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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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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8: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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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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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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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하나님은 땅에 있는 레위가문의 제사장들과 완전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해 오면서 시간 속의 제사장과 영원 속의 제사장을 대조적으로 보여 주었던 것들이 이제까지의 내용이었다.
이제 이 8장에서는 과거 이스라엘의 광야와 솔로몬 이후의 성막과 성소에서 제사장들이 드린 제사와 다르게 하늘에서 직접 제사장직을 수행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와 끝이 없이 계속 드려져야 했던 짐승의 피로 드린 희생제사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제사 드리심을 확인한다.
그러면서 이것은 율법 시대에 예레미야를 통하여 이미 예언되었던 새언약의 성취임을 당시에 주셨던 예언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확인하는 내용이 우리가 다음 주에 나누게 될 뒷부분이다.
광야에서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에게 성막에서부터 제사장 위임식은 물론 그 제사제도를 위한 도구들을 만들 사람까지 출애굽기25~31장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할지니라”(출25:40) 당부하시고 보다 구체적인 내용에서도 “제단은 널판으로 속이 비게 만들되 산에서 네게 보인 대로 그들이 만들게 하라”(출27:8) 당부하신다.
여기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나 “네게 보인 대로”는 바로 모든 제사의 도구와 모양이 하늘에 있는 것들을 모세에게 모델로 보이시면서 이 지상에서 만들게 하시고 제사하게 하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결국 레위가문의 제사장들은 하늘 제단의 모형 즉, 그림자와 같은 것들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럼에도 그림자는 그 비쳐진 본 모양 실체가 있다면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은 이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역사의 흐름처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모습도 점점 하나님의 참 제단과 가까워지고 있다. 먼 곳에서 다만 그 모형을 따라 제사했던 율법시대는 지나가고 레위 가문의 자자손손(子子孫孫) 죽고 나는 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이 땅에서의 제사는 하늘에서 보내신 보다 온전한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사로 그분의 온전한 제사를 힘입는 모든 사람들로 단번에 지성소에 들어가게 하심을 확인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어떤 귀중하고 값이 나가는 것들은 짝퉁을 만드는 일들이 분명 합법적인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주변에 더러 있어지는 일들이다. 영어이지만 우리 일상에까지 사용되게 된 말이 바로 ‘imitation’이다.
좀 지나치게 표현한다면 과거 율법속에서 있었던 제사나 제사장 제도는 이 히브리서에 의하면 ‘imitation’ 즉 모양만 본 뜬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온전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실체가 아닌 ‘짝퉁’을 허락하셨을까?” 하는 의문이다. 그 사실은 이렇다. 첫째로는 하늘에 있는 것을 지상에 옮겨올 수 없었기 때문이고 두번째로는 보다 온전한 것을 바라고 사모하게 하시려고 임시적인 제사장 제도와 성소나 성막을 허용하셨다고 이해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11:1) 라는 증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Ⅰ. 제사장의 자리(1~2)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사뭇 진지하고 조심스럽게 하나님의 지성소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접근한다. 과거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아닌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완전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사실과 주님께서 계신 성소는 하늘의 모형을 보면서 사람이 지은 그 성소와 다르게 과거 모세에게만 보게 하셨던 바로 원형의 성소 즉, 주님께서 친히 직접 세우신 성소라고 증거한다.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1f) 여태껏 제사장들과 제사와 성소를 이야기해 왔지만 그 하늘에 비교되는 불완전한 임시 성소가 아니라 영원한 성소와 한번으로 완전한 제사를 완성하신 그 대제사장께서 우리를 위해 계시다는 확신이다.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앞에서 여러가지 서론적이고 핵심을 설명하기 위해서 말해 왔던 이론과는 다르게 이제는 중심이 되고 요점이 되는 사실을 말하려고 한다고 운을 띠우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이야기들은 이것을 알게 하려고 예를 들었을 뿐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과거 이스라엘을 위한 레위가문의 제사장도 아니고 불확실한 제사를 드려야 했던 불완전한 제사장이 아닌 “…그가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1b) 한 것처럼 권능과 영광 그리고 승리로 상징되는 하나님 우편에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 영원하신 제사장을 소개하려는 것이다.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신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막16:19)는 증거는 복음 증거에서 언제나 선포되는 일관된 모습의 묘사로 본래는 시편110:1에 예언되었고 이 히브리서에서도 이미 1:3에서 증거되었고 10:12, 12:2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말씀이다.
특히 “지극히 크신[μεγαλωσύνη, 위대, 장엄, 광대← μέγας, 큰, 위대한]”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한글)이란 표현은 복음서에서도 시편110:1이 인용되면서 항상 오른편은 왼편과 반대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승리의 자리요 권능의 자리로 나타난다(마25:34).
물론 우리가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면 주님과 함께 하나님 우편에 참여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바울도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고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제사장으로 묘사하고 있다.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2f)보다는 “참 장막인 성소에서 섬기는 이시라”고 바꿔서 이해할 수도 있는데 과거 광야에서나 성막이나 솔로몬 성전이후의 법궤가 모셔져 있던 가장 깊은 그 지성소도 “성소”라고 일컬었음을 9:2~3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하늘의 성소를 모방한 것에 불과 했던 것에 반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정한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계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소는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2b) 함으로서 유다 지파 사람으로 하나님의 영이 충만했던 브사렐이나 단 지파의 오홀리압 같은 사람에 의해서 지어졌던 광야에서의 지성소가 아니라 대제사장이신 우리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우리 주님은 제사장의 평생 동안만 대제사장의 자리를 감당하다가 죽고 나면 다음 세대의 제사장이 감당하는 유한한 제사장이 아니라 이제 사람이 세우지 않은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대제사장이시고 다름 아닌 우리가 그분과 함께 하나님을 영화롭게 섬길 수 있는 제사장들이 되었다.
이런 입장에서 오늘의 우리가 인류가운데서 택함을 받았다고 자위하던 이스라엘 사람들보다도 훨씬 영화로운 지위를 얻은 것이다.
Ⅱ. 제사장의 성격(3~4)
여기서는 제사장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과거 율법시대에는 이미 레위가문의 제사장들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의 예물이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일 필요가 없었음을 증거하면서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음을 우회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3f) 당연히 대제사장이 왜, 세워졌는가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라는 이유를 말하고 있는데 특히 “예물[δῶρον, 선물, 선사품]과 제사[θυσία, 희생제사, 제물, 제사 드리는 행위] 드림”(5:1, 9:9)은 특별히 구분할 필요가 없이 하나님께 드려졌던 모든 제사 행위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듯하다.
“…그러므로 그도 무엇인가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3b)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세워졌다면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럼에도 여기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물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그 자신이 제물 이심을 간접적으로 오히려 강조하고 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다른 하나는 “드림[προσφέρω, 바치다]”의 시제(時制)의 차이이다. 레위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들에게 있어서 쓰여진 표현은 “드림[προσφέρει]” 현재 능동 대격으로 반복하여야 할 시제로 쓰여 졌다.
반면에 하반절의 “드림[προσενέγκῃ]”은 과거 능동으로 한번으로 영원히 바쳐진 것을 의미하는 차이이다. 이 사실은 바로 앞에서 이미 직접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7:27b)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라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4f) 이것은 뜻을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 사실과 반대되는 것을 가정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성전에서 제사장이 되셔야만 하는 당연함을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오셨지만 이 땅에서 나지 않으셨고 불완전한 레위가문의 땅에서의 제사장 직분을 이어받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땅에서는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들을 밀어내고 그 역할을 하지 않으신 것은 당연하다.
그런 이유에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도 율법에 정해져 있던 정결예식을 당시의 제사장들을 통하여 행하셨음이 기록되고 있다.
“할례 할 팔 일이 되매 …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눅2:21~24)
그 이유는 “…이는 율법을 따라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4b) 비록 하나님께서 맹세하지 않으셨지만 예정하신 일정기간 동안 레위의 후손들이 모세를 통하여 위임을 받아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땅위에서 백성들의 사죄를 위한 제사를 드리는 역할을 그들에게 이미 맡기셨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시간과 역할의 이유를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16:16)
바울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4~5)
이러한 사실들을 모두 그대로 인정하시는 내용을 “…이는 율법을 따라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4b) 즉 율법에 의해서 율법 속에서 사죄나 정결을 위하여 여러가지 태워 바치는 번제와 화목제, 곡물로 바치는 소제와 술로 바치는 전제 등등의 정해진 율법의 규례를 따라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땅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중보 했던 불완전한 제사장이 아니라 참 성소인 하늘에서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시다.
Ⅲ. 직분의 비교(5~6)
오늘 내용의 마지막은 모세를 통하여 보여주신 대로 땅에 장막을 지은 것과 그것과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아름다운 지위와 직분으로 우리가 얻게 된 율법과 비교될 수 없는 더 좋은 약속과 언약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게 된 것을 증거하고 있다.
첫번째로는 과거의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제사하고 섬긴 것의 근거를 먼저 거론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과거에 자신들이 야훼 하나님께 선택되어 인류 가운데 유일하게 택함을 받은 민족이라는 대단한 자긍심을 가졌고 이것도 우리가 복음을 듣지 못한 입장이었다면 역시 그들이 충분히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근거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5f) 어찌 보면 과거 이스라엘에게는 그들의 자긍심에 상처를 줄 수 있는 표현이다. 사실이나 실체는 없고 다만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를 보면서 큰소리 쳤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다 실체라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모형[ὑπόδειγμα, 표본, 견본 9:23]” “그림자[σκία, 비친 모형]”는 모두 실체(實體)가 아니며 그것으로 실체를 이해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모형”은 결코 실체와 같을 수 없고 “그림자”는 빛이 비치는 방향과 거리 또는 굴절되는 데 따라서 변한다.
마치 Air-Bus A380의 모형기를 보고 있으면서 마치 A380기종의 비행기를 타본 것처럼 생각하는 것과 비교할 될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A380 비행기를 타본 사람이라야 거의 호텔 라운지처럼 넓고 화려한 비행기 내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스라엘은 자신들 각자가 아닌 모세를 통해 보여 진 하나님의 제단의 모형과 그림자를 세워 두고 제사를 드리면서도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섬겼다면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는 우리들은 얼마나 큰 자긍심과 확신을 가져야 하겠는가!
아니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역할을 잊은 체 선택에 대한 자랑만 내세우다가 결국 버림을 당했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를 힘입어 왕 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면 이스라엘과 같은 교만 보다는 사랑의 빚 진자들로 사명을 감당하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모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였다.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5m) 이것을 다르게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에 순종하여 최선을 다하려 할 때 하나님의 지시를 얻을 수 있었다는 논리가 된다.
비록 하늘의 것을 그대로 옮겨올 수는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따라 순종하려고 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하늘 성소의 모습을 보이시면서 그 모습을 따라 성소를 세울 수 있도록 지시하심을 입었다.
또 그 일이 가능하도록 모세를 돕는 자들인 브사렐이나 오홀리압 같은 사람들에게까지 하늘의 성소를 보게 하셔서 예정하신 대로 아들을 이 땅에 직접 보내실 때까지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하게 하신 것이다. 이래서 신앙에 있어서 믿음과 순종이 중요함을 확인하게 된다.
그 지시하신 내용이 바로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5b) 하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은 한번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출25:9) “너는 산에서 보인 식양대로 성막을 세울지니라”(26:30)고 지속적으로 당부하셨다.
이것이 OT의 율법속에서 그러했을 진데 완성된 복음 속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율법은 갱신될 임시적인 약속이었다면 복음은 완성된 더 이상 바뀌지 않은 언약이기 때문에 그르치게 되면 더 이상 소망이 없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바울의 당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해야만 할 필요를 느낀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전4:6)
이러한 자긍심을 히브리서 저자는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고 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6f) OT의 율법 속에서도 대제사장의 직분은 충분히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직책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직분이었다.
사도행전 속에서도 바울이 옳지 못함을 책망하다가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고 사과하는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바울이 가로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행23:4~5)
바울은 다시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 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후3:9)고 하여 복음속에 새언약의 직분에 자긍심을 고무하고 있다. 이런 것에 비한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가히 사람의 영광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라는 표현이야 최고의 영화로운 우리 주님의 대제사장의 역할을 찬양하는 표현이다.
“아름다운[διάφορος, 다른, 우월한, 우수한, 훌륭한]” “직분[λειτουργία, (백성이나 국가 공동체를 위한) 봉사, 섬김, 사역]” “얻다[τυγχάνω, (표적을) 맞히다, 성공하다, 도달하다]”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6b) 여기서도 비교급이면서 최상의 표현에 버금가는 묘사로 우리 주님을 기뻐하고 찬양하는 내용으로 마무리가 되고 있다.
“더 좋은 약속,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더 좋은[κρείττων, 더 높은, 더 뛰어난, 더 유익한, 더 훌륭한], 약속[ἐπαγγελία, 알림, 발표, 선언, 보고], 언약[διαθήκη, 유언, 정돈, 명령, 제도, 협정, 조약], 중보자[μεσίτης, 중재(개)인]
‘이것 이것은 하지 말고 이것은 지키라’는 식의 율법과는 비교될 수 없는 완벽하고 틀림없는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믿고 순종만 하면 완벽하게 보장되는 천국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주신 확실한 유언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죄인이었던 사람과의 중보자는 같은 죄를 가진 제사장들인 레위의 후손들은 불완전한 역할을 하였지만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사람으로 살아 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비교될 수 없는 최고 최상의 중보자 이시다.
이러한 분이 다른 이스라엘이나 유다 지파의 중보자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의 중보자 이심을 감격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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