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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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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0:32~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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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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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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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에 결코 편치 않은 경고조의 강한 교훈을 준 후에는 또 약간은 부드러운 권면으로 실천을 당부한다. 대부분 믿음에 들어온 사람들은 진리를 깨닫고 나면 온 우주를 다 얻은 것 같은 확신과 감격으로 믿음생활에 열심을 갖게 되는 것이 일반이다.
그러다가 도 어느 순간에는 열심을 잃고 뒤쳐지는 정도로 게을러 지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믿음의 상태를 지적하는 성경의 교훈들은 더러 있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 처음 교회인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도 처음 사랑을 회복할 것을 당부하여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4~5)
그런가 하면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서는 젊은 과부들의 믿음을 경계하기를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딤전5:12)는 안타까움까지 표현하고 있다. 그 만큼 처음 것은 중요함을 보는데 무엇보다도 복음을 받을 때의 시작에서의 경험은 중요하고 반드시 회복되어야 한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도 그들이 얼마나 믿음을 위해 투쟁했는지를 격려하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살전1:9)
오늘 본문의 격려도 처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위하여 싸우고 견딘 사실을 다시 회상시키며 그 처음의 순수한 열정의 믿음을 기억하고 회복할 것을 도전하고 있다.
Ⅰ. 육신적으로는 불리하다(32~34)
헬라어의 본문에는 “생각하라[ἀναμιμνήσκω, ἀνά 위를 향하여, 위로 + μιμνήσκω 회상하다, 기억하다]”는 낱말이 서두에 나타나서 강조적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일에 위로부터 생각을 정리해 오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결국 이 믿음의 진보를 감당하라는 당부에서도 위로부터 위를 향하여 판단을 정리하고 행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위로부터 거듭나야 한다고,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다고 유대의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던 니고데모에게 가르치셨지만 당시의 종교지도자였던 니고데모도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다(요3:3, 5).
위대한 신앙의 지도자요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 역시도 위로부터 난 자가 그리스도인이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같은 가르침을 준 바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이란 모든 삶의 원리를 세상의 입장에서나 형편에서 가 아니라 어떤 조건에 있던지 모든 삶의 원리를 위에서부터 풀어내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기에 서두부터 강조하는 “~생각하라”인 것이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32) 했는데 과거에 육신적으로 어려움이나 손해를 감당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진리의 빛을 받을 때를 생각해 보라는 당부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포기 못하는 이유는 ‘내가 그것을 어떻게 얻었는데!’ 라고 그것을 얻기 위해 애쓴 상황을 돌아보면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누구에게나 일반적이다.
이런 상황은 이미 앞에서도 확인한 바 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히6:4)
특히 여기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이라고 할 때 믿음을 갖기 위해 큰 손해를 감당하는 싸움을 세상이나 육신을 대항하여 하게 되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감사해야 할 이유가 된다.
특히 여기 “싸움[ἄθλησις, athletics, 경쟁, 싸움]”은 마치 승리를 위해 훈련하는 운동선수와 다르지 않다. 믿음을 위한 싸움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운동선수들처럼 그 운동선수 생활을 계속하는 한 꾸준히 계속해야 할 과제이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딤후2:5)
그러나 이 히브리서 기자는 나중에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히12:4)라고 아직은 할 만한 싸움이요 경기임을 확인한다.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33) 실제로 그리스도인 이란 이름은 처음은 비방 받는 이름이었다. 주님께서는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이러한 사실을 이미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계2:9)
여기 비방이 정신적인 어려움이었다면 환난은 육체적으로 겪는 어려움이다. 때로 그리스도인 이란 세상에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어려움을 당할 수 있는 것은 여기가 우리의 본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고후4:8~9)한다.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33) 비슷한 표현이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전4:9)는 바울의 고백 속에서도 보인다.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1세기의 고전들을 읽어보면 로마정부는 자국에 반항하는 지배국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하여 원형경기장에 맹수들을 굶기고 그 앞에 그리스도인들을 내놓아 짐승들에게 찢기게 하는 구경거리를 삼았음을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그런 사람들의 동류로 안타까움을 가지기도 했던 사실을 여기서 거론하는 것이다. 과연 오늘 이런 일이 또 있다면 그래도 믿음을 지키게 될 지 모르겠다. 뒤에 가서는 적극적으로 이런 자세를 가질 것을 당부하는 내용도 본다.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 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13:3)
여기에 이어지는 내용이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34) 본래 하늘에 소망을 가졌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땅의 소유(재산)을 기꺼이 교회에 헌납했던 것은 일반적이고 자발적인 모습이었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행2:45)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4:32)
그러나 이렇게 자발적인 것은 물론이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재산을 빼앗는 일이 로마의 박해 아래서 있었던 것은 상당히 흔한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오늘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이렇게 재산이나 가족이나 일자리를 빼앗는다면 과연 믿음에 남아 있을 수 있는지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해 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하늘의 약속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그럴 수 있음을 뒤에서 확인하고 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1:16)
이 모든 내용들을 보는 대로 믿음의 삶은 땅에서 분명히 불리함을 보게 되는데 오늘 우리가 이런 고통과 불이익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천국의 시민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이러한 도전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인 상황에서 스스로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 하늘에 소망이 확실한 사람만이 가능할 것이다.
Ⅱ. 담대함과 인내를 잃지말라(35~37)
신앙의 진보를 당부하면서 주는 두번째 내용은 확신과 인내를 잃지 말 것을 당부하는 내용으로 사실 신앙은 이 두가지를 튼튼히 지켜간다면 믿음 잃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하신 영광에 들어가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v35의 그리스어 시작은 “버리지 말라[μὴ ἀποβάλητε, = (ἀπό ~에서, ~에서부터 + βάλλω, 던지다) 벗어 던지다, 던져 버리다]”로 시작되고 있다. 무엇을 던져버리거나 벗어 던지지 말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으로 이해가 용이하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하느니라”(35) 바로 앞에서 거론 한 대로 ①“담대함[παρῥησία, 열림, 밝히 드러냄, 신뢰, 확신, 솔직]” 결국 확신을 던져버리지 말라는 도전이다. 믿음은 다른 말로 확신이며 그것 때문에 담대함이다. 이것이 없이는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이미 3:6에서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고 확인한 바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입은 예수 그리스도를 벗어 던지는 하나님의 자녀됨을 포기하는 것이다.
②“인내[ὑπομονή, 견고히 섬, 확고부동, 기대, 기다림, 6:13~20 11:13]”를 던져버리지 말라는 당부가 그 두번째이다. 믿음의 또 다른 별명은 인내이며 성령의 열매로 서도 오래 참음이다. 믿음의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7)는 성격을 본다.
모범적인 교회, 소문난 교회인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도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살전1:3) 같은 칭찬을 주고 있다.
이 인내의 덕목은 NT성경의 서신들에 수없이 당부되는 내용이다. 이 히브리서에도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6:15) 하였을 뿐 아니라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12:1b)
바울 사도도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격려하고 있다.
다시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8:25) 당부하고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15:4)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였던 야고보 역시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3) 격려하고 있다.
결국 이 확신과 인내가 “…이것이 큰 상을 얻게하느니라”고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하늘에서 주어지는 믿음의 상을 얻게 한다고 약속한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36)
하늘에서 받는 상은 이미 믿음에 약속된 것이기 때문에 다르지 않고 다만 여기 “하나님의 뜻”이 본문에서는 믿음의 사람들의 담대함 즉, 확신으로 사는 것과 모든 박해를 이기고 마지막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v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는 두가지로 이해된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37) 이 내용은 난외주에 기록된 대로 하박국2:3의 인용이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오늘 본문에서는 “잠시 잠깐 후” 라고 하였지만 원문에서는 “속히 이르겠고,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기록되고 있다.
OT에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실 이, 즉 메시야를 기다리며 살았고 복음 속에 고난과 환란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 이 히브리서를 받는 그리스도인들 뿐만 아니라 로마의 포학한 박해의 아래에서도 오로지 기다리는 성도들의 기대였었다.
오늘 같은 믿음을 가지고 신앙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다르지 않다. 이 땅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기대요 믿음의 사람들의 소망하는 상급일 것이다. 재림이 더딘 것 같지만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자.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의 약속이 헛되지 않기 위하여 담대한 확신과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서로를 격려하는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Ⅲ. 믿음에 후퇴는 안된다(38~29)
앞에서 하박국 선지자의 2:3의 내용을 인용하여 확신과 믿음으로 박해를 이기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언약이 헛되지 않도록 할 것을 당부한 저자는 다시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는 말씀으로 당부를 주면서 결코 믿음의 뒷걸질이 되어서는 안될 것을 다시 도전한다.
믿음의 후퇴를 경계하는 완고한 표현을 여기에서는 두번씩이나 부정적으로 “뒤로 물러가면, 뒤로 물러가” 표현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쉽게 자전거 타는 것에 비유한다. 특별히 훈련받은 사람이 아니면 자전거는 앞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반드시 넘어지고 만다는데 착안해서 그렇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38) 했는데 여기 그냥 의인이 아니라 나의 의인은 한 것이 독특하다.
바울 역시 두 곳에서 이 하박국2:4을 인용하고 있지만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갈3:11)고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히브리서 저자는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게 이해하든지 여기 “나의 의인” 주님께서 인정하실 의인으로 이해한다. 주님께 소유가 된 사람이라야 믿음으로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38b) 후퇴를 기뻐하는 교사나 주인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훈련하고 가르치는 것은 성장과 전진을 위한 것이지 결코 후퇴를 위해 매진하는 주인이나 스승은 없을 것이고 모든 것을 다 투자하고 분명함 승리의 근거를 가지고 있는데도 뒤로 물러가는 결코 기뻐할 대상은 없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김은 이미 보장되어 있다. 스스로는 죄성(罪性)을 가진 연약한 존재들이지만 그 유약한 존재로 천로역정의 길을 가도록 버려 두지 않으시고 성령과 말씀을 통해서 완전한 진보와 승리를 확보해 주셨기 때문에 그럼에도 후퇴한다면 그 사랑과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이므로 기뻐하실 수 없다는 말씀이다.
그런 이유에서 바울은 영광의 부활을 확신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7) 라고 사망의 저주를 향하여 선언하고 있다.
다만 이 서신의 수신자들을 향하여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35) 하였던 저자는 이제 구원에 대해서는 자신을 포함한 고백을 하고 있다. 이런 확신에 찬 같은 고백이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39) 즉,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살피고 지나야 할 한가지는 “영혼[ψυχή, 목숨, 생명]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 라는 표현이다. 구원함에 대상이 영(靈)만이 아니요 육(肉)만도 아닌 영육을 모두 포함한 전인적인 구원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표현이 복음서에서도 누가가 사용하고 있는 내용을 볼 수 있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눅17:33) 이러한 표현은 다분히 육신의 생명이 연결되어 있지만 구원은 영(πνεῦμα)에 국한되지 않은 육신(σάρξ)이거나 영육의 전 인격적인 구원을 가르치는 것이 성경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이어야 한다.’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언제나 하나님 앞에 전 인격 즉, 전인적인 구원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영만 깨끗이 보존된다는 영지주의 이론은 문제가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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