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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11:8~12 2022-09-11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의 장이라고하는 이 히브리서11장의 중심 인물은 당연히 아브라함이고 앞서 소개한 홍수 이전의 세 사람들보다는 구체적인 삶의 기록이 직접 쓰이고 있는 데서도 아브라함은 믿음의 모범으로 좀 더 사실적이다.

그의 인간됨이 너무나 사실적이고 다른 사람 못지 않게 흔들린 것도 사실이지만 현재보다는 미래적으로 되어질 사실을 당겨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아직 열국의 아버지라고 하는 아브라함이 되기 전부터 이미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공의로 여기시고”(창15:6)라는 기록으로 확인하게 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만나심에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이 나타나기까지 이집트를 탈출한 광야에서부터 가나안에 들어와 나라를 완성하기까지 수많은 허약한 인간됨의 모습들을 거쳤던 것처럼 아브라함 역시 그런 부분들을 성경은 숨기지 않고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신대로 이름값을 하였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셨다면 결코 불가능했겠지만 결국 아브라함의 아브라함 됨을 감당하는 것을 보면서 오늘 모자라고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 자신들에 대해서도 긍정할 수 있는 기대와 소망을 갖게 된다.

오늘 다루는 내용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갈데아 우르 자신의 고향을 떠나면서 아직 정해 주시지 않은 목적지를 알지 못하는 곳을 향해 나서는 것에서 최종적으로 이끄실 때까지 생소한 문화와 사람들 가운데서 나그네의 삶을 감당한다.

후손에 대한 약속 조차도 그들이 가야할 방향만큼이나 분명치 못했지만 그럼에도 약속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의지함으로 전혀 불가능한 것 같은 입장이었지만 역시 언약대로 이삭과 야곱을 얻어 하나님의 약속이 보다 구체화되어 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어쩌면 오늘 우리가 나아가야할 믿음의 삶의 모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혈연의 가족들의 보호보다는 아직 눈으로 확인한바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가는 이 땅에서의 나그네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적어도 아브라함에게 보다는 더 구체적인 천국을 향해 천로역정의 길을 가고 있다는 데서 그렇다.

오늘도 신앙한다고 하면서 아브라함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휘청거리는 우리의 연약한 모습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받으셨음을 감사하면서 오로지 되어질 보다 바람직한 우리 자신들을 확신하면서 하나님의 언약하신 천국에 들어가기까지는 아브라함처럼 훈련할 각오를 다짐하며 결심하는 …



Ⅰ. 갈 바를 알이 못하고 나아감(8)

하나님께서 창세기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말씀이 오늘 말씀의 시작이지만 이 그가 부르심을 받은 내용은 구체적이지는 못하고 오늘 인용된 내용은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신 부르심에 순종한 것에 무개가 있다.

즉,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라는 짧은 내용은 하나님의 선택의 시작에 불과하고 어쩌면 오늘도 신앙하는 사람들의 시작은 대부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어디에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은 그의 믿음을 인정하신 15:7에서 비로소 확인된다.

이미 가나안 땅에 들어와 그곳을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언약하시면서 다시 확인을 하신다.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창15:7)

일단은 이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자체가 새로운 삶의 도전이고 쉽지 않은 인생의 과제이다. 아브람으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창세기11장 말미에 보는 대로 아브람은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고향과 친척은 떠났지만 아버지를 떠나지 못하여 하란에까지 아버지와 함께 움직였고 아버지 데라가 세상을 떠나서야 비로소 유브라데 강을 건너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오늘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같은 갈등과 방황을 하면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나서야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려는 우리 자신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있다면 영적으로 그보다 더 큰 복은 없을 것이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은 세상에 어떤 것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믿음으로” 뿐이다. 그것은 과학처럼 어떤 사실을 확인하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분명히 보장하시는 곳이긴 하지만 우리 가진 다섯개의 감각기관 중 어떤 것으로도 확인되지 않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는 것이다.

사실 그래서 믿음의 과제들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에는 아직 어떤 사람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처음으로 시작하는 아브라함이 그런 입장에서 인정받고 존경 되는 것이다. 또 이왕에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서의 믿음의 후예가 되려면 역시 아브라함을 본받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Ⅱ. 장막에 거하였다(9~10)

우리 시대의 노래에도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어’라는 로망은 젊건 나이가 들었건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 가져보는 꿈일 것이다. 그럼에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이런 것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의 이유를 “믿음으로… 장막에 거하였으니”는 말씀을 읽게 된다.

이스라엘의 남쪽 유다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갈 즈음에 나타난 독특한 기록 하나를 예레미야35장에서 보는데 조상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유전을 그의 자녀들이 철저하게 지키고 있던 한 가문을 소개하고 있다.

“그들이 이르되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노라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너희가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소유하지도 말고 너희는 평생 동안 장막에 살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머물러 사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 하였으므로”(렘35:6~7)

그럼에도 하나님의 계명을 수없이 어기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게 되어 있는 유다의 운명과 비교되는 내용을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자손은 그의 선조가 그들에게 명령한 그 명령을 지켜 행하나 이 백성은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도다”(16)라는 탄식으로 볼 수 있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9f)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유브라데 강을 건너 “아브람이 …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5~7f) 하여 가나안을 그와 그 자손에 주실 것은 약속 받는다.

그럼에도 보이는 모습 속에서는 아직 가나안 사람들이 주인이고 아브라함은 나그네로 그대로였지만 분명히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음에도 주인 된 땅에서 나그네로 거류하였다는 말이다. 이것조차도 인간적이고 육신적이었다면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도 “믿음으로”였기 때문이라고 증거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 곳이 너의 땅이다.” 언약을 받았지만 이방 땅에 있는 것 같이 살았다는 말이다.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9b) 아브라함의 믿음의 모범적인 면은 여기에서도 볼 수 있다. 즉, 그의 어렵게 얻은 이삭과 손주인 야곱에게도 당시에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자신과 같은 나그네의 삶을 살게 한 것이다.

좀더 긍정적으로 이 말씀을 역(逆)으로 이해하면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면서도 자신과 같은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도록 같은 믿음을 끼쳤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과 다름이 없는 믿음을 갖도록 키웠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10) 이것은 자신은 물론 자식들에게까지 나그네로 장막에 살게 한 근본적인 이유를 말하고 있다. 또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믿음의 삶을 사는 궁극적(窮極的)인 이유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서 지금처럼 편리하고 좋은 문명을 누리는 사람들은 ‘이제 돈만 있으면 뭐든지 가능하고 행복할 수 있다.’고 쉽게 말들 한다. 그럼에도 하늘의 백성들은 아무리 좋고 편안해도 이 세상에 최종적인 가치를 둘 수 없는 사람들이다.

땅에서는 아무리 편안하고 좋은 것도 시간이 지나면 만족의 가치는 점점 떨어진다. 그것이 육신을 가진 사람의 이 땅에서의 평안이고 행복이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 편리하고 더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육신을 가진 사람의 욕망이고 탐욕이다.

왜냐하면 범죄한 사람이라는 동물이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반 동물과는 또 다르게 육신이 계속적으로 만족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특별한 구조 중의 하나인 영혼이 만족하지 못한다면 결코 만족을 모르는 것이 영육(靈肉)의 이중 구조를 가진 사람만의 특징이다.

그럼으로 사람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이나 심지어 사람조차도 만족을 줄 수 없다. 결국 사람의 영육(靈肉)을 만족시킬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는 없다. 그렇다면 사람의 영육(靈肉)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존재는 없는 것일까!

있긴 있는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떤 존재인가? 그것은 바로 사람을 이런 구조로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의 구조를 가장 정확하게 아시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게 만족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도 하다.

예수께서 부자청년이 구원의 길을 가르치심에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돌아가고 마는 것을 보시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3~24) 하신다.

그러자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마19:25)라고 난감한 반응을 보이자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19:26; 막10:27; 눅18:27) 말씀하신다.

이런 물질적인 원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죄를 가진 사람은 절대로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최종적인 사람의 만족은 죄를 해결 받는 것이다. 다윗을 통한 이러한 메시지는 자주 인용한 바 있다(시32:1~2; 롬4:7~8).

그러므로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10)는 기대는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 하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에 친히 마련하신 새 예루살렘을 기대하는 믿음이었다는 말이다.



Ⅲ. 생산이 불가능하였으나 생산(11~12)

성경은 부부를 한 몸이라고 표현한다. 아브라함을 택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래도 이름을 바꿔 주시며 열국의 어머니로 사용하신다. 그럼에도 사라 역시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깊이 신뢰하지 못했지만 남편과 함께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 열국의 어머니로 되어 감을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을 후손들에게 그들의 유업으로 주시겠다고 언약하시는 하나님의 이끄심에 그보다 중요한 것이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할 후손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유업보다 중요한 것이 그를 통해서 날 자손이었다.

그럼에도 가나안에 들어온 후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자손은 없어 인간적인 시도를 해서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언약을 이어갈 후손이 아닌 의외의 아들을 얻기까지 한다. 이제는 부부가 다 생산이 불가능한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자 그제서야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엉뚱한 약속을 주신다.

거기에 대한 반응은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 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17:17~18)라는 반응이었다.

애기를 낳아야 할 당사자인 사라조차도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18:12) 이 말을 좀 사실적으로 이해해 본다면 ‘그러실 거면 좀 젊어서 주시지 이제는 틀렸습니다.’라는 투의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롬4:19) 라고 그래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증거하고 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11f) 이것은 사실적이고 자연적인 평가로 생산의 불가능한 상태를 그대로 묘사하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여기의 “믿음으로”라는 말씀은 이 불가능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뒤에 이어지는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11m)에 연결됨으로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라는 형식의 문장 구조를 본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한 이유를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11b)는 신뢰를 덧붙이고 있다. 사실적으로 믿음은 앞에서 이미 봤던 대로 현재는 보이지 않는 가능성에서도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한 믿음의 내용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1)라고 하였다.

어찌 보면 사라는 물론 하갈을 통한 이스마엘의 탄생을 제외하고는 아브라함에 의해서 움직였고 그런 입장에서 내년 이맘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0)는 천사의 말에 사라가 장막 뒤에서 웃기는 하였지만(창18:12) 정작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을 때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21:6)라는 고백함을 듣는다.

그러므로 사라의 믿음도 사실에 있어서는 그를 함께 하나님께로 이끌었던 아브라함이 주도했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잉태할 수 있는[εἰς καταβολὴν σπέρματος] 힘을 얻었으니”라는 표현이 여성이 아니라 남성형으로 쓰여진 데서 더욱 그렇다.

또 여기 “힘[δύναμις]을 얻었으니” 할 때 사람의 가능성을 표현하기 보다는 주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고 있다.

사실 믿음도 주체가 강권적으로 이끌어가고 그 바른 이끌림을 받을 때 모두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기 때문에 교회나 가정 모두가 분명한 기준과 바른 인도가 필수적인 것을 이스라엘의 생성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가정에서부터 배우게 되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역사는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12)는 결과를 가져왔다. 믿음의 역사는 언제나 역사 속에서 이러하였다.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12f) 결국 사라에게 갔던 이야기는 그를 믿음으로 이끈 아브라함으로 되돌아온다. 항상 이 역사 속에 하나님의 역사는 이러하였다. 가장 대표적으로 거론할 수 있는 분이 역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롬5:17b)

그런 입장에서 언제나 많은 다수의 사람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한사람이 필요하다. 나중 야곱의 후손들이 이집트의 탈출 후 국가가 된 때에도 그러했고, 여호수아와 사사들 모든 역사 속에서 바로 이끌어 간 한 사람이 모든 소망 없는 죽은 것 같은 상황에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감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오늘은 어떨까 생각하면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은 멸망해가는 유다와 예루살렘에서도 한 사람을 찾으셨던 것을 볼 수 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렘5:1)

하나님께는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으시다. 믿음을 가진 한사람이 필요하고 오늘 우리 각자도 그 한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 한사람으로 남아야 한다. 그 한사람만 있으면 그 한사람만 남으면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12b)는 역사는 계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어설플지라도 즉각적인 순종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땅에 나그네로 살아가는 동안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믿음을 키워갈 필요가 있다.

우리 각자는 사실 영적으로는 죽은 자와 같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믿음으로 변화 받은 한사람을 통하여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에 모래와 같이 번성할 수 있다.

오늘 우리 각자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생명의 씨앗으로서 한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 온전히 순종할 때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