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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으로서 우월성을 증거해온 저자는 이제 결정적이고 결론적인 대제사장으로서 우월성을 시편110:4을 다시 한번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 맹세로 세우신 제사장이신 것을 논증한다.
물론 앞에서도 계속해 온 이론이지만 과거의 제사장들이 계속 죽고 다시 시작하는 한계를 가진 반면에 새언약의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뀌지 않고 영원히 계시는 제사장이라는 완전성을 다시 증거한다.
그런 완벽한 제사장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있어서나 주님 스스로 그리고 사람 관계에서도 흠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레위 가문의 제사장들이 먼저 자신의 정결을 위하여 제사를 드려야만 했던 것조차 필요치 않았다고 확인하다.
무엇보다도 불완전한 제물인 양이나 소를 잡아 제사를 드렸던 과거와는 다르게 자신을 제물로 삼아 단번에 속죄를 완성하셨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드려진 제사로서 도 완전한 구속을 이루신 것으로 이 7장의 결론 격인 내용을 나누게 된다.
과거에는 다윗 시대에 엘리 가문의 제사장으로서 합당하지 못한 역할로 인하여 솔로몬과 함께 사독의 가문이 제사장직을 수행하게 되지만 그들의 역할조차도 한계를 가진 사람으로서 모습을 어쩔 수 없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도 성전이 장사터가 되어있는 안타까움을 주님께서 한탄 하셨던 내용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마태복음 21:1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고 이사야서56:7을 인용하시면서 탄식하신 사실을 기록하고 하였다. (막11:17; 눅19:46)
결국 이러한 사실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셨음에도 사람들의 불완전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내기에 과거의 제사장들이 합당하지 못했던 사실을 증거하고 자신이 온 인류의 구속을 위해 합당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신 것이다.
이 합당한 제사장이 다른 사람 아닌 오늘 나(우리)의 중보자로서 대제사장이 되시고 이러한 완전하신 대제사장이신 주님 덕택에 우리 또한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짐승의 피가 아닌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사람들을 인도하고 중보 하는 귀중한 역할을 잘 감당하는 …
Ⅰ. 하나님의 맹세로 된(20~22)
여기 첫번째의 중심단어(key word)는 “맹세[ὁρκωμοσία, 맹세에 의한 단언이나 확증]”이다. 앞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를 나눈 바 있다(6:13~17).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창22:16) 맹세의 내용은 계속 복을 주시고 이삭의 후손이 크게 번성할 뿐만 아니라 대적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고 그의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18)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까지 예언하면서 맹세하신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또 예수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20) 라고 하셨지만 OT의 레위 가문의 제사장 제도에 대하여 하나님은 맹세하신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모세에게는 오히려 부정적인 맹세를 주셨다. 이집트를 빠져나온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역하였기에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신1:34~35)을 맹세하시는데 이것은 신명기에서 수없이 반복된다. 므리바 물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않았으므로 모세 자신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도 맹세하셨다(신4:21).
다윗에게는 그의 후손에서 왕위가 끊어지지 않을 것을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내가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시89:3~4)
완전한 대제세사장 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제사장직은 맹세로 주신 것이지만 레위 가문의 제사장직에 대한 언약에는 “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21f)라고 하시는 것으로 봐서 하나님은 이미 신실하게 제사 드리는 일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임을 아셨기 때문에 맹세하지 않으신 것으로 이해된다.
이 v21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다루고 있는데 주님의 제사장직에 맹세를 다시 확인한다.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21m)
그런 연후에 이제 다윗을 통한 영원한 제사장직의 맹세를 다시 확인한다. 이미 앞의 v17에서 “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하였지만 이번에는 그 다윗으로 증언된 맹세를 포함해서 다시 인용하고 있다.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21b)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22) 성경은 바로 “언약[covenant, διαθήκη, 정돈, 제도, 유언(testament), 조약]”이다. 모든 믿음의 조상들과 도 언약을 맺으심으로 관계를 이루어 가셨다. NT에 언약이 33회 사용되고 있지만 이 히브리서에 절반 이상인 17회나 사용되고 있는 데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언약은 무엇보다도 신뢰관계에서만 효력을 가진다. 골백번 약속을 해도 서로를 신뢰할 수 없다면 그것은 지켜질 수 없는 언약이 되고 만다. 하나님은 언약하신 것을 절대로 어기실 분이 아니시다. 그럼에도 사람은 모두 항상 거짓된 존재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믿음의 사람들과 만 언약을 맺으시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 다우심이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이라고 하였지만 우리 언어로는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비교될 수 없는 절대적이며 최고의 언약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또 다른 면에서 언약은 반드시 보증이 중요하다. 보증이 부실하면 부도를 내버리는 언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은행 대출조차도 분명한 보증을 요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약 자체이실 뿐만 아니라 이 “더 좋은 언약의 보증[ἔγγυος, 보증인, 법정 의무 이행에 대한 보증]이 되셨느니라” 확인하고 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맹세의 조항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6:13) 인류에 태어날 모든 사람과 언약을 하심에 있어서 부도내지 않고 그 약속을 지킬 보증자는 하나님 자신밖에 없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도나지 않을 언약과 보증을 우리가 갖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이 없는 언약의 이행자로 살도록 믿음을 지키는…
Ⅱ. 영원한 제사장(23~25)
여기서도 역시 레위 가문의 제사장들의 한계를 먼저 지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불변하시는 제사장 직분으로 인하여 완전한 사죄와 구원을 확인하고 중보의 확실성까지 증거하고 있다.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23) 이런 이유에서 많은 수가 꼭 좋은 것은 아니다. 확실한 하나가 수천의 불확실과 비교될 수 없는 것을 과거 대대로 죽고 바뀌는 율법 속의 제사장들의 한계에서 불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24) 레위 가문의 제사장들의 한계와 비교하여 영원히 바뀌지 않는 제사장 직분을 죽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에 영원하며 갈리지 않을 것이라고 증거한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25f) 바로 v24의 제사장 직분 이 갈리지 아니하므로 있을 수 있는 결과를 증거하고 있다. 율법 속에서는 제사장을 통해서 제사를 드리고 사죄의 은총을 하나님께 요청하기는 하였지만 제사장을 힘입어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고 하기보다는 자신을 위하여 희생된 짐승의 피를 힘입어 용서를 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짐승의 피가 아닌 자신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단번에 지성소에 들어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는 자들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하셨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9:12)
우리가 누구를 힘입고 사는 가는 이 세상에서도 너무나 중요하다. 거짓된 부모를 힘입고 좋은 스팩을 쌓았다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안타까운 모습도 최근에 우리 모두는 보고 있다.
사실 OT의 제사장들은 제물만 잘못 먹어도 그 드린 제사가 무효가 될 뿐 아니라(레19:7~8) 오히려 그 잘못된 제사로 인하여 죄를 범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한 사람도 실수없이 지성소까지 이끄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한 이유에서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25m) 라고 확신을 주고 있다. 이것 역시 OT의 제사와 비교가 된다. 율법 속의 제사는 제사장 자체가 불완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제사가 온전히 열납 되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런 불완전한 사람들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자신을 의뢰하는 모든 사람을 온전히 정죄의 제판에서 승리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 죄의 형벌을 완벽하게 치뤄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의 사랑의 역할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25b)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실 수 없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졸거나 주무시는 분이 아닌 사람들처럼 피곤을 모르시는 않으신 전능하신 분이시다.
우리는 때로 기도한다고 모여 앉아 있으면서도 피곤을 이기지 못해서 졸기도 하고 기도할 바를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 우리 주님께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또 한가지 꼭 참고해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하심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분이 우리들처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십자가의 희생을 완성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 자체가 그를 힘입는 모든 자들의 변호가 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간구[ἐντυγχάνω, 간청하다, 청원하다, 호소하다]” 하신다는 사실이 감사와 확신이 된다.
대부분은 우리 모두는 자신의 어려운 처지로 인하여 간절히 기도하게 되는데 우리 주님은 자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이라는 모습이 황송할 뿐이다.
이에 대한 확신을 바울이 감격하고 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
우리가 낙심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성령께서도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약속하신다.
우리가 다만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세만 되어 있다면 영원한 구원과 우리를 위한 중보로 간구하시는 주님과 성령께 감사드릴 수밖에 없다. 할렐루야!
Ⅲ. 하늘의 대제사장(26~28)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과 대조되는 완벽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다시 확인하는 결론이면서 모세가 아닌 다윗이 증거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에 대한 해설이라고 할 수 있고, 다음 장부터 이어지는 내용이 가능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26f) 앞에서 설명해온 온전하고 영원하신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우리에게 “합당[πρέπω, 어울리다, 적합(적당)하다, 알맞다]”하다 하였지만 모든 인류에게 알맞은 대제사장이심을 확신해도 좋을 것이다.
왜, 그런가를 정리하고 있다.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이라”(26b) 거룩은 사실 사람관계에서 쓰이는 표현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죄악된 세상과 구별된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악이 없고[ἄκακος, 정직한, 순수한, 결백한]” NT에 이곳과 로마서16:18에서는 “순진한 자”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신의 상태를 표시하는 것으로 순수한 내면을 표시한다.
“더러움이 없고”는 육체적인 순결에서부터 바쳐지는 제물로서 흠이 없는 깨끗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런 예수님 이셨기 때문에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으셨던 것이다. 다음이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죄악 된 세상에 그 죄를 해결하러 오셨다가 구속을 완성하신 후에는 하늘에 오르셨기 때문에 죄와 더 이상 상관없는 상태에 계시다. 1:3b에서도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는 말씀의 반복이다.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27f) 역시 레위 가문의 제사장들과 다름을 확인한다. 일년 일차 디스리(제7)월 10일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자신을 위한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했던 그 대제사장들과는 다름을 말한다.
불완전한 제사장으로서 제사가 계속적으로 드려져야 하는 것을 표현하여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이 필요 없으신 그리스도는 순결한 준비된 제사장이셨기 때문에 한 번으로 영원한 제사를 완성하셨음을 증언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27b)
이제 마지막으로 그 더해졌던 율법과 약점을 가진 제사장을 세웠던 과거와 모든 날 마지막에 새언약으로 이루어진 온전하신 제사장으로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셨음을 선언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28f) 이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율법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약점을 가진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웠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온전하시지만 사람들의 불완전이 시대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불완전한 것처럼 약화시키는 경우들을 역사 속에서 보아오는 사실이다.
이것은 어쩌면 복음이 완성되고 성령 충만의 은혜를 누리는 오늘의 교회에서도 영적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오히려 모독을 당하는 경우들이 더러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역시 영적이지 못한 사람들을 직분자로 세우는 데서 있어지는 현상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스스로 삶과 행위를 조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감격을 회복하여 은혜에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 속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바로 왕 같은 제사장들이기 때문이다.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28b) 이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분명히 창세기14장의 멜기세덱의 사건 자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시편에서 다윗을 통해서 확인되는 내용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복음의 언약을 확인하는 말씀이다.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 제사장들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하는 확인이다. 즉 율법 속에서와 율법 후라는 시기를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다.
사실 멜기세덱 이란 인물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이 신비에 쌓인 사람이 평화의 왕국으로 묘사되는 다윗왕국 시대에 다윗을 통하여 메시야에 비교 되었다.
구속의 역사가 완성되고 나서야 히브리서 기자는 율법의 지도자인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기록한 시(詩)에 영원한 제사장의 모형으로 고백 되어지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오늘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율법에 근거해서 제사장직을 물려 받았다면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맹세의 언약으로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다.
옛 언약의 제사장들은 생명의 한계를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반복적이고 일시적인 역할을 행했을 뿐이지만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영원히 온전한 제사장의 역할을 하신다.
옛 언약의 제사장은 약점을 가진 온전치 못한 역할을 행할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께서는 온전하셔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도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모든 믿는 사람의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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