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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9:23~28 2022-07-17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율법시대의 제사와 복음시대의 제사를 비교하면서 앞에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드리는 온전한 제사와 불완전한 짐승의 제사와 대조하였다면 오늘 내용에서는 다시 그 제사의 횟수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한번으로 절대적인 희생을 과거의 매년 드렸던 반복되던 제사와 비교한다.

모든 제사장들과 다르게 제사를 마무리하시기 위해 하늘의 성소에 친히 들어가셔서 단번에 온전케 하시고 이제 그렇게 완성된 구원을 힘입는 자들을 하늘로 데리고 가시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제사와 사죄를 완성하고 온전한 구원이 완성된 하늘의 성도들의 보장받은 구원을 사실적으로 이루시기 위하여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주에 다시 한번 확인하고 반복되겠지만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10:1)하는데 그런 이유에서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고 증거한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한번으로 완성된 완전한 사죄는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10:12) 역시 같은 확인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불완전한 제사와 완전한 희생제사의 피 흘리심은 그것을 힘입는 사람들의 운명을 갈라놓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도 비록 이스라엘 속에 나지 못했지만 복음 속에 있음을 감격할 수 있다.



Ⅰ. 참 성소에 우리를 위해 들어가심(23~24)

하늘의 형상을 모조한 땅의 성소에서는 이 땅에서 나는 것들로 성결을 얻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제사하고 짐승의 피를 뿌렸지만 결국 그것은 한계가 있고 온전한 확신을 얻을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면 그 불완전의 원형은 이제 준비된 온전한 사죄의 피인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지게 되었다고 증거한다.

먼저 이 히브리서를 시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1:3) 하여 육신을 입은 한계를 제외하고는 이 인류의 완전한 속죄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아버지와 다름이 없는 그리스도를 찬양한 바 있다.

그럼에도 이 땅에서 선택된 제사장들과 그들의 제사는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8:5)고 평가한 바 있다. 이 두 곳의 비교는 완벽하게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이 땅에 오신 아들에 대하여는 “그 본체의 형상” 즉, 하나님 아버지와 다르지 않은 완벽함이었다면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는 표현은 불완전한 윤곽(輪廓, silhouette)에 불과함을 비교해볼 수 있다.

먼저는 v23은 둘로 나눠볼 수가 있는데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23f) 한 것으로 실체가 아니라 윤곽에 불과한 것들이었기 때문에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불완전한 땅에서 난 것들로 피를 뿌리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허용되었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어쩌면 OT의 가장 사실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믿음의 선진들이 수없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그림자와 같은 희미한 약속을 받고 보면서도 보다 온전하고 확실한 언약을 줄 것이라는 약속으로 견디며 언약을 붙들고 살았다.

이런 입장에서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훌륭한 믿음으로 섬기고 순종하며 살았다는 데서 존경해야 할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이요 용사들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기 때문에 믿음의 장이라고 하는 11장에서 그들의 신앙의 삶이 칭찬 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오늘 우리 각자가 그 때의 사람들이었다면 어떠했을까 믿음을 점검하고 다잡을 필요가 있다.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23b) 전반절과는 다르게 그림자가 아닌 영광과 위엄으로 충만한 실체를 위한 제물은 당연히 더 확실한 것이어야 하는 당연성을 증거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땅에서 난 불완전한 제물이나 제사가 아닌 “더 좋은 제물” 즉, 완전히 흠 없는 것으로 받으심 직한 ‘더 좋은’이라는 비교가 아니라 ‘좋은, 확실한’ 제물이어야 하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를 위해 준비되었고 드려졌다.

다만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23b)이라는 내용이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다. “하늘에 있는 그것들”이라면 ‘이미 완전하여 무엇이 더 필요하기에 또 무엇이 드려져야 하느냐?’는 의문이 그것이다.

이것을 낱낱이 파헤치는 것도 불완전한 이 땅의 지혜로나 모자라는 나 자신의 지식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먼저 고백하고 하늘에 있는 것이 부족하거나 불완전해서가 아니라 결국 그곳에 들어가야할 사람들의 불완전 때문에 완전한 희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인 이스라엘 속에서 아무리 완전하다는 믿음의 사람들도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이 온전하지 못했겠지만 더욱더 우리를 포함한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받아들여 지는 것이 성령의 깨끗케 하심이 아니면 거룩하신 하나님께는 받아들여 지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 사실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바울은 고백함을 듣는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롬15:16)

이제 하늘의 온전한 것들을 충만하게 채우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24)라는 은혜를 완성하심을 증거하고 있다.

물론 이 한절 속에는 그림자가 의미적으로 참 것과 대조되고 있다. “그림자[ἀντίτυπον = ἀντί ~와 대조하여, ~에 반대하여 + τύπος, 원형]” 독특한 것은 이 그림자 적인 것은 “손으로 만든”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24b) 하나님의 형상만이 나타나시는 땅의 성소와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는 그곳에 백성들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얼굴 앞에 면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야 말로 금방울을 달고 죽을까 봐 두려움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대하는 것을 꺼렸던 OT의 대제사장과는 대조적이다. 그것도 주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라고 확인하고 있다.



Ⅱ. 한번의 제사로 온전케 하심(25~26)

바로 앞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사를 드린 것이 이 땅에서의 성소가 아니라 하늘의 성소였음을 확인했다면 이제 이v25~26에서는 OT의 대제사장들이 해마다 동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는 더이상 이와 같은 반복이 필요치 않은 한번으로 완전한 것을 증거한다.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25) 다시한번 현재의 완전을 확인하기 위하여 과거의 땅에서 드려진 제사로 되돌아 간다.

매년 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아론은 자기를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자기와 권속을 위하여 속죄하고”(레16:6) 명령하신 것처럼 수송아지를 드려야 했는데 자신과 가족을 위할 뿐만 아니라 매년 다른 수송아지를 속죄를 위하여 드려야 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으셨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만약에 과거 OT의 율법시대와 같은 방식이었다면이라는 가정(假定)을 다음 절에서 주고 있다. 물론 이 가정은 있을 수 없는 가정(假定)일 뿐이다.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26f) 역사적으로 있을 수 없는 가정(假定)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를 위한 희생이 온전하지 못했다면 아론의 후예를 따른 제사장들과 도 별반 다름이 없었을 것이라는 이론이다.

하나님의 세상창조 역사 후의 끊임없는 범죄의 역사 때마다 회복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역사에 오셔야 했다면 당연히 사회나 개개인의 범죄의 수만큼 이 세상에 오셨어야 하지 않았는가 하는 가정을 들고 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를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따 먹으면서부터 최초의 살인이 저질러진 가인의 살인, 홍수전의 세상의 부패와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은 사건순으로 친다면 하나님을 거역한 세상의 이력은 그 횟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다.

사회적인 이러한 범죄의 이력과 함께 그 속에서 이루어진 각 개인의 범죄는 수를 샐 수조차 없을 것이다. 종 되어 고통 하는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주셨음에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가기까지도 살게 하시려고 주시는 법을 거역하고 범죄하는 광야에서의 모습을 봐도 다르지 않다.

이러한 비극을 그때 그때 해결하시기 위해 주님께서 이 역사에 오셔야 만했다면 충분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26f) 라는 가정은 빗나가지 않은 예상일 것이다.

이미 앞에서 레위의 후손들의 불완전한 속죄를 수없이 거론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그들과 같은 방법을 따르는 것이었다면 천지창조 이후에 범죄한 그 횟수만큼이나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어야 만했을 것이라는 안타까운 가정이다.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26b) 여기 “이제”라는 표현은 앞에서 말한 모든 가정을 부정하고 사실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역사를 확인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과 시기를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물론 주님의 제사의 횟수를 못박는 것도 분명한 확신을 주고 있다. 오신 목적은 “죄를 없이 하시려고” 라고 하였지만 제물은 “자기를” 과거와는 다르게 필요한 횟수를 “단번에” 그 시기는 “세상 끝에”라고 확인하고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인류의 구속을 위한 성육신을 증거하기를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3:16)고 이러한 사실을 함축적으로 증거한다.

베드로 사도 역시 이 사실을 증거하고 찬양하고 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벧전1:18~20)

앞의 v15에서 증거한 것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의 효력은 두 번도 필요 없는 한번의 헌신으로 과거의 “세상을 창조한 때”(26)까지 거슬러 올라갈 뿐만 아니라 이제 말하려고 하는 이 땅에 다시 오실 종말의 때까지(28) 하나님의 죄에 대한 진노를 녹여 내실 수 있는 우주적이고 영원한 효력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Ⅲ. 죽음과 죄와 상관없이 두번째 오심(27~2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번의 완전한 희생의 역사는 불완전한 과거 OT의 율법역사 속의 사람들만 위할 뿐 아니라 주님의 구속을 힘입은 모든 사람들의 육신의 삶이 끝나는 마지막 영원의 시작에서도 더 귀중한 효력을 나타내심을 마지막으로 증거하고 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27) 죄가 범람하는 세상에 태어나 죄를 지으며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먼저 거론한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27f) 이미 앞에서 이 운명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거론한 바 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2:15)

모든 인류의 이 안타까운 죽음은 어쩌면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만큼이나 바꿀 수 없는 진리일 수밖에 없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은 하나님의 정해 놓으신 결정이기 때문에 절대로 바뀔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 “[정해진, ἀπόκειμαι, 운명으로 임하다 = ἀπό, ~에서, ~에서부터 + κεῖμαι, 눕다, 놓여 있다]” 좋은 일의 정해진 운명이라면 좋겠지만 이렇게 불행한 것도 운명처럼 정해져 있는 것이 역사요 인생이다.

사실 죽음의 원인이 죄라고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f)라 증거하고 있지만 이 육신과 영혼의 분리인 죽음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죄를 받았음에도 바뀌지 않는 운명이고 어린아이이건 청년이건 노인에게는 더욱 가까운 한번은 어쩔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인생의 과제인 것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당하는 이 운명의 행복과 비극(喜悲)은 그 다음부터이다.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27b) 하나님께서 죄 진 인생으로 하여금 죄의 결과로 오는 형벌의 고통을 정지시키기 위하여 사실 죽음을 정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창3:22) 형벌 속에 영원은 분명히 복이 아니라 저주이다.

죽음은 물론 고생이나 근심 등등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모든 안타까움이 사실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본심은 아니셨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3)

그런 이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 역사에 오심은 무엇보다도 이 비극을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증거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28f)

여기에서도 특이한 것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오셨지만 여러 번이 아니라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라 하여 여러 번의 제사가 필요치 않은 한번으로 온전한 제사를 드리셨음을 증거한 앞의 주장들을 확인하고 있다.

또 최종적인 죽음은 단순히 영육(靈肉)의 분리인 육신의 죽음이 다가 아님을 증거하고 있다. 요한계시록20:11~15에서는 보다 영구한 사람들의 운명을 거론하면서 오히려 죽어 있던 모든 사람들이 살아나 최후의 운명을 맞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역사의 마지막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인류의 마지막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도 하실 것을 증거하고 있다.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28b)

이 주님의 이 역사 속에 다시 오심을 약속하는 말씀에도 우리에게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 지구의 공중에 재림하시는 주님의 두번째 오심의 이유와 관계들을 비교적 자세히 증거해 주는 것이 오늘 메시지의 마지막 부분이다.

①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오신다. 첫번째 이 지상에 우리와 꼭 같은 몸을 입고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대속제물이 되시려고 베들레헴의 말 구유에 오셨었다. 이제 두번째 오시는 주님은 그 첫번째 오셔서 속죄제물로 죽으신 희생을 힘입어 죄를 벗고 의로워진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을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에 데리고 가시기 위해서 오신다.

②죄와 상관없이 오신다. 초림(初臨) 예수는 죄를 해결해 주시려고 오셨지만 두번째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죄를 해결 받고 더이상 죄와 상관없는 자들을 위해서 오신다. 그렇기 때문에 죽기 위해서 오시는 허약한 모습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챙겨 데려가시기 위한 영광과 위엄의 모습으로 오실 것이다.

③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오신다. 처음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받았다는 자기 백성들 조차도 몰라봤던 모습으로 오셨지만 사실은 온 인류의 사죄를 위해 오셨고 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누구든지 민족이나 종족에 상관없이 사죄의 은혜를 주셨다.

처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막연히 기대하기만 하는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었고 하늘의 움직임을 살피는 소수의 동방의 박사들뿐이었다.

그러나 두번째 오시는 주님은 자신과 이 세상의 죄를 탄식하며 회개하여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기다리며 믿음으로 자신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을 위해 오신다는 약속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두 번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이 우리들의 죄를 완벽하게 해결하시고 하나님 앞에 친히 들어 가셨다.

더 이상 다른 송아지나 양의 피를 필요로 하지 않도록 비교될 수 없는 완벽한 더 좋은 자신의 피로 한번으로 영원한 속죄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으셨다.

그 피의 효력은 아담 이후의 창조에 속한 모든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소급되어 올라가고 그리스도의 피에 자신의 죄를 씻음 받고 이 세상에 죄와 상관없는 자들을 구원하러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을 데리고 가시려고 다시 오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