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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11:4~7 2022-09-04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믿음이 어떤 것임을 정의(定義)한 저자는 이제는 그 믿음을 사실적으로 삶 속에 실천하며 살았던 믿음의 조상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거론하기 시작한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우는 아브라함을 중심하여 각각 다른 형태의 하나님의 순종의 모습이지만 믿음으로 살았던 그들의 삶을 돌아보면서 오늘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가장 먼저는 이 지구환경이 지금처럼 바뀌기 전의 세사람을 거론하지만 역시 그들을 통해서 보는 특징들도 각자 독특한 것을 증언하고 있다. 먼저 아벨에게서 보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제사 즉, 예배에 자신의 첫 것 귀중한 것을 드리는 자세에서 그렇다.

물론 이 가인과 아벨 두사람은 믿음의 계열인 이스라엘의 족보에도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이다. [가인, 에녹,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 야발(유발, 두발가인) 7대는 이스라엘이 귀중히 여기는 족보에 올라있지 않다. 물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잃어진 이들에게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의 딸들이 나왔을 것이다(창6:1~3).

두번째 에녹에게서 보는 것은 일상(日常)을 하나님과 임마누엘을 사는 현재의 삶의 귀중성을 배우게 된다. 하나님과 동행은 과거에나 미래가 아니라 항상 현재적으로 함께 하며 기쁘시게 하는 것이야 말로 산 제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노아를 통해서 보는 것은 볼 수 없는 미래를 약속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오늘 내가 영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준비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배운다. 앞에서 믿음의 정의에서 이미 본 대로 믿음이란 과거가 아니라 미래지향적이고 소망 적인 삶이라는 데서 비록 오늘 보이지 않고 경험하지 못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완성된 나라에 대한 확신과 기대로 현재속에서도 그 때를 기약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 노아를 통하여 보여주는 믿음이다.



Ⅰ.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음(4)

성경이 언급하는 최초의 제사였고 그럼에도 한 사람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으셨고 또 다른 제사를 받지 않으신 차이를 증거하면서 그것이 바로 믿음과 믿음 없는 차이로 “더 낳은 제사”로 비교되고 있다. 이 내용은 창세기4:3~5의 기록을 볼 수 있고 믿음의 유무는 인용된 본문에서는 볼 수 없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하나님을 섬김에 대하여 나중 솔로몬을 통한 당부이지만 이 첫 제사에서 벌써 그 이유를 볼 수 있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잠3:9) 재물과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라고 할 때 무엇이든 첫 것이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4f) 앞에서 보는 대로 인용되고 있는 본문(창4:3~5)에서는 가인과 아벨은 자신들의 기르는 소유들 중에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 것으로 만 기록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 히브리서의 기자는 동생인 아벨이 형인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는데 그것이 믿음으로 드렸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이해가 쉽지 않다. 단순히 제물을 비교하여 “더 나은[πλείων, 더 많은, 더 큰]” 것으로 대조하는 것도 그렇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를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라는 표현도 흔치 않은 내용이다.

그럼에도 이 내용속에 놓일 수 없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를 드려야 의롭다라고 인정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결국 앞에서 계속 거론해온 짐승의 제사와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제물로 삼으신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바울이 역시 지적하는 내용을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는 기록을 본다.

인간적으로 무엇을 드림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한 희생제물로 십자가에 드려졌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율법 속에 수많은 짐승의 제사를 드리는 행위들은 하나님께 인정받는데 무효함을 그대로 증거하고 있다.

사실 이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의 육신의 후예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원리를 설명한다면 역시 갈라디아서는 이방인들에게 같은 이치를 가르치고 있다는 데서 다르지 않은 논리를 해설하고 있음을 볼 뿐이다.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4m) 하나님께서 드린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셨다는 사실도 인용된 본문에서는 사실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분내는 가인에게 책망하시는 내용이 연이어지고 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6~7)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4b) 결국 두 사람이 함께 들에 있을 때 가인은 아벨을 쳐죽이고 만다. 그러므로 아벨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를 드린 것으로 죽임을 당한 최초의 예배자인 샘이다.

그리고 그 죽음은 헛된 죽음이 아니라 모든 역사 속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누구보다도 오늘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나)에게 “예배를 드리는 데는 이렇게 목숨을 바쳐 드려야 하는 것이란다.”라고 소리가 아닌 행동으로 삶으로 계속 증거하고 있는데 이것은 과거가 아닌 영원히 현재적인 증거로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말하느니라[λαλεῖ ← λαλέω, 직설, 현재, 능동]”

창세기4:10b에 보는 대로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말씀은 이것을 대변해 주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각자가 가진 최고의 가치인 생명을 드릴 각오로 예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할 수 없다고 아벨은 오늘도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Ⅱ.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짐(5~6)

이 세상에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바로 하늘로 옮겨진 사람을 엘리야와 더불어 에녹을 성경은 분명하게 거론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사흘을 계셨지만 부활하신 후 그의 제자들 모두가 보는 데서 하늘로 올리어 가신 것이 절정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피조세계를 다스리게 하심이 그 첫째였지만(창1:28) 때때로 에덴동산에 거니셨던(3:8) 기록을 보이는 것으로 볼 때 바로 에녹과 같이 함께 동행하시기 위해 즉, 교제하시기 위해 지으셨던 것으로 이해할 때 에녹은 범죄 후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최초로 합당한 삶을 산 사람이라고도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인용된 내용은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5:21~24)는 기록이다.

여기 원문의 독특한 두가지를 언급하는 것이 좀더 바른 이해를 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그 첫째로는 여기 에녹의 기록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더니[הָלַךְ(halak) to walk, 가다, 오다, 걷다]”라는 표현이 연거푸 두번이나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걸음걸음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삶을 의미하는 데서 예배만이 아니라 모든 삶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았다고 확인된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b). 말씀의 확인이다.

두번째로는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창5:22)라는 기록이다. 당시의 홍수로 멸해야 할 정도로 죄악 된 세상에서 범죄의 가능성이 없는 어떤 곳에서 특별한 삶을 산 것이 아니라 므두셀라를 낳은 것을 비롯해서 300년 동안 자녀를 낳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기록은 생업이나 가족관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신앙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이유를 핑계하기를 ‘가족이 딸리고 이 세상에서 자녀를 뒤지지 않게 키워야 하기 때문에 나 혼자만의 삶이 아니 라서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다.’라고 쉽게 변명하지만 에녹을 보면 감히 그런 변명을 할 수가 없다.

그것도 우리의 평생이 100년도 안되지만 에녹은 300년간을 그렇게 수도원이나 구별된 장소가 아니라 계속 사회와 세상 속에 오늘 우리와 같이 가족과 함께 살면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인데 당시에 사람들의 연령이 900세를 넘게 살았던 시기였다.

그렇다면 당시의 평균 연령의 ⅓밖에 살지 못했지만 누구보다도 인생의 기간을 영원으로 넘어가는 귀중한 삶으로 채운 복된 사람이다. 이런 입장에서 꼭 오래 사는 것이 복이 아님도 생각하게 한다.

적어도 본문 v5~6이 에녹에 관한 기록이지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6f) 라는 귀중한 믿음의 원리를 제시하는 참으로 귀하고 복된 신앙의 사람들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5f) 성경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라는 기록으로 볼 때 분명이 죽음이 죄의 대가였지만 에녹은 그 죄의 대가인 죽음의 저주를 맛보지 않고 바로 영원으로 옮겨진 복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같은 원리에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함께 삶으로 이미 그 죄를 해결 받은 사람이라는 공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물론 완전한 사죄는 역시 역사의 중심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죄를 이미 당겨서 산 사람이라고 해야 옳을 것(9:15)이다.

문장형식이 도치법 형식이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를 하반절에서 말해주고 있다.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5b)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빠져나와서 약속의 땅으로 이끄시는 하나님과 광야길을 동행하면서 수없이 하나님을 진노케 하였다.

그 결과 이집트를 나왔던 20세 이상의 장정 60만명이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모두 광야애서 엎드러져 죽고 말았다. 사실 죄성(罪性)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할 수 없는 것이 검증된 샘이다.

그럼에도 에녹은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5b) 함으로써 그냥 동행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하나님과 함께 걸은 300년 동안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먼저 함께 걷기 위해서는 가려는 방향이 같지 않으면 함께 동행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아모스 선지자를 통하여 증거하신 바 있다.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암3:3) 그러므로 에녹의 의향이 하나님의 가지신 뜻과 300년동안 다르지 않았다는 이해를 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광야 40년간 한번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 적이 없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들이 수없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기록이 분명히 남아 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한번도 제사를 받으신 적이 없으시다고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탄식하고 계신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암5:25)

신약 교회가 탄생한 후에 스데반을 통하여 다시 이 일을 확인하신다.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행7:42b)

그러므로 적어도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한 300년간 자신의 의향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맡겨드렸다는 이해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었고 그것이 바로 믿음이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6f)

그러한 자세를 오늘 우리에게 제시하는 믿음을 연이어 가르친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6b)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반드시 믿어야 할 두가지를 지적한다.

①“반드시 그가 계신 것”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살아 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분께 나아갈 수 있겠는가!

②“상 주시는[μισθαποδότης, (μισθός 품삯, 임금, 보상) + (ἀποδίδωμι, 돌려주다, 갚다, 보상하다) 삯을 지불하는 자, 보상자, 보응자]”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7) 약속하셨다.

바울이나 요한 사도 모두 다르지 않게 증거한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2:6)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것에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 약속하셨다(마10:42; 막9:41). 사람에게 속고 떼이고 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대가를 잃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확신하는 것이 곧 믿음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6f)라는 약속이다. 이런 이유에서 믿음이 귀한 것이다. 앞에서 에녹과 같은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길 수 없고 당연히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삶도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 우주에 있는 모든 것들과 산천(山川)에 있는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기 때문에 무엇을 그분께 드려서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보다도 동행하기를 가장 원하신다는 사실이다. 주님은 우리의 삶에 그대로 동행하시기를 원하신다. 믿으시기를…



Ⅲ. 의의 상속자가 됨(7)

앞의 두 사람의 믿음이 현재 즉, 지금을 하나님과 함께하는 제사와 동행하는 삶이었다면 노아에게서는 믿음의 특성이라고 하는 보다 미래적인 일에 대한 경고를 그대로 받아들여 가족과 더불어 심판을 면하고 샛별처럼 빛나는 믿음의 영웅으로 의의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다.

당시 노아에 대한 믿음의 평가를 보면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6:9) 의인이라 표현하고 있는가 하면 에녹과 같은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 역시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라고 증거하고 있다.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도 OT의 의인 3사람을 꼽으면서 그 중에 노아를 포함하고 있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14:14, 20)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7f) 공의의 사람이라고 하는 이 노아에게서도 시작이 “믿음으로”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들의 시작은 한결같이 믿음으로인 것이다. 그것은 삶이든지 일이든지 논리 이든지 그 시작은 믿음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배우고 보고 해온 것이라면 문제가 아니겠지만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확신은 이미 상황이나 논리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하려고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믿음의 문제는 전혀 경험되지 않은 것들을 주문하고 하라고 하는 것이 믿음의 과제이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는 이미 다른 많은 사람으로 경험하고 확인된 사실을 당부하시는 것이라는 데서 확신을 가지고 감사로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바로 노아가 그런 모범이다. 그런 모범이 없었던 시대의 사람들도 순종하고 받아들여 약속을 누렸다면 오늘 우리는 이런 엄청난 믿음의 선진들을 가지고 있다는 데서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홍수 이전의 지구상태에서는 지금과 같은 환경재해로 엄청난 비가 쏟아지는 경험도 큰 배를 지어본 경험도 없었지만 노아는 오로지 말씀하신 언약을 신뢰함으로 이 일을 준비하고 감당함으로 당시 죄가 관영 한 지구는 물로 심판을 받게 되었다.

순종으로 구원된 노아는 앞의 에녹이 자녀를 낳으며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것처럼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라는 결과를 볼 수 있고 역시 가족을 구원한 것으로 가족의 경건을 이끌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렇게 한 의로운 가족의 구원이 불신의 사람들에게는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7b)는 상반된 결과를 가져왔고 이제 불로 태우기 위해 예비된 지구의 미래도 다르지 않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죄인 된 너를 구원하기 위하여 나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준 것처럼 너의 생명을 나의 언약과 영광을 위하여 아벨처럼 바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증거하신다.

세상에서 이익처럼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에서뿐만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나님과 딴 살림처럼 살지 말고 “에녹처럼 동행하며 살자!” 당부하신다.

이제 이 지구는 노아의 때와 동일한 말씀으로 불태우기 위해 준비되(벧후3:7)어 있는데 각자가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기 위하여 노아처럼 경험하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바를 순종하여 믿음의 언약을 누리는 믿음의 삶이 되라고 당부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