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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11:13~16 2022-09-18
그들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홍수전의 믿음으로 살았던 세 사람과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받는 아브라함 가계(家系)를 거론한 저자는 이제 그들은 한결 같이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면서 진정으로 사모하는 돌아갈 본래의 영원한 고향을 사모하며 살았음을 증거하고 있다.

사람들은 명절이 되거나 특별한 날에는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면 누구나 가지는 향수인 것 같다. 비록 그곳에서 잘 먹지도 못하고 보리고개 같은 핍절함이 더 많았던 아픈 추억을 가지면서도 그곳을 그리워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 거의 예외가 없다.

그럼에도 이 육신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만큼 그곳에 다시 돌아가 살아야겠다 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비율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우리 연령의 사람들은 그 과거의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영적인 사람들은 여기 쓰여진 표현을 빌리면 고향이 두 곳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처럼 그가 나온 육신의 고향인 갈데아 우르가 한 본향이었다면 영혼의 고향 돌아가야만 할 본향을 더 바라고 기대하며 주어진 나그네의 삶을 살았다고 증거한다. 오늘 길지 않은 본문에서는 본향이라는 말이 3번이나 거론되고 있다.

모든 사람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영원한 거처인 천국을 사모하는 것에서 비롯된 육신적인 표현이다. 그럼으로 이런 이치를 정확하게 아는 믿음의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두려움이나 거리낌이 없음을 볼 수 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야곱을 들어 증거하고 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21)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들이 비록 땅에서 나그네로 살지만 다시 이사할 필요가 없는 영원한 집, 이 땅에 어떤 고향보다도 화려한 궁전보다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직접 설계하시고 지으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일평생을 하나님의 성전에서 찬양하던 고라의 자손들은 이 사실을 찬양하기를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0) 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죄인으로 이런 기대조차도 잃어버렸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희생으로 그 영광을 찾아 주신 사실에 감사를 가지고 바울처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2) 그곳에 들어가기 위한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Ⅰ. 본향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였다(13)

이렇게 오늘 복음 속에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는 우리와는 다르게 OT의 믿음으로 산 조상들조차 막연히 이 같은 영원에 대한 소망을 품고 바라보는 정도에서 오로지 후손들에게 라도 이런 영원을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태어나면 죄로 인하여 사람은 죽게 되어 있는 것이 이미 앞의 9:27f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어떤 사람도 거절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거론된 믿음의 사람들은 그냥 죽고 끝난 것이 아니라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라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절망하는 인류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소망은 바로 이 세상에서 난 것이 아닌 하늘로부터 주어진 믿음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편에서 엄청난 희생이 치뤄진 결과라고 자주 말하고 있다. 어찌 보면 하나님의 자존심조차 손상을 입으시면서 영원한 저주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이왕에 사람은 죽는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믿음을 따라 죽었다는 것으로 이것은 다른 표현으로는 ‘하나님의 언약안에서 죽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하나님의 생명안에서 죽었다면 언제인가는 반드시 살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이 역시 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사실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4:16) 이렇게 깨어날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는 자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바로 앞에서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살전4:13~15)고 말하고 있다.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이 사실이 오늘 복음 안에 있는 우리보다 결코 앞서지 못한 과거 율법 속에서의 믿음의 선진들이다. 우리에게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또,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라는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고 증거 하심으로서 이 사실을 확인해 주신 바 있다.

창세기49:18에서 야곱도 죽기전에 자신의 12 자녀들을 모두 불러 놓고 유언하고 축복하면서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라는 의미 깊은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OT의 믿음의 선진들은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이렇게 후대에 이루어질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환영하고 기다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환영하고 기다리던 구원을 오늘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확신과 믿음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에 있던지 거기가 자신의 삶의 영원한 거처라고 생각지 않고 기꺼이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늘 그들과 다르지 않은 믿음을 가진 우리들에게 도 바울이나 베드로 사도는 이를 확인시키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3:20)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

복음속에 더욱 분명해진 하나님 나라의 약속, 그것은 우리의 생각 속에만 있어서는 안되고 비록 나그네와 같은 이 땅에서의 삶에서부터 OT의 믿음의 선진들보다 더 나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다.



Ⅱ. 본향을 찾는 자들로 살았다(14~15)

그들이 그렇게 살았던 이유를 분명히 하고 있는 내용이 두번째 다루는 말씀이다. 이들이 돌아가고자 하는 분명한 고향이 있었고 자나깨나 돌아가고자 하는 고향이 그곳이었으며 그곳은 결코 육신이 나온 세상에 속한 곳이 아니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14)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이삭이나 야곱이 자신이 사는 곳의 사람들이나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지나가는 나그네임을 쉽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다른 세상의 거처(居處)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영원한 거처로 돌아갈 것을 바라고 사모하는 사람들임을 인식하며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두 곳의 예를 들면 먼저는 아브라함이 가나안 헷 족속에게 자신의 아내 사라의 매장지를 팔라고 하는 과정에서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네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창23:4) 하였고

두번째는 야곱이 가나안에 있었던 기근으로 요셉의 초청으로 이집트의 바로 앞에 서서 하는 고백이다.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짧고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47:9)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던 그렇지 않던 믿음의 조상들의 한결 같은 믿음의 고백은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내었다는 것이 믿음의 귀중성을 증거하는 이 히브리서 기자의 평가인 것이다.

물론 여기 쓰여진 “본향[πατρίς ← πατήρ(아버지, 조상) 조국, 고국, 고향]”은 땅에서는 앞에서 거론한 데로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하신 것으로 육신의 뿌리를 떠나지 못하면 영원의 고향 즉, 하나님께서 보여 줄 땅으로 가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육신의 본향을 떠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거듭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하는 니고데모 조차도 이를 육신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3:4)라는 엉뚱한 질문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기꺼이 육신의 본향을 떠난 자에게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5:1)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15)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사람들이 찾고 돌아가려고 하는 본향이 결코 이 육신의 고향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는 말씀이다.

실지로 가나안에 들어오자 얼마되지 않아 기근이 들어 아브람 가족이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과 그의 아내를 누이라고 하라고 한 사건이 아직 온전치 못한 믿음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낯선 곳에서 만난 어려움을 더 쉽게 해결하려고 했다면 자신의 친척들이 살고 있는 그들의 나온 바 고향인 갈데아 우르로 돌아가는 것이 더 쉬운 선택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람은 나온 고향이 아닌 가나안 보다 낯선 이집트로 내려 간 것도 이런 것을 생각한다면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험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이삭을 결혼시키려는 때에도 그러했다.

아브라함이 나이 많은 종에게 자신의 허벅지 밑에 손을 넣고 맹세를 시킨다.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의 처자들 중에서 이삭의 아내를 택하지 말고 자신이 나온 고향으로 보내며 신부감을 데려올 것을 부탁하기 위해서이다(참24:1~4).

그러자 이 아브라함의 종이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이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5) 묻는다. 거기에 대해 아브라함은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6)는 단호한 답변을 한다.

자신의 자녀들조차도 자신이 떠나온 육신의 고향보다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10)는 영광을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미 이 히브리서 기자도 이런 사람들에 대해 경계한 적이 있었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히6:5~6f)

우리 나라의 조상들도 자신의 태(胎)를 묻은 곳을 귀하게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죄를 묻고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난 곳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 귀하게 생각해야만 한다.



Ⅲ. 하늘에 있는 본향을 더 사모했다(16)

아브라함 같은 믿음의 조상들을 둔 신앙의 사람이라면 진정으로 바라고 사모해야 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처소를 바라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귀중한 확인이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땅에 있는 변화무쌍한 고향과는 비교될 수 없는 돌아갈 본향을 더 사모했다는 믿음의 선진들의 삶의 자세를 소개한다. 이 히브리서는 이렇게 “더 나은 본향”처럼 비교하는 형식을 다른 여러 곳에서도 이미 그리고 뒤에서도 볼 수 있다.

이미 언젠가 앞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 것 같은데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7:19)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7:22)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8:6)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9:23)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10:34)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11:35) 같은 것들이다.

사람이면 누구든지 더 좋은 것을 바라고 사모하는 것은 기정사실이지만 이 영적으로 더 좋은 것을 선택하였을 때는 항상 이 세상에서는 커다란 손해와 고통이 따르기 때문에 세상의 비교되는 것들을 위해서 이런 손해와 고난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런 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예는 없지만 사실 영적인 것은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가치가 있는 것은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4~35)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되고 있는 내용이지만 영원한 본향, 천국을 얻으려면 생명까지도 바쳐야 들어갈 수 있다는 주님의 말씀이고 실제로 믿음의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았다는 증거를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오늘 현재의 세상에서도 영광스러운 역할을 하는 자녀에 의해 자신이 거론되는 것을 싫어할 부모는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먼저는 형의 낯을 피해 외가로 도망가다가 루스(벧엘)에서 하나님을 뵈었던 야곱에게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창28:13) 야곱의 조부와 아버지의 이름으로 일컬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두번째가 어쩌면 더 유명한 사건으로 광야의 가시 떨기 불꽃가운데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3:6) 선언하신 사건이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도 이 믿음의 조상들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말씀하셨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마22:32)

이런 하늘의 영원한 영광의 처소를 사모하는 신뢰하시는 충성된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야훼 이레”를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의 영웅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본향은 사실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이미 예비해 두신 것이라고 주님께서 친히 증거하셨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25:34)

그러면서도 이 하늘의 본향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완성하실 것도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14:2)

그런가 하면 이 아름다운 처소를 친히 볼 수 있었던 사람은 사도 요한이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21:2) 아마 이 세상에서도 가장 고상하고 보기 좋은 것은 신랑을 맞기 위한 온갖 정절로 단장한 신부일 것인데 요한은 하늘의 모습에서 그러한 영광을 보고 증거하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본향의 약속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확실한 약속을 받지 못하였음에도 다 믿음을 따라 죽었고 지금 그들은 아마도 이미 뼈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지만 확실한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기 때문에 주께서 이 땅에 천사장의 소리로 재림하시는 날 우리보다 먼저 죽음에서 일어나 그처럼 그들이 사모하던 영원한 본향에 먼저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미 나온 바 육신의 고향을 나와 떠돌이 나그네의 고달픈 삶을 마다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그 본향을 찾는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더 나은 본향, 하늘에 예비된 영원한 고향을 사모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으로 일컬음 받으시는 것을 결코 싫어하지 않으셨다. 그들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늘 그들의 삶을 돌아보는 이 자리의 우리들이다. 이종배(각자)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실 수 있는 본향의 주인으로 사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