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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9:11~14 2022-07-03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바로 앞에서는 아론의 후손들을 통하여 하늘의 영원한 제사의 모형으로 땅에서 이루어진 짐승의 피로 일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들의 죄를 용서받는 매해 반복되는 제한된 성소와 지성소를 보여 주었고 이것으로는 백성들의 양심까지는 깨끗케 하지 못했다는 제한된 속죄를 증거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여기의 표현대로는 개혁하실 때 까지만 즉, 온전한 제사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까지만 레위의 후손들에게 맡겨 두신 것이라고 증거하면서 말씀이 마무리된 것이 지난 주의 말씀이었다.

오늘은 그 내용은 온전히 반전되고 회복되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있다. 짐승의 피로 매년이 아닌 자신의 피로 한번에 온전히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한 사죄의 은총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사실 이 내용 자체도 사람들에게는 신비에 속하고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다. 하나님과 같은 분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스스로 온전한 제사를 드렸다는 사실 자체가 육체를 가진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창조에 속한 모든 보이는 것으로는 영원하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일을 위하여 이 역사 속에 오셔서 사람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을 이루신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이러한 내용 자체도 믿음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일 때만이 이해가 가능하고 소화할 수 있는 말씀이다.

특히 본문에서 하늘로부터 이루어진 사실에 “말미암아(διά) ~을 통하여, ~때문에” 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11) “오직 자기의 피로 말미암아”(12)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14)

무엇을 통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과제이다. 짐승의 피로 말미암아는 일회적이고 제한적이며 레위가문의 제사장들을 통한 사죄도 일회적이고 제한적인 것은 그것이 다 땅에 속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무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에도 불구하고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허락하신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죄의 은총을 누리고 있다면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이유가 된다.



Ⅰ. 영원한 속죄를 이루심(11~12)

앞의 1~10에서 거론한 성소와 지성소에서 행해진 모든 속죄의 일들이 제한적이고 불완전한 것이었다면 오늘 다루는 내용은 단 4절에 불과하지만 완전히 반전되고 불가능이 가능이 되는 내용이다.

특히 앞의 땅의 성소와 지성소에서 제사장 역할을 하던 아론의 후예들은 두려움으로 명령을 수행하는 극히 수동적이었다면 여기서는 주관적이고 능동적으로 행하시는 모습이 대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11f) 옛 언약 즉, 과거의 땅 위에서 아론의 후손들로 통하여 이루어졌던 불완전하고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제한된 속에서 이루어졌던 모든 일들과 대조적으로 미래적이고 확실한 일들을 완성하러 오신 주님을 소개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대제사장으로 오사”(11f) 이것은 과거의 죽어서 계속 바뀔 수밖에 없었던 레위가문에 속한 육신의 대제사장과 비교될 수 없는 것은 땅에서부터 난 자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심 자체가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앞에서 본 대로 이미 땅에서는 제사장들이 있었고 그들은 미쁘시고 약속하신 이가 오실 때까지 과거의 언약에 머무는 사람들이었다면 우리 주님은 “장래 좋은 일”을 위해서 오셨다고 하는 죄 아래 즉, 땅에서 겪는 죄악과 제한과 허무의 상태와는 완전히 다름을 증거한다.

반복적으로 예언되고 단순히 소망하는 복이 아니라 확인된 것으로 하나님께 더 이상의 제사가 아니라도 하나님께 제한없이 나아갈 수 있고 양심까지도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가능하게 될 완성된 언약을 “장래 좋은 일”로 묘사하는 것이다.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11m)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출25:40)가 아님을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이라 하였고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광야에서 성막이든 솔로몬을 통해서 지어진 성전을 모두 부정하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영화롭고 비록 하나님께서 임재 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으로 가득하여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을지라도(왕상8:10~11; 대하5:13~14, 7:1~2) 그것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의 영광에 세우신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11b) 온전한 속죄와 언약이 완성된 것을 말씀하신다.

좀 더 확실한 신앙적 이해는 여기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하늘의 성소는 완전한 성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10:20에서 이를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고 더욱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어지는 내용은 이러한 영광과 위엄의 성소에는 땅에서 난 것들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에 새 언약을 완성하신 제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개하고 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12f) 과거의 이스라엘에서 백성들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용서받을 수 있는 제사의 제물은 제사와 사람의 종류에 따라 양일 수도 있고 염소이거나 송아지의 피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늘의 성소에서는 이런 땅에서 난 동물들의 피로서는 소용이 없다는 증거이다.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12m) 즉,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고 베드로 사도가 증거해 주고 있다.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12b) 이 표현은 역시 10장에서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10:11~12)라고 선포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영원하고 완전한 속죄를 십자가에서 단 한번으로 완성하신 후부터는 더 이상 장소나 시간이 중요하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나님의 영원한 지성소에 들어가셨고 그의 피로 사죄를 입은 우리 또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거룩한 성전을 삼아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깨끗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일들을 시내산도 아니요 예루살렘도 아닌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어디서든지 드릴 수 있게 되었다. 할렐루야!



Ⅱ. 정결을 위한 잿물(13)

옛 언약 속의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행해진 제사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방법을 순종하기만 하면 비록 일회적이기는 하였지만 그 죄에서 확실히 용서를 받을 수 있었음을 증거한다.

“염소와 황소의 피”는 일반적으로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제물들이었다, 그러나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라는 이 정결 예식은 어쩌면 대단히 독특해서 속죄법 중에서 가장 나중에 주어진 법으로 민수기19장에 기록되고 있는 내용이다. v1~10는 이 정결의 잿물을 만드는 방법이 나와 있고 v11~22에는 이 잿물로 깨끗함을 받을 자와 방법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

이 잿물은 이스라엘의 제사에서 가장 흔하게 제물로 쓰이는 양이나 염소가 아니며 수송아지가 주로 속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쓰이는 반면에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가져오게 하고 제사장이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 제사장이 보는 데서 잡게 하였다.

제사장은 그 송아지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 회막 앞을 향하여 일곱 번 뿌리게 하였다. 그런 다음 이 붉은 암송아지를 불에 사르게 하는데 일반 태워 바치는 번제와 같이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간 위에 있는 꺼풀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을 태워 바치는 것과 다르다.

“그 가죽과 고기와 피와 똥을 불사르게 하”면서 거기에다가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 실을 가져다가 함께 태워서 재를 만들고 이 재는 진영밖에 깨끗한 곳에 보관해 두고 암송아지를 불사른 자나 그 재를 거둔 자는 모두 저녁이 되기까지 부정하게 여기며 옷을 빤 후에 정결하게 되었다.

이 재로는 사람이 죽어 시체를 만진 자를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흐르는 물에 섞어 그릇에 담고 장례의 기구는 물론 장막과 시체에 우슬초를 가지고 그 물을 뿌려 정결하게 하지만 그런 일을 한 정결한 사람조차도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은 후에야 정결하게 되었다.

만약에 부정을 입었어도 이런 예식을 거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히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중에서 그러한 사람을 끊으실 것을 말씀하셨다.

본래의 인용된 원문에는 그냥 암송아지가 아니라 붉은 암송아지(민19:2)로 기록되고 있는데 이 “붉은 אָדֹם (adom)”이 성경에 나타나는 형태들을 보면 아람어 아뎀(adem, 붉은 피 red blood), 발효된 포도주(잠23:31), 죄(사1:18), 그리고 장막 커튼(출26:33~37-계속 뿌리는 피로 검붉을 것 같다)을 피로 찌든 의복(사63:2~3)에 대해 묘사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결국 아무 암송아지가 아니라 피의 색깔을 띤 붉은 암송아지를 사용하는 것은 장래적으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써 온 인류의 죄를 깨끗이 씻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요19:34).

어쨌거나 하나님께서 이러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사죄의 방법으로도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이라는 효력을 증거하고 있다. 이것을 증거하는 이유는 그 방법이 온전하다 거나 지금도 그 방법을 통하여 사죄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 보다는, 보다 분명하고 온전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방법이 아니라 보다 분명하면서 확실한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피를 증거하려는 의도이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에 한번으로 영원히 이루어진 희생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주신 어떤 법보다도 분명하고 확실함을 증거하려는 것이고 이것은 오늘 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힘입고 믿음으로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효력을 분명하게 나타낼 것이다.

다음의 오늘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를 보다 분명하게 확인해 주고 있다.



Ⅲ.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14)

여기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을 보다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여기서는 다시 OT에 반하는 복음의 효력을 비교하면서 보다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짐승들의 제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불완전한 제물인 양과 소와 전혀 무흠하신 예수 그리스도, 억지로 끌고 와 죽여 바치는 동물들의 희생과 자발적인 희생, 보여주신 모형대로의 드린 제사와 성령으로 드린 제사, 육신만을 깨끗케 하는 제사와 양심까지 회복하는 제사가 대조된다.

이 v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는 히브리서의 독특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이 부분의 의미를 더욱 분명히 해 주고 있다. 만일… 한다면 하물며… 하지 않겠느냐! 는 표현으로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12:9; 10:28~29)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14f) 아버지께 온전히 드리신 희생에도 성령께서 함께 하셨음을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이미 이 사실을 예언한바 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사42:1) 하였고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61:1f)

이것은 물론 이 땅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의 구원의 선포를 예언하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십자가의 희생을 온전케 하여 뒤에 이어지는 내용들을 보면 복음의 완성으로 이루어질 일들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1b~2)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 본래 하나님께 자신을 구별해 드리는 나실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표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여호와께 헌물을 드리되 번제물로 일 년 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와 속죄제물로 일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와 화목제물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와”(민6:14)

이 땅에서 드리는 흠 없는 짐승은 겉으로 나타난 것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는 내면에서도 온전한 순종의 모습으로 흠 없으신 전 인격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신 것이다.

이미 앞에서 인용한 바 있는 정결케 하는 잿물을 만들 때에도 같은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로 끌어오게 하고”(민19:2)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역시 자신을 흠 없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려면 자신의 의지나 노력이 아닌 성령으로 말미암아 헌신하고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드려진 그리스도의 온전한 희생의 피였기 때문에 그 결과로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14m) 라는 역사를 이룰 수 있었다. 동물들의 제사로 육신의 허물과 부족됨을 회복할 수 있었다면 점도 없고 흠도 없으신 그리스도의 보혈이 드려졌기 때문에 우리의 죽어 있던 양심을 살리고 깨끗하게 할 수 있었다는 증거이다.

앞의 v9에서는 이 땅에서 동물 제사로는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라고 선언한 바 있지만 이제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희생으로 상쇄(相殺)되고 채워짐을 보게 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14b) 이제 이 마지막 한 마디는 역사 속에 영원히 불가능 했던 것을 가능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결과의 절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혀 점과 흠이 없으시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있었지만 아담이후로 모든 인류는 사실 하나님을 섬길 수 없었었다.

이유는 죄인 된 한계로 인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 수 없었다. 죽어 있는 우상은 사람들의 마음대로 섬길 수 있었다. 그것은 어떤 분명하거나 정확한 명령이 없었고 무엇보다 죽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양심을 속여도 모르고 거짓을 행해도 모르고 자신의 마음에만 흡족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만든 우상과 하나님과 다른 것은 살아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꿰뚫어 보시고 머리의 생각을 살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두려워해야 할 수밖에 없는 분이셨고 가까이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섬기는 것은 더더욱 힘들었다.

이제까지 이스라엘이 하늘에서 보여주시고 명령하신 대로 그분을 가까이 섬겨보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이유는 역시 살아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한가지는 사람들이 스스로 만든 우상들은 자신들이 마음대로 나름대로 만든 법대로 섬기기는 하지만 죽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복이나 해를 줄 수 없는 존재였고 다만 섬긴다는 자기 만족, 요즘 흔히 말하는 플라시보(placebo) 효과가 있을 뿐이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마치 우상취급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보다도 못한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으로 신앙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두려워해야 할 자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상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죄에 더 약한 사람으로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어떤 방법으로도 만족시켜드릴 수가 없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모든 신앙적 제사가 실패한 이 역사의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성소에 짐승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로 오전한 희생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에 들어 가셨다. 그것은 이제 온 인류를 위한 생명의 길을 터 주시기 위해서이다.

과거에 이스라엘에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붉은 암송아지를 태워 그 잿물을 부정을 입은 사람에게 주신 법대로 뿌려 순간이나마 깨끗함을 입을 수 있었다.

이것이 가능했다면 영원하신 성령과 더불어 흠 없으신 자신의 피를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의 영육을 죽은 삶에서 온전히 깨끗하게 하셔서 이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게 하셨다. 그렇다면 더 이상 하나님을 죽어 있는 우상취급 하고 자신보다 어리석은 존재로 대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주께서 마련하신 영광에 넉넉히 들어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