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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동안 계속하던 히브리서 강해를 잠시 접어두고 on-line이나, 비대면(非對面) 방식의 모임을 계속해 오다가 COVID-19가 좀 주춤해져서 사회적 거리두기 라는 역사에 없던 법령이 해제되면서 함께 한 곳에 보여서 예배를 드리려는 시점에서 이런 부분을 다시 생각하는 것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성경을 계속 강해하면서도 우리 신앙의 전반적인 부분들이 대부분 다뤄지는 것도 있지만 이런 부분을 온전히는 아닐지라도 한번 짚고 가는 것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우리 각자의 예배의 자세와 회복을 기대하면서 이 부분을 나눴으면 한다.
오늘의 주제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것들을 우리 대부분이 잊어버리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이유에서 사실 한 지체의 요청에 의한 것이다. ①우리에게 예배란 무엇인가? ②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③어떤 마음이나 형식으로 드려야 하는가? ④예배가 우리 삶의 어떤 영향을 미쳐야 하는가?
앞에서 간략하게 언급했던 대로 우리는 예배에 있어서 많은 것들을 다룰 수 있을 것이다. OT의 제사와 예배는 어떻게 다른가! 왜, 예배는 일 주일 중에 일요일에 드리고 있는가! 예배라고 하는 범위를 어디에까지 둘 수 있는가! 등등
우리는 먼저 예배에 대한 내용을 다룸에 있어서 인류 최초의 예배라고 할 수 있는 창세기4:3~5 가인과 아벨의 드린 제사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다. 두 사람의 드림에 대하여 하나님의 받으심과 그렇지 못한 것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중요하다.
오늘의 예배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 제사는 모든 예배에 기준을 주고 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창4:3~4)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사죄의 방법으로 피의 제사를 요구하셨는데 가인은 “땅의 소산”을 그리고 아벨은 “양”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는 이론으로 이해하는 경우들도 더러 듣는다.
“땅의 소산” 하나님은 피의 동물 제사뿐만 아니라 땅의 소산 즉, 가루로 소제를 드리도록 율법에 규정하고 있다(레 2:1-16) 문제는 제물의 종류보다는 드리는 자세를 중요하게 보셨다고 이해된다. “양의 첫 새끼”
하나님은 정말 동물의 피를 요구하시고 불태워 바치는 번제를 기뻐하시는 분이신가?(출29:18; 레1:9 향기로운 냄새, 출~민 20회-그럼에도 주로 소제에 많이 묘사 되고 있다.) 질문을 갖게 되는데 율법 시대의 성막과 솔로몬 성전에서 드려졌던 제사를 본다면 그렇게 이해하는 것도 일면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될 수 있겠다.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 수천의 짐승들의 피 비린내를 참으로 원하셨는가! 아마도 그러셨다면 지금은 왜, 피의 제사를 요구하지 않으시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은 죄에 대한 심각성을 일깨워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셨음에 틀림이 없다.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것은 주로 구속의 역사(役事)를 완성하신 NT에서 나타나는 예배를 정의하고 이유와 자세 그리고 우리의 일상에 이 예배가 미치는 영향을 끼치는 가를 제목 제목 별이 아니더라도 이해하고 생각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하며 그리스도인의 귀중한 삶을 확신하는 메시지가 되었으면 한다. 굳이 결론을 맺지 않고 뒷부분을 정리하는 형식으로 진행하고자 한다.
1.예배의 종류
NT에는 3가지 형태의 예배가 언급되고 있다. ①“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σέβασμα, 숭배물, 경배의 대상]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17:23) 창조주요 구세주 이신 하나님의 자리에 하나님 아닌 온 갓 숭배물을 두고 경배하는 종교적인 사람들의 위하는 것들의 형태를 이르는 내용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방법이나 교훈이 아닌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방법이나 교리를 가지고 헛된 섬김을 행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책망하시는 모습으로 주신 경계가 그 두번째이다.
②“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σέβομαι, 숭배하다, 경배하다] 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마15:9)
③“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προσκυνέω - πρός (주로 장소와 관련하여) ~으로부터, …에서부터, …로 향하여, ~에게로, + κυνέω, (주인의 손을 핥는 개처럼)에서 유래 경의의 표시로 엎드리다, 존경하다, 공경하다]할지니라”(요4:24)
바른 믿음의 교훈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르치신 예배가 이것인데 오늘 본문에 주어지는 교훈 속에서 생각하고자 한다.
2.예배의 뜻
(1) προσκυνέω [본문에 예배라는 말이 10번 나오는데 10번 다 προσκυνέω 로 씌어졌다] ···에게 경의를 표하다, 엎드려 절하다, 경배하다, 찬미하다, 경배 등등. 경배(마2:2, 8, 11박사들, 4:10; 고전14:25-예언으로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계4:10-24장로), 절하다(눅4:7마귀 시험; 행7:43몰록, 레판; 계3:9거짓말하는 자들), 예배하다(요4:21-24; 행8:27내시) NT에 60회가 쓰임. 영어로는 대부분 worship(최고의 가치를 드리다.)으로 번역되었다.
(2) λατρεύω 봉사하다, 섬기다, 종이 되다, 예배드리다, 제물을 드리다, 예물을 드리다, 받들다 등등. 섬기다(마4:10하나님께; 행7:42, 24:14; 롬1:9하나님, 25피조물; 딤후1:3하나님), 받들다(행26:7하나님), 봉사하다(빌3:3<영어에서는 예배>), 예배하다(롬12:1) NT에 21회가 쓰임.
(3)OT의 제사(θυσία)와는 다르다. θυσία=θύω 바치다에서 왔다. “θυσία” 죽여서 바치는 제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드림으로 완성되었고(히10:12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15회) NT에 29회 오늘에 있어서는 이미 드려진 제사를 통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θυσία)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λατρεία)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그리스도인은 세상 가운데 살고 움직이지만 이미 하나님께 드려진 삶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구별되고 움직임이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며 세상의 사람들 속에서 살지만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짐승을 죽여 태울 필요가 없다. 주님의 우리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감격하며(주의 만찬) 찬양과 경배의 기도와 우리의 수고의 열매인 연보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로 가르침을 받고 성도의 거룩한 교제로 주님의 은혜를 확인하는 것이 예배다.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힘입어 양심을 민감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리로서 심령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생각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 마음 문을 여는 것이며, 하나님의 목적하시는 뜻을 받들어 봉사하는 것이다(영국의 William Temple).
3.NT예배의 독특성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2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24) πνεύματι καί άληθεία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2:5)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3:22)
(1)신령 πνύμα 바람, 호흡, 성령, 영, 영혼, 신령, 빛(엡5:9), 일심(빌1:27), 기운(살후2:8), 생기(계11:11), 중심(막2:8), 정신(눅9:55; 엡1:17).
인간의 요소에 있어서 가장 높고 가장 깊고 가장 고귀한 부분으로서 성령과 상통하는 곳이다(“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롬1:9)
(2)진정 άλήθεια 진리(요1:14; 롬1:18; 고전13:6; 고후4:2; 갈2:5; 엡1:13), 진실, 성실, 사실, 진리의 사랑, 믿음성, 참(마22:16; 눅4:25), 정직, 진상 등등. 한마디로 거짓이나 허위 또는 꾸며진 것을 용납치 않는 의미이다. 이러한 성격에 맞는 요소는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NT예배의 특성은 비물질적이고 비 조형적이다.
4.예배의 요소
“(42)저희가 ①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②서로 교제하며 ③떡을 떼며 ④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43)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46)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③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⑤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2-47)
(1)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①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2:15; 참고: 행20:7)
(2)그들은 기도했다. “④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주님의 백성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말씀드림으로 예배에 기도가 없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3)그들은 찬양하였다. “⑤하나님을 찬미하며”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5:19)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3:16) 하나님의 백성이 기계적인 기도를 할 수 없는 것처럼 기계적인 음악도 인정할 수 없다.
(4)주님의 만찬은 예배의 중심이다. “③떡을 떼며(행2:42, 46)” (행20:7f)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4~26) 4복음서에도 주님의 명령으로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마26:26-28; 막14:22-24; 눅22:19-20; 요6:35-59).
(5)그들은 연보를 드렸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16:2)
(6)나눔이 있었다. “②서로 교제하며”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1:9)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빌1:5)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몬1:6)
*성경은 이런 거룩한 모임을 폐하는 것에 대하여 경계를 주고 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
예배는 최고의 가치를 드리는 것으로 첫째로는 인류역사에서 최고의 가치 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절망에 갈 수밖에 없었던 나를 위해 제물(θυσία)로 드려진 그 희생을 하나님 앞에 기념하는 것이다.
인생에게 주신 사이클인 매주의 첫날이자 죽음을 박차고 부활하신 승리의 날에 확인하며 기념하고 그 희생되신 주님을 매주 뵈면서 나 자신이 세상 속에서 그 희생에 합당한 삶을 살았는가를 확인하는 예식이다.
그러므로 나의 최고의 가치(생명, 시간, 물질)를 드리지 않는다면 구원을 위해서 아들을 희생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수 없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과 물질과 같은 것들의 최고를 드리는 것을 어려워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예배란 영원한 저주로 갈 수밖에 없었던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매주 만나는 것이다. 분명히 가르치는 말씀도 있지만 예배의 중심은 메시지가 아니다. 다만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직면하기 위해 나를 점검하는 도구일 뿐이지 절대로 예배의 중심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앞에서 예배가 의미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나의 하나님의 자녀됨에 대한 정체성(identity)의 확인이다. 육신을 입고 사는 사람은 한 주간에 한번이라도 자신의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확인하지 않는다면 쉬이 세상(육신)화 되고 말기 때문이다.
매주 믿음의 눈으로 나를 위해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직면하면서 회개하고 자신을 다잡고 희생에 합당한 삶이 되었는 가의 지난 한 주간의 삶의 성찰과 새로 주어지는 또 한 주간의 승리를 도전하는 것이다.
어떤 마음이나 형식으로 드려야 할까? 예배가 의미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절대로 부스러기나 남는 찌꺼기를 드려서는 안된다는 확인이다. 하나님은 나의 부스러기를 받으시고 절대로 만족하실 분이 아니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최고의 가치를 이미 나를 위해 주셨기 때문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세상에서도 살신성인(殺身成仁)을 한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고 존경한다. 그들은 인륜과 도덕으로 자신을 희생하고 그런 일들은 세상에서도 존귀와 칭찬하면서 존경하는 것이 일반이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윤리나 도덕 때문에 자신을 십자가 죽이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는 것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사랑받을 만한 가치도 없는 죄로 형벌 받을 나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주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그런 이유에서 더이상 나의 원하는 내가 바라는 모습이나 감정이나 형식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셔서 계시해 주신 진리 이신 말씀으로 예배해야 한다. 우리의 감정이나 이성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성령과 더불어 예배 드려야만 한다. 이미 나에게 주신 은혜가 헤아릴 수 없이 크므로 이제는 절대로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존귀를 드려야만 한다.
예배는 나의 삶의 시작이며 마무리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요 예배자라면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교우)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라고 고백하는 바울과 같은 고백과 삶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의해서 일주일을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진(θυσία) 삶이 되어서 죄악 된 세상의 어두움의 간교함이 아니라 세상과 구별된 은혜로운 삶이 되어야 하고 바른 예배자라면 반드시 그러한 삶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모이면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과 더불어 신앙으로 같은 이상(vision)을 가진 지체들과 예배와 말씀으로 교제하고 격려하며, 흩어지면 복음을 증거하는 구별된 삶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주님의 백성으로 하늘의 지혜와 충성으로 주어진 육신의 일에도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사람들 앞에 전시해야 한다.
마치 다니엘과 같이 “이에 총리들과 고관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하였으나 아무 근 거,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단6:4)는 모습이어야 한다.
다니엘이 이런 삶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예배자였기 때문이다. 바른 예배자는 당연히 세상에서도 거룩한 영향력을 갖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예배자의 삶은 같은 지체들에게 뿐만 아니라 세상의 불신자들에게도 흠잡을 데 없는 영향력을 나타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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