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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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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0:1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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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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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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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히브리서를 세부분으로 나눈다면 바울 사도의 서신들(롬, 갈, 엡, 골 등)처럼 신앙적 가르침과 그것을 삶 속에 실제적으로 적용할 것을 당부하는 실천적인 내용과 비슷한 형태를 볼 수 있다. 1:1~4:13 천사나 모세와 비교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비교될 수 없는 위치를 증거한 바 있다.
다음으로는 4:14~10:18 지난 시간까지 나눈 중간부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의 완성자로서 완전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역할과 영원히 온전한 피의 제물로서의 완성을 논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논리로 끝나면 의미가 없기 때문에 이런 완전하신 제사와 제사장을 가진 우리가 어떻게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당부하는 내용이 오늘부터 나누게 될 실천적인 부분이다.
물론 앞에서도 신앙의 실천이 전혀 거론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예는 3:12~14, 5:11~6:12 같은 데서 중간중간 신앙의 전진을 격려한 바 있다. 특히 당시 1세기의 박해 중에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극적인 신앙으로 박해를 감당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위해 하실 일을 빠짐없이 완벽하게 이루어 놓으셨으므로 이제 공은 우리 각자에게 넘어와 있다. 즉, 주께서 행하신 엄청난 은혜를 놓치지 않고 누리면 되는 것이다. 만약에 그러함에도 놓친다면 그것은 오롯이 놓친 각 사람의 책임이 되는 것이다.
앞으로 나눌 메시지의 윤곽을 대략적으로 보면 오늘부터 v19~39에서는 신앙의 진보를 위하여 힘쓰라고 권면하고 11장에서는 믿음의 선진들의 모범을 제시한 다음 12장에서 당시 박해에 직면해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격려하고 13장에서 다른 여러가지 교훈을 함께 주면서 결론을 맺고 있다.
물론 당시의 박해아래 힘겹게 신앙하는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과는 다르게 지나칠 정도로 자유스럽게 신앙을 하는 현대인들에게 적용은 쉽지 않겠지만 박해와 자유는 환경보다 각자의 삶의 자세에서 있어지는 것이라는 데서 이 자유가 지나친 시대에도 좋은 교훈이 될 것을 의심치 않는다.
먼저는 이 10장의 나머지 부분을 3부분으로 나눠서 상고하려고 하는데 앞에서 열거한 예수 그리스도의 완료된 희생과 제사를 두고 주님의 보혈을 힘입는 백성으로서 믿음으로 나아갈 것을 권하는 내용이다.
구속받은 자의 특권과 의무를 적극적으로 나타낼 것을 권한다. 그런 다음(26~31)에는 진리에서 떠나는 자들에게 두려운 경고를 증거하고 마지막 부분(32~39)에서는 과거의 신앙적 체험을 근거로 믿음의 진보를 나타낼 것을 당부한다.
복음 속의 성도는 과거 율법 속의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비교될 수 없는 확신과 권리를 가지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한번으로 영원한 제사로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다는 특권이다. 이는 바울을 통해서도 확인하는 바이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3:12)
이런 특권을 가진 자로서 의무는 스스로의 믿음을 다잡고 빌립보 교우들에게 바울이 당부한 것처럼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2:4) 한 것처럼 지체들 서로 간에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모임에 참여를 권하는 것이다.
Ⅰ. 예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자(19~20)
여기서부터 다음 두번째 주제까지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어 거리낌없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복음 속에 성도 된 특권을 확인한다.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이방인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완전한 사죄를 이룬 복음 속에서는 OT의 율법 속에서 보다 더욱 분명한 권리이지만 이것은 이제까지 증거해 온 것처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그런 이유에서 분명한 특권이지만 자랑할 것은 없다.
이 실천편의 시작이 “그러므로” 즉, 앞에 이루어 놓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앞의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다.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18) 그러므로” 라고 붙여서 말해야 옳다.
그런 다음에 이 히브리서에서는 흔하지 않지만 마치 바울과 같은 긴밀한 당부를 할 때 그리스도인들을 부르는 표현과 같은 호칭이 사용되고 있다. “형제들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힘입어 하나님의 귀중한 자녀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표현일 것이다(3:1, 12, 13:22)).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19) 과거 율법시대에는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제사장은 오직 대제사장으로 일년에 한번 자신과 가족의 죄를 위한 제사를 드리고 그럼에도 두려움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찾았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가 드려진 후에는 그 두려움과 공포로 가려진 지성소의 휘장은 찢어지고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는 자들은 누구든지 언제든지 하나님께 나아가 만나게 되었다.
복음 속에서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은 것은 짐승의 피가 아닌 “예수의 피를 힘입어” 라고 확인하고 있다. 특히 여기 “담력[παρῥησία, 언어의 자유, 신뢰, 확신, 대담함, 솔직]”은 무엇보다도 공포나 두려움을 갖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하나 여기서 지나칠 수 없는 귀중한 확신은 앞의 내용에서는 OT의 대제사장과 예수 그리스도가 대조되었다면 여기서부터는 대제사장과 복음속의 성도들이 대조를 이루는 표현으로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대상이 “우리가”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20)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으로 영원한 제사를 완성하심으로 성소를 향하여 휘장가운데 열려진 길은 역시 “우리를 위하여” 열려진 길이라고 증거한다. 여기 “휘장”이 두번이나 쓰여지고 있는데 이 휘장이야 말로 OT의 일반 백성들이 성소를 들여다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는 경계였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한 속죄의 제사를 완성하실 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마27:51; 막15:38; 눅23:45) 이 기적은 이제 하나님과 사람의 간격을 없애 버렸다.
과거의 특정 제사장이 가능했던 것을 이제는 모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힘입는 사람들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제사장의 계급은 철폐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섬김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벧전2:9).
또 이렇게 열린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는 길은 “새로운 길”로 과거에는 없었던 길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열려진 길이요 “살 길” 즉, 생명의 길로 진리요 생명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산 길이라고 증거되고 있다.
Ⅱ.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섬기자(21~22)
OT의 성도들은 메시야를 통해 그렇게도 바라고 사모하던 온전함을 값없이 얻었다면 그 은혜에 합당하게 생명의 삶을 누리고 합당한 하나님의 제사장로서의 역할을 소신 있게 감당할 것을 권고하는 내용이다.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21) 교회의 머리이시며 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나(우리)를 위해 계신다는 확신과 자긍심이 그의 피로 사죄를 받은 하나님의 집 가족들에게는 너무나 중요하다.
하나님의 집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3:15)는 가르침을 따르면 우주적인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 이러한 본서의 논리는 이미 4:14에서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증거함으로써 하나님의 집 즉, 교회를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할 수 있다.
또 이 논리는 교회를 다스리는 일은 세상의 논리나 사람이 아니라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께 맡겨야 함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교회가 어떻게 주님으로부터 다스리심을 받을 수 있는가?’ 물을 수 있지만 그것은 막연하거나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바로 교회를 주님의 말씀과 성령께 맡기고 순종하면 된다.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는 그럴싸한 이유를 들어 법을 만들고 사람을 세우는 것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는 대제사장이라는 표현보다 “큰 제사장이 계시매” 라고 한 것인데 이것은 과거 평생동안 대제사장을 감당했던 사람과 다르게 비교될 수 없는 위대한 대제사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게 온전하신 분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믿음의 백성들이 그 주신 은혜에 합당하게 섬겨야 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22)는 것이다.
특권을 가진 사람은 그만큼 의무도 크다. 이 v22은 우리를 우리 되게 하신 은혜의 역사 두가지와 거기에 따른 역할을 권면하고 있다. 한 마디로 안밖으로 깨끗함을 받았으므로 이제는 그 역할을 바르게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이 히브리서는 다른 서신보다는 양심에 대해 가르치는 내용이 빈번하다. 9:9에서는 OT의 율법 속에서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다” 부정적인 내용이었고 9:14에서는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함을 받았다고 증거한다.
“양심[συνείδησις, (함께 보다, 이해하다)에서 유래 의식, 양심, 성실함]” 즉, ‘모든 사람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함으로서 본래 하나님을 거역하던 것에서 회복된 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를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지가에 뿌려진 희생의 피의 효력으로 가능했음을 증거하고 있고 사실 에덴에서 잃어진 양심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이 우주 안에 역사 속에 이것 밖에 없다.
바울도 이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딛1:15)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회복된 것은 속에 가진 마음과 양심 만이 아니다.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OT의 제사장들도 제사를 위한 옷을 갖춰 입기전에 반드시 몸을 씻을 것을 명령하고 있다(레16:4). 솔로몬성전-바다, 물두멍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효력을 위하여 명령한 것은 세례로 물이 어떤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5:26) 하였고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벧전3:21f)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은 속사람인 마음과 양심만이 아닌 몸까지도 깨끗하게 하셔서 우리 전체 사람으로 온전케 하신 것이다.
이렇게 완전히 새롭게 된 존재(고후5:17)가 되었으므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는 당부를 주고 있는 것이다. 참 마음은 진리에 순종 된 마음이고 온전한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는 것으로 채워진 다른 유혹의 여지가 없는 믿음을 의미한다.
또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의 영만 깨끗이 보존하라는 말보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는 전인적인 온전함을 당부하고 있다.
사실 그리스도안에 거듭났다고 하는 사람이면 이미 모두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고 또 이런 자세로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가야만 한다. 그러한 백성들로 섬기는 …
Ⅲ. 서로 돌아보아 격려하며(23~25)
지금까지 이 메시지를 자주 인용하여 격려하였지만 사실 배경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 요청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바탕하고 있는 당부인가를 알고 듣는다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주님의 권면이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23) 바울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고 증거하였다. 물론 십자가의 희생을 증거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사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대한 소망을 늘 입술로 고백할 때 각자의 믿음은 더욱 튼튼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복권 사 놓고 1등 맞아 돈벼락 맞는다고 생각하는 황당한 이론이 아니라 충분한 근거와 역사를 가진 것이다.
아담(사람)이 범죄한 후에 사람을 본래 지으신 대로 다시 생령(生靈) 즉, 죽지 않을 생명으로 회복하시겠다고 마귀 사탄을 향하여 선언하신 말씀(창3:15)을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고 계획된 순서와 시간을 따라 완성하셔서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이루셨다.
한번 말씀하신 약속을 결코 어기심이 없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미쁘시니” 라고 하였고 이 표현은 우리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는 믿음과 어근이 다르지 않다[πιστός, 믿음직한 πίστις, 믿음].
또 사람 간에도 서로의 신뢰를 계속 인정하고 고백한다면 약속을 쉽게 깨뜨릴 수 없는 것과 같이 이 역사에 마지막으로 남은 유일한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9:28b) 소망의 고백은 성도들 간에나 불신의 사람들에게 항상 해도 결코 손해날 것이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그것을 계속 입술로 고백하는 것으로 할 바를 다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함께 해야하는 자신과 서로의 과제가 있는 데 그것이 바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24)이다.
그리스도인은 먼저는 자신이 지체들에게나 교회에 할 바를 다하는 성숙한 삶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2:4)
①하나님을 향하여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졌다면 ②자신을 향하여서는 계속 소망을 고백함으로 격려하고 ③그리고 서로 지체 간에는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신앙의 삼중주(三重奏) 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가지가 조화가 될 때 바람직한 신앙이 되는 것이다.
믿음 생활하는데 독불장군(獨不將軍)은 있을 수 없다. 그런 이유에서 교회가 필요하고 서로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래서 서로 돌아보아야 하고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다르게 올바르게 살아도 격려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신앙의 사람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여야 한다.
“격려하다[παροξυσμός, 격렬한 자극(행15:39 심히 다투어)]” 단순히 ‘잘했다.’고 칭찬하는 수준을 넘어서 사랑이나 선행을 행할 수밖에 없도록 강력한 자극을 주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간이라면 신앙의 관계 속에서 이런 정도까지는 역할이 되어야 함을 권면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악을 행하고 죄를 짖도록 자극하는 것이 일반이라면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 간에는 이런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적극적인 서로의 역할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도 지체된 서로 간의 의무이다.
무엇보다도 격려해야 할 과제를 다음으로 제시한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25)
사실 믿음생활에서 모임은 기본이요 첫째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시간에 경계되는 진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배교(背敎)는 바로 모임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시작이 될 수도 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25f) 이 지적의 대상인 어떤 사람들이며 무슨 이유였었는지 언급이 없어서 분명하지 않지만 신앙적 모임에 참여치 않는 습관이 되어 있는 것은 언제나 경계되어야 할 신앙의 경종이다.
아무리 믿음이 튼튼하다고 큰 소리쳐도 또 무슨 핑계가 있든지 모임에 함께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옳지 못한 신앙의 자세이다. 오늘의 시대 상에서도 이런 모양은 반드시 경계되어야 할 자세로 시대나 장소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이러한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25b) 물론 여기 그 날은 그리스도의 재림하시는 날을 마음에 둔 표현이라는 데 이의가 없다. 성경은 주님의 다시 오심의 날에 대해 침묵하고 있지만 가까워지는 것은 분명하다.
주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 막13:32) 여기에 이어지는 경계가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막13:36)는 것이다. 특히 도적같이 임하신다는 표현을 더러 볼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각자 스스로 모임에 힘쓰고 서로 모일 것을 격려하라는 말씀이다.
우리로 하여금 지성소로 바로 들어 갈 수 있게 주님께서 완벽하게 이루어 놓은 구원을 다만 온전히 누리기만 하면 된다.
십자가의 희생으로 마음과 몸을 깨끗케 하신 은혜를 힘입어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항상 하나님께 나아가자.
믿음으로 사는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실 주님을 자랑하고 세상의 유혹에 흔들림 없이 사랑과 선행을 서로 격려하고 모이는데 게을러지려는 유혹을 물리치고 역사의 어두움이 짙어 갈수록 더욱 스스로는 채찍질하고 다른 지체들 간에 격려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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