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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7:11~19 2022-05-22
제사장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실제적으로 OT속에서도 범죄한 인류에게 율법보다는 은혜가 먼저였다는 사실은 성경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어느정도 아는 사실이다. 에덴에서 많은 조항의 율법보다는 단 한가지 조건만이 하나님과 사람 간의 간격이었음을 자주 말한 바 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스스로 엮어 입은 무화과 잎으로는 오래 가릴 수 없어서 짐승을 잡아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힌 것 역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의 역사였다. 이것이 의미하는 차이 역시 사람이 스스로 수치를 가리려는 생각과 행동이 자신의 수치를 가릴 수 없음을 보여주는 반면에 하나님께서 만이 죄와 수치를 영원히 처리하실 수 있다는 깊은 복음적 의미를 깨닫게 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인류를 위한 보다 근본적인 복음이 선포되었고 그것이 창세기3:15임도 자주 거론하는 내용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런 족장시대에 복음이 주어졌고 그럼에도 아담으로부터 봇물이 터진 범죄는 세상에 범람하게 되었고 그 범죄하는 인류를 위해 메시야를 이 세상에 보내시기까지 임시적으로 주어진 법이 바로 율법이다. 그러나 이 멜기세덱의 사연은 율법이전시대에 있었던 사건이면서 장차 주어질 영구한 복음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자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지금 이 서신을 받고 있는 히브리사람들은 율법은 온전한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 율법 속에 세워진 제사장제도가 완벽했다면 성경이 레위 가문의 제사장이 아닌 전혀 새로운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논리를 이어간다.

왜냐하면 율법을 통해서 주어진 계명들이나 제사 제도들은 모두 온전치 못한 것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온전한 것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으므로 제사직분이 바뀌면 반드시 율법도 바뀌어 질 것을 증거함으로 율법이 아닌 복음을 주신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

다행히도 우리는 불완전한 율법 시대에 난 것이 아니라 완성된 복음시대에 난 것 자체가 감사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Ⅰ. 불완전한 법은 보다 완전한 법으로 바뀌었다(11~13)

율법이 주어지기 전부터 준비되었던 레위가문 즉, 아론 후예들의 제사장으로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 제사직분이 결국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제사장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이 오늘 첫 부분이다.

그런 이유에서 대대로 제사장의 직분을 이어왔던 레위가문과 전혀 다른 지파에서 제사장을 다시 세울 것에 대한 필요를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물론 다음 부분에서는 유다 지파로 통해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내용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완전하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애당초 불완전한 어떤 것을 만들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사람들처럼 되어지는 과정을 따라 다음을 연결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확신이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지만 그것이 인류를 구원할 법이 아니라 장래 복음으로 죄의 세상을 구원하실 것을 계획하고 있었고 이 온전한 역사를 위하여 율법은 어느 기간동안 더해진 임시 법임을 성경은 지적하고 있다.

이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내용을 바울이 율법과 복음을 구분하지 못하여 문제가 된 갈라디아 교회에게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3:19)

오늘 첫 부분의 내용도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출발한다.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11f) 사실 율법을 받고 가르치고 집행하며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주체가 제사장 직분을 가진 레위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온전할 수 없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런 온전치 못한 제사장이 아론을 따라 계속된 제사장직이었기 때문에 시편110:4에서 성령에 감동된 다윗을 통하여 전혀 다른 지파에서 제사장이 나올 것을 증거한 것이다.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11b)

아론의 반차가 아닌 멜기세덱의 “반차[τάξις, 질서, 방식. 순서]”를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한 것이 독특하다. 왜냐하면, 레위 가문의 제사장들은 대대에 감당했던 것과 다르게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 라고 하기 때문이다.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12) 율법에서 제사장직이 나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제사장이 주어진 모세와 아론과 같은 레위가문을 통해서 율법이 주어졌다. 그런 이유에서 제사 직분이 바뀜으로써 율법이 바뀌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이 되는 것이다.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12) 이 말씀은 ‘사죄의 방법이 바뀌었기 때문에 예배가 바뀌고 삶의 방식이 바뀌어 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라고도 이해할 수 있는데 소극적인 ‘하지말라!’는 식의 율법의 방식과 다르게 적극적인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주어지는 삶의 변화를 증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율법을 받고 집행하게 했던 레위 지파가 아닌 전혀 제사장직을 감당한바 없는 지파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음 절에서 직접 말하고 있는 유다 지파에서 나올 것을 증거하는 내용이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13) 한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미 야곱에게서 네번째로 유다가 날 때부터 [찬송함]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이 이해되기도 한다.

하나님은 독생 하시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것을 이미 예정하셨지만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죄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것인가를 알게 하시려고 율법을 주셨는데 그것은 분명한 기간을 한정하셨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3:19)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계속 진행되는 추이(推移)를 따라서 대처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미 정해 놓으신 수순에 따라 역사를 완성해 가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임시로 허용하셨던 불완전을 걷어 내시고 완전한 것으로 바꿔 가시는 하나님이시다.



Ⅱ. 영적인 법은 생명과 능력에 따른 것이다(14~16)

레위가문이 아닌 유다 지파에서 나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과거 율법을 받고 제사를 드렸던 모세나 제사장들이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는 완전히 다른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의 계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영원한 생명의 법에 따라 된 것으로 앞의 내용을 좀더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 주께서는 유다로부터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14f) 시편에 예언된 멜기세덱을 따라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대대로 이 땅에서 제사장의 직책을 이어왔던 레위가문이 아니라 유다 지파에서 나셨음을 확인한다.

이것은 과거 이집트를 나오면서 광야에서 시작된 제사장 제도와 제사의 방법이나 율법을 받아 그대로 시행하게 했던 모세에 의해서 한번도 말한 적이 없는 전혀 획기적인 사실임을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14b) 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모세는 제사장이 아닌 보다 완전한 지도자에 대해서 언급했던 경우는 분명히 있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신18:15)

그럼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가 말한 그 선지자가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오신다는 사실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감춰져 있었던 것이었기 때문에 메시야 예언에서도 제사장의 변화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는 신비의 역사였다. 이런 이유에서도 OT의 그 수많은 예언에서도 이러한 말은 없었고 오로지 시편110:4에 한번 언급했을 뿐이다.

결국 완전하신 하나님과 전혀 불완전한 사람과의 관계를 완벽하게 중보 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사람 가운데서 선택되고 세워진 레위 가문의 제사장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즉, 이 불완전함이 완전함을 필요로 하고 하나님이시면서 완벽한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야 말로 더할 수 없이 과거의 제사장들과 대조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내용이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15)라는 확인이다. 이를 다음 주에 V27에서 다시 거론하고 있다.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이제 여기서 육신에 속한 계명과 영원한 생명의 능력에 관한 차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16)

이것은 멜기세덱의 계통과 같이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인데 앞부분의 내용인 “그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16f)은 율법과 레위가문의 제사장 제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거기에는 부정(不定)이 뒤따르고 있다. 즉,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하반절의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16b) 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에만 사용될 수 있는 표현이다. 특히 여기 “불멸[ἀκατάλυτος = ἀ + καταλύω, 파괴하다, 폐지하다], 생명[ζωή], 능력[δύναμις]” 이라는 표현들은 수시로 변화하는 물질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낱말들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께 이러한 찬양을 드리고 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 지어다 아멘”(딤전1:17)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되심은 육신의 계보에 의해서 나고 죽으며 계속 되어야할 레위나 아론의 한정된 역할이 완전히 하나님을 중보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감히 사람으로는 넘볼 수 없는 영광과 위엄과 존귀를 바탕 한 영원하고 완전한 것이다.

그 혜택은 선택받았다고 자랑하고 큰소리 치던 이스라엘이 아니라 그 자존심 강한 이스라엘을 통해서 오늘 우리가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오히려 순간적이고 불완전한 것들을 영원하고 복된 것으로 온전케 해 가신다.

이방인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 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었기 때문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되어질 사랑의 역사를 예언하면서 찬양함을 보게 된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마4:14~16)

레위가문을 넘어 멜기세덱의 계보를 따라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과 사역은 스스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긍휼에 들어갈 수 없었던 오늘 우리를 영광의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신 엄청난 사역을 이루셨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Ⅲ. 임시로 주어진 법은 온전케 할 수 없었다(17~19)

여기에서는 바로 앞절과는 반대로 영원한 것과 한시적인 것 그리고 온전한 것과 불완전한 것을 비교하면서 앞의 가르침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우리 사회나 문화에서도 보다 온전한 것이 등장하면 옛 것이나 낡은 것은 버려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인 것에서도 다르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완성하셨음에도 아직도 OT의 율법이나 제사나 절기를 고수하려 한다면 그것은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북한의 버드나무잎].

앞의 5:6, 6:20에 이어 시편110:4을 다시 인용하고 있다. “증언하기를”(17)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을 통하여 증언하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17)

1:5에서 “하나님께서 …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고 시편 2:7을 인용한 저자는 다시 영원한 제사장이심을 증거하는 말씀을 확인하는 것이다.

특히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한 것은 이제 곧 말하려고 하는 불완전한 옛 것과 비교하려는 의도임을 읽게 된다. “영원히[εἰς τὸν αἰῶνα]”는 불변하는 하나님의 속성에 기인된 표현으로 그 하나님께 합당한 영원한 제사장이심을 증거하는 것으로 앞으로는 과거와는 다르게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이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그의 희생을 통해서 자녀 된 우리들에게 도 같은 약속을 주고 계시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3:5) 세상의 편리나 힘 그리고 권력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한다면 결코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시리라는 분명한 약속이다.

이제는 이와는 반대로 임시로 주어졌던 것의 폐기를 말씀하시는 내용으로 무익하고 온전케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18) “전에 있던 계명”은 두말할 필요없이 율법을 의미하는 것이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롬8:3f)

또 이타적(利他的)인 것을 가르치는 성경에서도 유익(有益)이라는 표현을 상당히 자주 사용하는데 특히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유, 무익(無益)을 더러 말하는 것을 듣는다.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b)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갈5:2b; 히13:17b)

이것은 적어도 개인적인 이권이나 유익을 위하는 것 보다는 공동체로서의 유익 즉,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유익을 의미하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폐하고[ἀθέτησις, 무효화]”는 효과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것을 이르는 것으로 율법이 임시적으로 주어져서 죄를 깨닫게 하고 구세주 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깨닫게 해 주는 역할을 하게 하였지만 이제 완전한 제사 제도가 주어지면서 이런 기능조차도 끝나게 됨을 증거한다.

앞에서도 갈라디아서3:19을 인용하였지만 그 효능의 한계를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마지막으로는 이 율법에 대한 불완전성과 거기에 비교되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더 좋은 소망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말씀이 마무리되고 있다.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19f) 앞의 v18에 이어서 왜, 옛 계명이 폐하였는가 의 이유를 덧붙이고 있다.

“아무 것도[οὐδείς, 하나도 아닌, 어떤 것도 아닌]”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제사이건 그것을 주도하는 제사장이건, 모든 과거의 율법 속에 있었던 것들을 모두 부정하는 의미를 강하게 나타낸다. 그러한 이유는 그것과 어울릴 수 없는 온전한 것을 소개하기 위해서이다.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19b) 여기는 과거와 비교하지만 사실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더 좋은” 것으로 죄에 대하여 절망하던 사람들에게 그와는 정 반대가 되는 소망, 그보다 더 좋은 소망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표현이다. 앞의 3:6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소망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증거한 바 있다.

여기 소망을 수식하는 두가지 표현들을 보면 “더 좋은[κρείττων, 더 높은, 더 뛰어난, 더 유익한]”은 히브리서의 독특한 표현들(19 소망, 22 언약, 8:6 약속, 언약, 9:23 제물)로 과거의 이스라엘이 자긍심을 가졌던 그들이 받았던 율법과 비교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온전한 사죄와 구원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 “생기니[ἐπεισαγωγή, 초래, 도입, 소개]” 역시 율법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었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새로운 언약을 도입함으로서 하나님께 좀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는 표현이다.

그런 이유에서 마지막 부분은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고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온전치 못하고 불완전한 것을 버려야만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데 과거의 것을 버리지 못하면 역시 더 좋은 것은 얻을 수 없다는 사실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으로 구속의 역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자긍하고 큰소리치고 자랑하던 이스라엘도 이루시기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던 완전히 감춰져 있었던 신비였었다. 그 신비를 오늘 나(우리)에게 알게 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찬양하고 감사하고 누리는 …

이것은 육신에 속한 옛 계명의 법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거기에 합당한 소망과 함께 진리에 순종함으로 온전히 누리는 믿음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것도 온전케 할 수 없는 율법을 자신들만 받았다고 큰소리치던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보았지만 오늘 우리는 그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더 좋은 소망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섬길 수 있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이 복음을 거역하는 모든 육체적인 것들을 온전히 버리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4:8f)는 말씀에 순종하여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당당히 섬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