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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는 이집트를 떠나기까지의 믿음의 역할이었다면 여기에서는 이집트를 떠나 홍해를 건너 가나안 최초의 정복지인 여리고를 차지하는데 까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과 가나안에 숨어있던 이방인으로서 믿음의 사람 기생 라합을 증거하고 있다.
모세의 믿음을 따라 함께 움직였던 이스라엘 전체의 순종과 여리고 성의 함락을 주도했던 여호수아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는 대신 나중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까지 거론되는 라합의 이름이 증거되고 있는 것도 독특한 내용이다.
정작 이런 사실을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인정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으로 복음서들에 나타난다. 그들은 사람들의 믿음으로 산 삶의 내용보다도 그들 각자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 하는 각자가 가졌던 지위나 직업에 대해서 더 민감했던 것 같다.
이런 자세들을 직접 보신 우리 주님께서는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21:31b)고 견주어 그들을 책망하셨다.
오늘의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종살이하던 이집트를 탈출시키고 율법의 전달자인 모세에 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사사시대를 거쳐서 왕정시대의 전성기였던 다윗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역사들을 거론하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들을 거론하는 말미에는 이렇게 믿음으로 산 사람들을 다 거론하려면 시간이 부족할 것이라는 비유를 썼다. 마치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를 마감하면서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21:25)는 표현과 같다.
이렇게 성경에 기록된 내용에나 이 역사 속에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의 삶과 그 결과를 우리는 이미 보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한한 자긍심과 도전을 주고 있다. 그런 입장에서 이 히브리서에서는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히12:1f) 라고 격려하고 있다.
이제는 이 저물어가는 역사의 황혼기에 같은 믿음으로 산다면 그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의 삶과 같은 역사를 나타낼 수 있음에도 초라하게 자신의 믿음조차 가누기 힘든 오늘 우리에게 도전하는 바가 크다.
오늘 날에는 보다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의 이루어졌음을 이미 보아온 우리들이기 때문에 사실 그들과 같지 못함을 변명할 수 없고, 더 큰 확신과 감사의 고백을 드리지 못한다면 더 큰 책망을 받을 수 있음을 생각하고 책망이나 징벌이 무서워 서가 아니라 누구보다도 더 큰 사랑받음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집트에서 언약의 땅인 가나안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2~3)는 언약이 보다 구체적으로 이루어짐을 오늘의 말씀에서 본다.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 과정에서 있었던 사람의 능력이나 한계를 넘어서는 믿음의 역사와 함께 이루어진 사실들에 대하여 더 이상 증거가 필요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있는 오늘 우리 역시 이제는 “무슨 말을 더 하리요”라는 확신의 격려에 같은 믿음으로 응답하는 …
Ⅰ. 약속의 땅으로(29~30)
어찌 보면 이집트와 약속의 땅 가나안의 경계는 홍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이 같은 홍해 가운데서 이루어진 믿음과 불신 역사의 결과는 보다 분명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내용이 오늘 첫 부분이다.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29) 이 첫 절에 가장 분명하게 비교되는 낱말은 “믿음”과 “시험”이면서 가장 반대편의 의미를 가지는 단어들이다.
“믿음[πίστις, 신뢰, 확신, 확실성, 확고한 확신, 보증, 증명, 증거, 신실성]”이 의미하는 바는 확실히 모든 것을 의탁하고 맡길 수 있는 의미들을 가지는 것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에 모든 것을 온전히 드림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즉, 하나님의 능력을 나의 것으로 가져다 쓸 수 있는 확신이 그것이다.
반대로 “시험[πεῖρα, 시도, 시련, 실험, 모험, (수동적 의미로) 경험, 지식]”은 통계를 조사하고 시험하고 또 시험한 데이터를 모아서 그것으로 다시 검증(big data)하는 의심의 총체를 의미하는 뜻을 가짐으로 오로지 검증된 것을 의미하는 낱말이다.
꼭 같은 홍해라는 바다 가운데서 그 바다를 대하는 첨예하게 다른 두 가지 반응과 함께 그 결과를 이 말씀은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시행자들 역시 전혀 다른, 도망하는 이스라엘과 좇아가는 이집트 군인으로 전자는 피해가면서도 절대적인 힘을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었고, 좇아가는 전차부대는 ‘그래, 이번에는 어떻게 하는가 보자!’ 시험하는 의심하는 무리들이었다.
보이는 모습에서는 전혀 비교가 될 수 없는 두 부류였지만 보이는 현상에서는 완전히 불리한 피해가는 사람들이, 전차로 무장하여 그들을 죽이려 좇아가는 완전무장의 사람들에게서 영원히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은 그 전차부대가 완전히 물속에 수장되어 몰살되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29f) 출애굽기14장의 기록된 내용이다. 물론 이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도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출12:38)라는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이들 때문에 가까이 다가오는 바로의 군대를 보면서 v11~12에 보는 대로 원망하는 무리들이 있었고 나중에는 고기나 생선 등을 못 먹어 기력이 다 떨어진다고 불평하는 무리들도 함께 있었다.
“그늘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민11:4~6f)
결국 이스라엘 속에 섞인 체로 함께 이집트를 빠져나왔던 이들은 이스라엘과 같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문제를 만들 뿐이었다. 어찌 보면 오늘 복음 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확신도 없이 교회 속에 함께 움직이는 천국에 소망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과 비교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고후6:14) 라고 경계했던 것이다. 말씀이 조금 곁길로 가기는 했지만 믿음이 중요한 것은 언약하신 하나님의 모든 능력을 믿기만 하면 자신의 것으로 누릴 수 있다는 약속 때문이다.
홍해 같은 깊은 물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는 사람들은 불 속에서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것을 다니엘의 세 친구들에게서 보는 사실이다(단3:27).
그럼으로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물속도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29f) 라는 결과를 보는 것이다. 여기 “육지[ξηρᾶς γῆς, 마른 땅]”는 물이 전혀 없는 말라 있는 땅을 의미하는 낱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을 좀더 이해하기 쉬운 다른 말로 바꾼다면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마른 땅같이 건넜으나…”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시험하는 사람들 즉, 불신 상태의 사람들은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29b)라고 기록되고 있다. 이 시험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시험하는 마귀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마4:6; 눅4:9~11)고 시험하였다.
여기에 대한 우리 주님의 답변이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마4:7; 눅4:12) 하셨는데 이 말씀은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신6:16) 말씀의 인용이다.
우리 주님께서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신 것에서 우리는 신앙의 부분을 헤아려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도 ‘과연 이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실까!’ 또, 기적으로 믿음의 능력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까지도 우리 주님을 시험하는 예가 된다면 옳지 않은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시험이나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과 신뢰의 대상이기 때문에 시험하는 사람들은 망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에서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출14:26~28)라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30) 요단강을 건너 길갈에서 그동안 여행중에 행하지 못한 할례를 행한 다음에 맨 처음 정복한 성이 여리고 라는 데는 많은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어쩌면 이것이 약속의 땅 가나안 정복의 효시(嚆矢)즉,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독특한 것은 이 여리고를 정복하기 위한 준비로 정탐꾼을 보냈고 이 사람들을 잘 영접하여 잘 살피고 돌아가게 한 기생 라합이 나중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서 적어도 믿음생활 하는 사람이라면 어린아이로부터 자주 그리고 재미있게 듣는 이야기가 되고 있다. 또 일반적인 사람의 이해로는 역시 이해가 불가능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스꽝스러울 정도의 이상하고 재미있는 여리고 성의 역사는 비록 사람의 판단에서는 이해가 불가능한 이야기일지라도 역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순종했을 때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의 역사라는 데서 믿음이 승리한 가장 확실한 예의 사건이다.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30)라는 이야기는 한 주간 그대로 안식일의 간격도 없이 돌고 도는 어찌 보면, 예외 없이 하나님께 완전히 몰입해버린 사람들에 의해서 나타난 역사라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럼으로 여리고 정복은 머리로 짠 전략으로 이긴 전쟁이 아니라 순종이라는 믿음으로 이룬 역사의 모범이고 비록 여기에서부터 아간의 불순종이 다음 아이성의 승리를 부자연스럽게 하였지만 이런 믿음의 순종이 모든 가나안 정복의 본보기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때에 그치지 않고 같은 믿음의 역사라면 오늘도 여전히 지속되어야 만 하는 역사인 것이다.
Ⅱ. 이방인의 믿음(31)
이 두번째 이야기는 어쩌면 첫번째 역사를 가능케하는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 가운데 그것도 적진 가운에 있었던 사람들로부터 결코 인정받을 만한 사람이 아닌 천대받고 사람들의 놀림거리인 남자로 용사가 아닌 기생이라는 신분의 여인이었다.
복음 속에서 최초로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인 고넬료 하고는 전혀 다른 처지의 사람이었고 여리고 쪽에서 판단해볼 때는 매국노 같은 평가를 받을 만하지만 하나님께 대하여는 확실한 경외감을 갖고 믿음으로 행한 여인이라는 데서 역시 본보기이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여리고를 멸하실 것이기 때문에 사실에 있어서 기생 라합이 필요 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 라합이야 말로 함께 망할 여리고 성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과 가정이 구원받은 모범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31) 이 말씀은 복음이 완성된 후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라는 말씀과 같이 들린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살후3:2b)는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이를 거꾸로 이해하면 믿음을 가지는 것에는 기생이든 어떤 직업이나 신분에 구분을 두지 않고 순종하는 자면 차별없이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바로 앞에서 인용한 대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요1:12)에게서 사람의 차별은 없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확인하는 것이다. 이렇게 여리고에서 조롱받던 기생 신분의 라합이 하나님의 보낸 사자들을 평안히 영접하여 쓰임을 받았다면 오늘 여기 우리가 쓰임 받지 못할 이유가 수 없는 것이다.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이 사람들도 라합과 다르지 않은 여리고에 함께 살던 사람들이고 어쩌면 모두 기생 신분인 라합보다는 나은 지위와 역할을 하고 있었을 것임에도 모두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만 ‘순종하지 아니한 자’들로 남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순종하는 자로 남는다면 그들과 같은 운명이 될 것임을 성경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의 간격은 크지 않다. 라합처럼 정탐꾼이 아닌, 인류의 죄와 사망의 비극을 해결하러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 은혜를 평안히 영접하는 것과 순종하지 아니한 자로 이 땅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다.
Ⅲ. 사사들과 선지자들(32)
앞에서는 모세로부터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의 믿음의 인물들을 통해서 그들이 믿음으로 행한 삶의 여정과 역사를 보아 왔다. 여기에서부터 하나님의 통치를 대신하는 사사들이나 왕들을 비롯해서 신앙으로 산 사람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지만 이미 앞에서 언급했던 인물들을 포함하여 믿음 때문에 당한 일들을 이 11장의 마지막까지 기록하고 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여기서는 가나안에 들어간 후 왕정시대까지의 중요 인물들 6사람을 거론하고 있지만 순서에서나 인물들에 대해서 믿음 외에는 어떤 다른 기준을 볼 수 없다.
아직 왕정시대가 이르기 전 어쩌면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5b)는 조금은 혼란했던 사사시대의 주요 인물 4사람과 최초의 왕인 사울은 믿음으로 산 사람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다윗과 그 다윗을 왕으로 다시 세운 마지막 사사라고 할 수 있는 사무엘의 이름이 나타난다.
이미 서론에서 거론했던 것처럼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함으로서 믿음으로 산 사람들을 낱낱이 다 거론할 수 없다는 표현이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미디안 족속의 압제아래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구별된 300명의 군사와 함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것만큼이나 신비한 방법으로 물리친 기드온이 먼저 거론(삿7장)되고 시스라가 이끄는 가나안 사람들에 시달리다 드보라와 함께 그들을 물리친 바락(삿4장)을 두번째로 거론한다.
입다(삿11~12장)는 사실 삼손보다 앞선 사사로 출신성분이 좋지 못해서(기생) 형제들로부터 도 버림을 당하였지만 암몬족속으로부터 신음하는 이스라엘을 구해줄 것을 권하는 길르앗의 장로들의 부탁으로 하나님 앞에 서원하고 물리친 사사로 서원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이삭처럼 무남독녀 외 딸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친 것으로 유명하다.
삼손은 나면서부터 나실인으로 선택되고 괴력의 무서운 힘을 가졌지만 그를 통해서 행하는 일들이 그의 부모조차도 혼란할 정도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 힘들었던 사사로 들일라의 꼬임에 빠져 자신에게 특별하게 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잃게 되고 마침내 죽음으로 블레셋을 물리치는 괴력을 마지막으로 나타냈다(삿13~16장).
결국 이들이 해낸 적진을 물리친 역사들은 사람의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믿음의 방법으로 주어진 역사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사들 보다도 이 4사람의 사사들을 거론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32b) 베들레헴 사람 이세의 막내아들로 아직 전쟁에 징집되지 못할 어린 나이로 하나님께 선택되어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모범을 나타낸 왕이었다(삼상16:1~13).
이스라엘의 왕정 역사에서 모든 왕들의 모범으로 거론된 사람으로 이미 그의 시대에 그리스도를 예언한(시110:1) 믿음의 왕이었다. 선한 왕에게는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라고 비교되고 악한 왕에게는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라고 수없이 모범으로 비교 되었다.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했는데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로 넘어가는 중요한 인물로 사무엘을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 구하여 응답으로 탄생한 과정이 그의 이름이 되었고 과도기적인 어려움에서 변함없이 하나님 편에 서서 믿음을 지킨 사람으로 존경이 가는 사람이다.
선지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대언(代言)한 사람들로 그 수가 무수하고 많은 환란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역시 최종적으로는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바를 감당했던 인물들이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는 두 번을 겹쳐 말하는 저자의 의도는 ‘믿음의 사람들을 다 거론할 수 없고 일일이 그것을 다 말하려 한다면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많다.’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증거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들과 같이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의지가 필요할 뿐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생명과 사망의 간격은 그 생명을 가지신 하나님을 믿느냐 시험하느냐 하는 자세에 의해서 결정되는 홍해와 같다. 믿음은 가나안에 가장 튼튼하게 쌓아졌다는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을 폭약이나 무력이 아니라 순종과 외침으로 무너뜨렸다.
우리 각자의 신분이 어떠하든지 당연히 망하도록 운명 지어진 여리고 성과 같은 이 세상에서 하늘에서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평안히 영접한다면 이 망할 세상과 함께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 세상 구원의 역사 속에 쓰임 받은 사람들은 그 수를 다 헤아릴 필요가 없다. 다만 그들처럼 어떤 형편이나 시간 속에서 믿음으로 살기만 한다면 우리도 별처럼 빛나는 생명의 빛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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