 있는 저자는 이제 정죄와 비교될 수 없는 즉,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그것이 이어지는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고 증거한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제일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서로 묻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럼에도 여기에 대한 답변은 사람의 성격만큼이나 천차만별(千差萬別)이다. 즉, ‘무엇을 자신의 우선순위로 두느냐?’에 따라서 그 답변은 다르게 나올 수 있다.
병을 가진 불편한 사람이라면 아마도 단순히 ‘그것은 건강한 삶’이라고 쉽게 말할 것이고 남에게 천대만 받고 산 사람이라면 ‘그것은 명예나 권력’이라고 말할 것이고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한 헐벗고 굶주림으로 살아온 사람은 ‘그것은 좋은 옷 입고, 먹고 싶은 것을 실컷 먹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오늘 여러분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제일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사실은 사람다운 인생을 살기위해서 여기에 항상 답변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이제 것 말해 온 것이 단순히 육신에 속한 것이었다면 인생을 육신으로만 생각할 수 없는 영혼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앞의 답변들은 온전한 답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참으로 귀한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 이 히브리서 기자는 처음부터 답변을 주고 있다.
즉, 이런 모든 것들이 있다고 하지만 “…곧 구원에 속한[ἐχόμενα σωτηρίας]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는 답변이다. “구원[σωτηρία]”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귀중한 낱말이다. 그러나 “구원에 속한”이란 번역은 좀 불확실한 번역인 것 같다.
왜냐하면, “속한[ἔχω, 가지다, 지니다, 얻다, 차지하다, 보유하다]”이라고 번역된 의미를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 번역본들은 좀 본래의 의미에 가깝지 못한 것 같으나 “things that accompany salvation,” [NKJV, NASB- 구원을 동반하는 것들, 구원과 함께 하는 것들]로 번역을 하고 있다.
‘…구원을 얻는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것으로 이해를 하여 이부분을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을 차지하는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확실하다.
죄의 세상에서 이 가치는 분명히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셨고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하심으로 완성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에 있어서 이 보다 더 귀중한 가치는 없다. 죄와 죽음에서의 구원, 순간에서 영원으로의 변화야 말로 사람 스스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고 이것을 얻고 지켜가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인생속에 가장 귀중한 가치라고 할 수 있다.
Ⅱ. 믿음으로 한 일들을 잊지 않으신다. (10)
바울은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롬3:5b~6)라고 절대적으로 의로우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 불의한 세상에서는 의를 행해도 선을 행하여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잊지 않으시고 꼭 알아주신다.
이런 일반적인 이유와 함께 여기서 독특한 것은 믿음 때문에 사랑 때문에 행한 것들은 절대로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고 있다. 그런 이유를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증거한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그렇게까지 했는데’ 라고 수고와 희생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되갚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서운해하는 일들을 더러 보게 된다. 그런 이유에서 이런 안타까운 경험들을 하였다면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식하며 일하고 섬길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믿음 때문에 행한 어떤 일도 사랑도 잊어버리는 분이 아니시다. 아니 절대로 잊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행한 일뿐만 아니라 자신의 백성을 절대 잊지 못하시는 분이시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
바울은 “하나님은 미쁘시니라”(고전1:9; 고후1:18)고 선언하여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믿음직한 분이심을 증거한다. 이 히브리서도 나중 10:23에서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라고 하여 오늘 내용과 같은 격려를 주고 있다.
먼저는 하나님이 불의하지 아니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을 과거부터 지금은 물론이고 미래에도 행할 일들의 대가를 절대로 잊으실 분이 아니기 때문에 계속해서 믿음을 삶으로 나타낼 것을 격려하는 것이다. 특히 여기 너희 행위는 당연히 마음에 가지고 있는 믿음을 삶에 나타낸 살아있는 믿음을 칭찬하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마지막 부분에서 같은 확신을 주고 있음을 듣는다.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고전15:58b)
비록 OT의 신앙의 사람이지만 하나님께 대하여 같은 믿음을 가졌던 다윗도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시31:19)라고 감격하는 것을 듣는다.
여기서도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세상과 구별되어 거룩한 삶을 사는 성도들을 섬긴 것과 섬기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연보를 드리는 것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만 성도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고 증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서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마련한 연보를 가져 가면서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롬15:25)라고 고백한다.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도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고후9:1) 라고 연보를 드림이 바로 성도를 섬기는 일이라고 확인한다.
우리는 섬김을 받은 일에 대하여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하나님은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확인한다. 모든 것을 현재로 보시는 하나님께는 과거의 섬김도 미래의 섬김도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대가를 준비하시는 분이시다.
중요한 것은 여기 믿음의 행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나타내고 성도를 섬기는 것이 앞의 채소를 내지 못하는 밭에 비유된 복음의 진리를 던져버린 안타까운 사람들에 빗대어 그와는 반대로 과거에서 미래에까지 섬김의 행동으로 믿음을 나타낸 소망의 사람들을 격려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Ⅲ. 불변하는 소망을 더욱 키워라! (11~12)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 끝까지 믿음을 견지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본 사람이 다음 주에 다루게 될 아브라함이다. 대부분의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당시의 상황에서는 그 언약이 이루어지리라는 소망을 지속적으로 지켜갈 수 없었지만 결국에 가서는 받아 누리고 마는 것처럼 같은 약속의 대상이라면 역시 그와 같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나타내고 성도들을 섬기는 같은 영적인 부지런함을 이 땅에 영광을 가지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데도 나타내고 지켜갈 것을 일반적인 바램이 아니라 간절히 소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신앙을 이끄는 지도자들은 자신이 가르치는 믿음이 어느 한 곳에 집중되는 것보다 고루고루 성장하고 삶 속에 실현되기를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또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의 사람들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지향하면서도 그것이 지나쳐서 그렇지 못한 지체들을 가볍게 여기거나 이 땅에서의 성도 된 의무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역시 균형 있는 믿음은 되지 못할 것이다.
이 히브리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해야 할 섬김은 잘 감당하면서 다가올 하늘의 영광을 맞을 준비를 가볍게 여겨도 안될 것이고 반대로 너무 하늘의 영광의 가치를 기대하면서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역할을 가볍게 여기는 것도 옳은 것은 못된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11f) 섬김에 최선을 다하는 부지런함을 미래의 소망에도 같이 가지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영혼의 사람이지만 육신을 입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느 것에 치우치지 않는 동일한 열심이 필요하다.
또 마음에 가진 믿음을 삶에 온전히 나타내고 믿음이 아닌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나타내려고 하는 선한 열심도 역시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의 가치와 이유가 온전히 믿음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에 대한 소망도 희미하고 그런 이유에서 인지 이 땅에서의 성도로서의 삶도 부정확하고 심지어는 육신의 일은 육신의 일이기 때문에 그것에 믿음의 잣대를 적용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안타까움을 보이고 있다.
쉬운 것은 아니지만 하늘의 시민이라면 세상에서의 삶도 하늘의 가치를 그대로 적용하는 삶이 되어야지 세상의 일이기 때문에 믿음의 원리가 아닌 세상 사람들과 꼭 같은 잣대로 대하는 것은 이중적인 것으로 합당치 못하다. 이런 이유에서 믿음의 삶은 쉽지 않고 사람의 노력이나 힘으로 감당하려고 하면 불가능하다.
이 히브리서에 나타나는 믿음의 사람들은 그렇게 산 사람들이 아니다. 하늘의 가치를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됨으로 살려고 하는 것이 세상에서 어리석어 보이긴 할지라도 참으로 그렇게 살려고만 한다면 성령께서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11:38f) 말하고 있다.
또 이렇게 소신을 가지고 살 때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11b) 한 것처럼 하늘의 약속은 더욱 분명하게 될 것이고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1:13)라는 격려를 누릴 수가 있을 것이다.
“소망의 풍성함[πληροφορία, 확신, 완전한 확신]” 앞에서도 거론한바 있지만 사람들이 가지는 소망은 대부분 스스로의 위안이나 기대들로 불확실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소망이 한 인생의 끝날 때까지 지켜지는 것이 불가능하고 역사의 마지막까지 꼭 같은 확신으로 갈 수 없다.
마치 신앙 속에서도 “비전(vision)[ὀπτασία, ὅραμα, ὅρασις -환상]”이라고 하는 말을 많이 사용하게 되는데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되어질 일을 그의 백성에게 보여주시는 이상(수동적)이 진정한 “비전”이라고 할 수 있음에도 사람들이 바라고 기대하는 것들을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내기를 좋아하는(능동적)데 비슷한 예가 될 것 같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나 그분의 약속 그리고 말씀이 주체가 되시는 것이 아닌 사람 자신이 주체가 되는 것은 다 온전치 못한 것이며 또 오래가지도 못한다. 유한한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만이 참된 것이며 영원한 것이다.
이러한 은혜의 역사를 위하여 부지런할 것을 권면하는 내용이 오늘 마지막 말씀이다. 코로나-19가 마무리되어가고 다시 신앙을 회복해 가야할 우리에게 귀중한 권고의 말씀이다.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12f) 세상에서도 게으름이 경계되지만 하늘의 사람들에게 게으름은 치명적임을 늘 교훈 한다. ‘사람이 게을러도 하나님께서 다 해 주신다.’라는 것은 믿음에 있을 수 없다.
사실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부지런해야만 한다. 보통 부지런함이 아니라 갑절은 부지런해야 영육(靈肉)의 의무를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부지런함은 나 자신이 설치고 앞서서는 안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고후5:14f)라는 바울의 모습과 같아야 만한다.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도 이 3가지는 신앙에 있어서 서로 함수관계(函數關係)에 있다. 부지런함과 믿음 그리고 인내는 신앙에 있어 안전한 삼각구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오래 참음이 나타나기 때문에 부지런함과 부조화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움직임이 없는 정체되어 있는 기다림이 아니라 영원을 향한 부단한 열심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바로 믿음이기 대문에 신령한 조화가 된다.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12b) 하나님의 언약을 자신의 것으로 누린 사람들은 다 이런 사람이었고 다음 주에 맨 먼저 거론하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부터 그렇다.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가지는 소망이나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온전히 지켜가는 소망의 풍성함을 마지막까지 지켜가는…
우리 모두가 보다 나은 인생을 위해서 힘쓰는 것 못지않게 확실히 더 좋고 귀중한 구원을 차지하는데도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우리 주께서는 믿음 때문에 행한 과거의 어떤 헌신과 희생도 결코 잊지 않으시고 거기에 따른 상급을 준비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그의 성도들을 섬기는 것도 귀중한 믿음의 삶이다.
그러나 이 모든 부지런함 보다 끝까지 소망을 풍성히 채우고 믿음의 선진들처럼 부지런함과 믿음과 오래 참음을 본 삼아 약속을 기업으로 누리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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