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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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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8:7~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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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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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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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의 중심이요 본론이라고 할 수 있는 8:1~10:18의 시작 부분인 이 8장은 그리스도의 제사가 새장소인 하늘의 성소에서 과거의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닌 전혀 새로운 언약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나누고 있다.
레위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하늘의 모형과 그림자인 땅의 성소에서 제사를 드렸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땅 위의 성소의 원형인 하늘의 성소에서 제사장으로 섬기게 되었음을 앞에서 나눈 바 있다.
이 뒷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못해 최종적으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예언된 새언약의 약속을 바로 그 예언을 통하여 확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의식 자체가 율법과 더불어 주셨던 방식이 아님을 증거한다.
사실 유형에 있어서 땅 위의 성소와 성막은 한결같지 못했다. 아주 사소한 예들을 보면 출애굽기16장에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양식으로 하늘에서 내리신 만나를 대대에 알게 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출16:33~34)라는 기록을 볼 수 있다.
민수기16~17장에 모세와 아론에게 반항했던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사건을 정리하고 하나님께서 제사를 위하여 택하신 사람들을 확인하기 위하여 지팡이 하나씩을 취하여 증거궤 앞에 두었고 이튿날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림으로 하나님께서 제사를 위해 택하신 사람임을 인정하셨다.
이것을 계속 전하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민17:10)고 말씀하신 바 있다.
그러나 솔로몬이 지었던 영화로운 성전의 내용을 기록하는 열왕기상8장이나 역대하5장에서는 이러한 기물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두 가지의 물품들이 모두 대대로 간수하거나 간직하여 표징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지만 정작 솔로몬 성전에서는 볼 수 없었다.
또 율법을 받은 후 광야시대의 하나님께 드린 제사에서는 악기의 사용으로 찬양하는 내용을 전혀 볼 수 없었지만 악기의 제조나 연주에 능했던 다윗 이후에는 성전에서 찬양대가 그들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 이것 역시 한결같지 않은 성소의 내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런 모든 일관되지 못한 제사와 성소의 구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영원히 변치 않을 한번으로 영원히 드려진 제사를 통하여 이스라엘만이 아닌 전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셨음도 율법 시대의 그것들과 완전히 다름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런 완전한 예배는 불완전한 율법의 시대에 이미 하나님께서 경건한 그의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해 둔 사실임을 오늘 말씀에서 확인하게 된다.
Ⅰ. 첫 언약과 새언약(7~8, 13)
이미 앞에서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7:18~19f)는 첫 언약의 한계를 지적한 바 있고 갈라디아서에서도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3:21)고 바울도 지적한 바 있다.
먼저 과거 첫 언약의 한계성을 지적하고 반드시 새언약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을 같이 묶어 나누고자 한다. 예레미야의 예언을 인용하기에 앞서 오늘 첫 구절인 v7이나 예레미야의 예언을 해설하는 마지막 v13이 같은 내용으로 기록되고 있기 때문에 붙여서 나누고자 한다.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7) 이것은 히브리서 기자의 과거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율법에 대한 평가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성경 속에서 땅에서의 첫 것은 항상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 귀한 것이었지만 언약은 달랐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 두 곳에서 말하는 율법과 계명을 보면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7:12)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딤전1:8)고 분명히 하고 있다.
물론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었다면 문제는 달랐겠지만 결국 불완전한 사람으로서 하늘로부터 주어진 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롬4:15)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7:7)
결국 주신 율법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죄인임을 깨닫고 더 온전하고 흠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그의 희생을 힘입고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게 하시려는 처음부터의 하나님의 뜻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 언약을 맺었어도 그 언약을 어김으로 결국 언약밖의 사람들과 다름이 없이 적국으로 포로되어 잡혀가는 자기 백성에게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8f) 라고 먼저 책망하신다.
이러한 안타까움에 이어 앞으로 전혀 새로운 언약을 주실 것을 말씀하신다.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8b) 그러므로 때가 되면 주실 언약은 과거에 주신 언약을 손질하여 고치거나 개편하는 정도가 아니라 전혀 완전히 새로운 언약임을 선포하신다.
그럼에도 예레미야 이전에 이미 망하고 분리되었던 이스라엘까지도 이 새로운 언약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이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사실 단과 벧엘에 우상을 세우고 하나님 아닌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다가 앗수르에 포로가 되어 이미 관계가 깨어져버린 언약밖의 이스라엘을 거론하는 것이 독특하다.
이것은 다윗을 인하여 등불을 끄지 않으시겠다고 하셔서 그동안 남겨져 왔던 유다를 끝내면서 새언약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말씀은 결국 온 인류를 마음에 두고 하시는 약속으로 이해된다.
오늘 마지막절 말씀을 여기에 붙였는데 여기에 바로 연결해도 크게 무리가 되지 않는 오늘 말씀의 결론 같은 내용이다.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8b)” 하시고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13) 하시기 때문이다.
사실 새것이란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고 또 모두에게 설렘을 주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반대로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라고 땅에서 존재하는 것들을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낡아지다[παλαιόω, 오래된, 낡은, 구식의]”에서 유래한 말이라면 “쇠하다[γηράσκω, 늙어가다]”로 시간의 흐름으로 낡아지고 늙어가는 것은 결국 소멸하게 되어 있음을 말하고 그 결과로 “없어져 가는[ἀφανισμός, 소멸, 사라짐, 없어짐, 파멸, 멸망]” 눈앞에서 보이지 않게 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오늘 우리가 복음안에서 확신하는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4:16)라는 약속을 확신하며 살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하며 충성해야 하겠는가를 각오하게 된다.
Ⅱ. 돌에 기록한 언약과 마음에 기록한 언약(9~10)
두번째의 내용에서는 과거 이집트를 빠져나와 시내산에서 두개의 돌 판을 중심으로 세웠던 언약과 그 후에 두루마리에 세긴 수많은 법조문들, 앞에서 말한대로는 낡아지고 쇠하여 마침내 사라질 보이는 법을 언급한다.
그런 다음에는 앞에서 날이 이르리라고 하였지만 새롭게 돌이나 양피지가 아닌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의 언약을 성령으로 새김으로써 신령하신 하나님과 거룩하게 교통하게 하실 새로운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약속하시는 내용이다.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9f) 이것은 예레미야 시대에 미래에 새워질 새 언약이 기존의 시내산에서 이집트에서 나온 백성들과 세운 것과 전혀 다른 언약임을 확인하고 있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9b) 여기서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라는 것은 계속적으로 언약 밖에 있었다는 의미가 되므로 단순히 한번의 실수로 볼 수 없고 계속 약속을 어긴 것을 지적하는 표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당연히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하신 것이다.
특히 이 말씀은 본래의 예언보다 조금은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본래의 내용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1:32b) 이다. OT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부부로 묘사하는 내용들은 더러 나타난다(사54:5; 렘3:14; 호2:19~20).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않는 우상숭배를 간음으로 묘사하는 부분도 본다(렘3:9; 겔16:30). 부부의 관계야 말로 언약의 관계로 맺어진 사이이고 서로를 위하여 언약이란 더 깊이 말하자면 자신의 정조를 지켜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상대에 대한 약속이며 의무이다.
그럼에도 부부의 언약을 지키지 못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도 결국 버리셨고 이를 표현하는 내용이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9b) 선언하고 계시다. OT에서 이러한 안타까운 내용을 가장 구체적으로 표현한 내용이 호세아서이다.
“(10)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이것은 예레미야31:33의 인용으로 그 새로운 언약은 이제 생명 없는 돌에나 무생물에 세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 중심에 기록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10f) 여기서부터 v12까지는 새롭게 맺어지는 언약의 성격을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주된 내용을 3가지 정도로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10m) 이것은 약속을 기록할 위치를 말하고 있는데 바울이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고후3:3)
항상 보이는 것은 한계가 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로 표현의 한계는 있지만 어떤 말씀을 찾으려 하면 그것이 기록된 성경을 찾아봐야 하지만 그것을 생각의 중심인 마음에 기억한다면 구태여 성경을 찾아 펴볼 필요가 없다.
또 다른 의미에서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겠다는 것은 과거의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를 위해 돌에 기록한 십계명과 다르게 하나님을 순종하여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으로 생각할 수 있다. 복음의 완성 후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각 사람의 마음에 있다는 것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10b) 결국 불순종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드려진 희생을 힘입고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이제는 진정한 이스라엘인 것이다. 오늘 나는 하나님의 새 언약 속의 백성인가를 확인하는…
Ⅲ. 완전한 사죄의 언약(11~12)
마지막으로 나눌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의 보편성 즉, 일반성과 완전한 사죄에 대한 확신이다. 예레미야31:34의 인용으로 더 이상 제사장과 같은 특별한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즉, NT교회의 특징 중의 하나인 서로 간에 믿음을 격려하는 관계임을 지적하고 있다.
또 다른 언약의 특성은 새언약의 효과의 확실성이다. 과거 OT시대에 제사를 드리고도 확실한 사죄를 받았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제사를 드리면서 온전치 못하면 사죄가 아니라 오히려 제사장 조차도 또 죄를 범하게 되는 불완전한 사죄였다면 새 언약 속에서는 죄의 완전한 도말(塗抹)의 약속이다.
형식적이고 겉으로 나타나는 것은 제한적이지만 영적이고 내적인 것은 제한이 없다.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11) 하나님의 이적과 능력으로 이집트를 탈출해 나온 이스라엘은 그들의 노정(路程)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적의 역사와 모세를 통하여 주시는 계시를 통하여 약속의 가나안의 바로 건너편까지 오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여호수아와 함께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점 하나님의 언약에서 멀어지게 되어 그렇게 경계하고 다짐을 시켰던 가나안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쉽게 물들고 만다. 그 이유를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삿2:10)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역사(役事)를 보고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지시를 받을 때는 그래도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있었는데 그 세대 즉,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직접 보았던 사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표적이나 계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들과 같은 믿음을 갖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이는 이적이나 중보자를 통한 계시는 한계성을 가지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새언약 속에서는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11f)이라 증거한다. 새언약 속에서는 조상이나 남들이 들려주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아니라 순종하여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의 은혜를 스스로 경험하게 되기 때문에 ‘예전에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 이랬었 단다.’ 라는 주문이 필요 없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녀나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를 스스로 경험하도록 훈련하고 이끌기만 하면 끝이다. 여기까지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11b) 여기서는 연령이나 지위의 제한이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복음 속에서의 인종도 계급도 민족도 더 이상 제한이 없이 주님을 영접한 자들이 이스라엘이 된다.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날 최초로 복음을 전하고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2:39)고 구원의 범위를 한정하지 않았다.
바울 역시 보다 구체적으로 증거하기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한 다음에 다시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 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3:11)고 증거하였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같지만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물리적인 힘으로 천사와 겨뤄 이기고 얻어낸 과거와 다르게 믿음으로 이김을 의미하는 것이 복음 속의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렇게 첫 언약 때에는 그 언약의 대상을 이스라엘로 한정하였지만 새언약 속에서는 작은 자든 큰 자든지 높고 낮음이 없이 거듭나 성령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통치와 역사를 자신의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옛 언약과의 차이를 두번째로 지적했다.
이제 새언약 속에서의 효능의 세번째가 오늘 주시는 교훈의 결론이다. 과거 하나님께서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행13:22b) 하신 사람이었지만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이고 자신의 죄를 잊어버린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죄를 지적하신다.
그제서야 자신의 죄를 깨달은 다윗은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시51:9) 라고 사죄를 요청하였고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삼하12:13b~14f) 라고 제한적인 속죄를 약속하신다.
이렇게 다윗은 죄를 용서받았지만 그 후에 자신의 죄의 결과로 수많은 고난과 수치를 당하는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오늘도 ‘우리의 죄를 따라 형벌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어떨까!’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새 언약 속에서는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2)는 분명한 사죄의 약속을 주고 있다. 사실 하나님은 이미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사43:25) 약속하신 바 있지만 그럼에도 이 언약은 바로 복음 속에서 이루어질 약속을 예언하신 것이다.
이 복음의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폐하신 낡아지고 쇠하여 없어져 가는 불완전한 옛 언약의 부분을 고집하고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보고 확인된 것 만을 믿으려고 한다면 여전히 제한된 옛 언약 속의 이스라엘과 다름이 없는 모습일 것이다. 듣고 믿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마음과 생각에 오셔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각자의 삶 속에 늘 경험하는 주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전8:11) 라는 솔로몬의 경계가 필요치 않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b)는 교훈을 따라 새언약의 백성으로 살아서 더 이상 정죄의 고통에 붙잡히지 않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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