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
|
|
 |
이종배 전도자 |
|
 |
히 11:33~36 |
 |
2022-10-16 |
|
 |
그들이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
|
|
우리는 앞에서 이미 사람은 누구나 태생적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며 사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나눈 바 있다. 그렇다면 사람만 그러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연어만 봐도 사람보다 고향을 찾아 다음 세대를 만들고 거기서 죽는 회귀성은 완전히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이기까지 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것들은 한 세대에서 끝나는 생을 위해서도 그렇다면 사람들의 진정한 고향은 단순히 이 육신이 아니라 영원한 영혼의 고향이 있는 존재인 것은 죽어서도 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존재임을 솔로몬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3:20~21)
오늘의 제목을 통해서 이해하는 본문의 내용은 이미 앞에 v14에 기록된 말씀이지만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그 영원속에 다시 돌아 감을 사모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마치 연어와 같은 나온 바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여 육신을 쳐서 복종하며 사는 삶의 투쟁을 보여주는 귀중한 신앙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이름들은 언급하지 않은 대신에 그들이 믿음을 통하여 행할 수 있었던 사실들을 열거하고 뒤에 가서는 일반적으로는 가능하지만 믿음 때문에 하지 않았던 것들을 거론하는 것으로 이 믿음의 장을 마무리하고 있다.
기록된 말씀이 길지는 않지만 편의에 따라서 각각 4절씩 다음 주와 나눠서 다루도록 하겠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의 일반 사람들은 불가능하지만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 능력의 역사가 믿음을 통해서 가능할 수 있다.
반대로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또한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지나칠 수 있는 것들로 땅에서는 삼가 하는 것들이 있는데 이것은 당연히 미래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대가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뭐,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가!’라고 의아심을 가질 수도 있다. 잘 못 생각하면 오히려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고 ‘그리스도인 된 냄새를 풍기려 한다.’고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부분이지만 과거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 외에는 이런 평가에 개의치 않고 믿음으로 산 사람들이었다.
단순히 육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 아닌 쇠하지 않는 영원한 영광에 돌아갈 본향을 소망하고 기대하는 사람들은 잠시 거쳐가야 할 이 나그네로서의 삶에 집중하지 않는 모습을 과거 아직도 영원한 영광의 계시가 주어지지 않은 믿음에서도 찾고 기대했던 조상들에게서 보게 된다.
오늘도 3가지 제목 아래서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형편에서도 믿음을 통해서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한 역사를 믿음으로 이루어 낸 믿음이 가지는 능력들을 4가지씩 2두번의 사건들을 첫번째와 두번째 제목에서 다룰 것이다.
마지막 세번째에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격지 않아도 될 불이익을 기쁘게 감당한 즉 믿음이 가지는 의무 같은 것들인 고난과 불이익들을 다음 시간과 함께 나누도록 할 것이다. 사실 이런 것들은 믿음이 깊지 못한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하고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인간적인 합리성을 추구하는 오늘의 사회에는 ‘저렇게까지 요란을 떨며 믿음생활을 해야 하는가!’ ‘적당히 해 두지!’라는 회의감을 가질 수도 있는 내용들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영생이 있음을 확실히 믿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과제들이다. 오늘은 결론 없이 각자의 삶에 적용해 봤으면 한다.
Ⅰ. 믿음의 능력(33)
앞에서도 계속 믿음으로 나타난 역사들의 소개였지만 약간은 다른 것을 이 말씀과 구태여 구분한다면 “by faith” 즉, 믿음을 가지고 할 수 있었던 삶속에서의 경험이었다면 여기서는 “through faith” 즉,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진 일들을 네 가지씩 다루도록 할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도 계속 믿음의 역사들을 나누어 왔지만 믿음으로 어떤 일이 가능하며 불가능한 것은 어떤 것인가? 생각할 수 있다. 먼저는 믿음의 대상이신 우리 주님께서 직접주신 말씀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9:23)
그렇다면 너무나 분명한 이 약속에도 불구하고 왜, 오늘 우리에게는 이런 일들이 나타나지 않는가 생각해 보면 해답도 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있다. 즉, 믿음이 작거나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①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앞에서도 이미 예를 본 바 있지만 한 곳만 인용하면 역대하20장에 모압과 암몬 & 세일 사람들이 연합으로 여호사밧 왕이 다스리는 유다를 치려고 큰 무리로 오는 까닭에 숫자에서나 장비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었던 여호사밧은 백성들과 더불어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하게 되는데 그 내용이 v6~12에 소개되고 있다.
상당히 긴 기도의 내용을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v12만 인용하면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라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고백을 드린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레위 사람인 아하시엘이라는 사람을 통하여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15b)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17f)고 약속하신다.
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들은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21)라고 찬양만 드렸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22) 암몬과 모압은 유다가 아닌 세일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23b)는 기록을 볼 수 있다.
결국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이 전쟁에서 적군들은 다만 시체(24)뿐이었고 이 전쟁에서 전리품이 너무 많아 재물이나 의복 & 보물을 사흘동안 거두어 들이고 넷째날에 유다 백성들이 모여서 전쟁을 시작할 때처럼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그곳이 후에까지 [찬송의 골짜기]라는 별명으로 불려 짐을 볼 수 있다.
이런 예는 광야 40년의 역사와 사사시대에 수를 헤아릴 수 없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더불어 있었던 역사였고 다윗은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17:47) 고백하였다.
오늘도 의로운 싸움이나 경쟁이 믿음의 백성에게 있다면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신다. 할렐루야!
②의를 행하기도 하며, 본래 쓰여진 헬라어의 의미는 “εἰργάσαντο δικαιοσύνην”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의로운 일을 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주님께서 보실 때 의로운 일 즉, 하나님의 일이나 구원의 일은 믿음을 통해서만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삼하8:15) 라는 기록을 볼 수 있고 다윗을 왕으로 세운 사무엘도 백성들로부터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받은 사람이다(삼상12:3~5).
아담이 범죄한 후로 세상은 죄로 오염되고 어둠의 세력들이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11:15) 라는 이 세상 속에서 “의를 행하기도 하며”라는 삶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믿음의 사람이라면 이 마지막 시대에도 이것이 가능해야만 하다. 왜냐하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③약속을 받기도 하며, 이미 6:12에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하였고 v15에도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라고 아브라함을 거론하고 있다. 사사기 7장에서 기드온, 삼무엘하7:9~16 다윗에게 주신 언약은 말할 것도 없고, 신명기서를 비롯한 하나님의 언약을 믿음으로 받은 사람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과거의 그 사람들이 아니라 오늘 내(우리)가 약속을 받아 누릴 수 있어야 이 약속의 가치를 바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보다 분명한 언약을 놓치지 않는 이 각자 내 삶속에서 이 약속을 확인하는 …
④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다윗도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기 전에 사울에게 사자나 곰의 입에서 양의 새끼들을 빼앗고 수염을 잡고 그것들을 쳐죽였다고 고백한 바 있다(삼상17:34~35). 가장 구체적으로는 아무래도 아무 허물을 찾을 수 없었던 다니엘을 사자밥으로 만들려고 모함했던 바벨론의 대신들 때문에 굶주린 사자 굴에 던져졌던 다니엘이 가장 사실적인 경험을 한 사람일 것이다.
대신들의 모함으로 만든 법으로 인하여 다니엘을 사자 굴에 던져 넣고 다리오 왕은 밤잠을 자지 못하고 염려하며 먼동이 트자 말자 사자 굴을 찾아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단6:19)는 왕에게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하지 못하였사오니…”(단6:22f)라는 찬양을 듣는다.
이 모든 역사들이 믿음을 통하여 나타난 능력이라고 증거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같은 믿음을 가졌다면 이런 류의 일들이 없을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모두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누리는…
Ⅱ. 믿음이 미치는 효력(34)
두번째로 거론하게 되는 믿음의 영향력은 앞의 이야기들과 비슷한 일들이기는 하지만 좀더 불가항력(不可抗力)이라고 할 수 있는 즉, 사람의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상황을 이겨낸 사건들을 포함하고 있다.
①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이 역사는 역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겪었던 일을 마음에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이름까지 바벨론 식으로 개명되었지만 다니엘처럼 우상숭배를 거절하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왕의 어명을 거절하고 평소보다 7배나 뜨겁게 달군 풀무에 던져졌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의 당한 일을 말하고 있다.
이 세 친구를 풀무에 던져 넣기 위해 특별한 옷을 챙겨 입은 사람들까지 불타 죽을 정도로 뜨거웠던 그 불 속에 주님께서 친히 내려오셔서 그들을 보호하셨던 사실을 느부갓네살 왕까지도 볼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단3:25).
②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블레셋의 장군이자 거인 골리앗의 칼 앞에 섰던 다윗의 보호받음(삼상17:43~44)과 사울이 여러 번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그 때마다 피했던 일들을 생각케 한다(삼상18:11).
엘리야가 아합과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려 하는 간계에서도 살아남은(왕상17:10, 19:1~2) 일이나 아람왕이 엘리사를 죽이기 위해 도단성을 에워싸고 죽이려 할 때 살아난 일(왕하6:14)들을 말하고 있는 내용들이다.
좀 더 확대하여 역(逆)으로 말하면 가룟 유다를 앞세우고 기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채포하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왔던 군인들을 보고 급한 상황에서 베드로가 칼로 내리쳐 말고라는 종의 귀만 자르자 주님께서 다시 붙여 주셨던 사건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
만약 베드로의 어설픈 행동으로 내려친 그 칼에 군인 한 사람이라도 죽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문당하시면서 더 큰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연장선상에서 야고보는 순교하였지만 베드로는 죽이기 바로 전날 밤에 천사로 통하여 피하게 하신 것도 생각할 수 있다(행12:3~12).
③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특별한 하나님의 능력을 가졌음에도 한 여인의 간교한 속임에 빠져 마침내 나실인의 상징인 머리카락이 잘리고 힘을 읽고 옥에 갇혀서 마지막으로 블레셋을 물리치면서 죽게 해달라는 삼손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시 능력을 허락하셨던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삿16:28~30).
또,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들과 갈멜산에서 겨루어 이기고 바알의 선지자들을 모조리 기손 시내에서 죽였지만 이세벨이 죽이려 한다는 말 때문에 광야의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탄식하던 엘리야가 천사에 의해 다시 힘을 얻고 호렙산에서 하나님께 다시 힘을 회복하는 모습도 상상하게 한다.
오늘도 연약한 하늘의 백성들인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해질 수 있기를 바라본다.
④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기드온이 그의 부하인 부라와 함께 미디안 진에 내려가 미디안 보초병들의 꿈 이야기를 듣고 용맹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미디안 진을 물리친 이야기가 가장 대표적이다(삿7:9~14)
유다왕 아마샤는 에돔과 전쟁을 하려하면서 자신의 군대가 적고 힘이 없다고 생각하여 은 백 달란트로 북조 이스라엘 군사 10만명을 고용했다가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군사와 함께 한다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다만 힘써 싸우라는 말을 듣고 세일 군대를 크게 물리친 일도 마찬가지다(대하25:6~9).
전쟁에서는 무엇보다도 용맹이 중요한데 낙심하고 전의를 잃어버리면 이미 진 전쟁이나 다름이 없다. 믿음 생활을 전쟁으로 비유하여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1:18, 딤전6:12)하였고 딤후2:3에서는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당부한 바 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군사로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어둠의 세력을 넉넉히 물리치는 믿음의 군사로 살아야 할 것이다.
Ⅲ.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35~36)
앞에서는 믿음을 통해서 불가능이 가능했던 역사들을 거론했다면 여기에서부터 대부분 반대로 꾀를 부리거나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면 당하지 않고 지나칠 수도 있었던 불이익이나 어려움을 믿음 때문에 그대로 감당하는 세상적으로나 육신으로 보는 대로는 그야말로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보게 될 것이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이 말씀은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을 믿음으로 통한 기쁨으로 되돌린 은혜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엘리야를 통한 사르밧 과부(왕상17:17~24)와 엘리사를 통한 수넴 여인(왕하 4:18~37)의 경우들을 OT에서 본다면, 예수께서 직접 살리신 요한복음11장의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신기하게도 성경에서 주로 죽은 사람들을 되살림 받은 사람들은 모두 여자들이었음이 증거하는 내용과 같다. 나인성 과부(눅7:11~14)이야기나 베드로를 통하여 살아난 욥바의 다비다(도르가)라 하는 여인도 그녀로부터 봉사 받은 그곳의 모든 과부들이 안타까워 호소하여 되살아나게 됨(행9:36~41)을 볼 수 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더 큰 감격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 속에서 썩지 않을 생명으로 부활 받을 것이라는 소망이다. 그러려면 역시 부활에 합당한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주님은 이렇게 때로는 가까운 사람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생명으로 회복하여 큰 위로를 주시기도 하셨지만 그들은 역시 그들의 목숨의 연한이 다되어 다시 죽고 말았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그런 육신의 생명이 연장되는 정도의 부활이 아니라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라는 보다 영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더욱 사모하는 사람들 역시 믿음의 사람들이다.
생명의 주님께서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5) 주님을 위해 기꺼이 생명을 바친 바울 또한 이렇게 증거한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딤후2:11) 죽음에까지 자신을 믿음으로 드릴 때 영원한 생명은 보장받는 언약으로 복음을 위해 기꺼이 죽은 사람들은 이 역사 속에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말씀은 우리의 생명을 쉽게 포기하라는 가르침은 아니다.
여기서 좀더 생각해야 하는 말은 “고문[τυμπανίζω(TIMPANI, 북), 튐파니로 고문하다]”으로 NT에 오직 여기만 쓰여진 낱말이다. 이것은 로마 이전의 헬라시대의 고문도구로 십자가 형에 뒤지지 않은 고통이 점점 심화되어가는 고문 도구였다고 전해진다.
※둥근 북모양의 형틀에 사람을 눕혀 잡아 묶고 어깨, 팔, 엉덩이, 다리들의 뼈를 쇠창살로 찔러 쪼개고 마지막으로 심장이 있는 가슴을 북 치듯 쳐서 죽이는 형틀로 전해진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당하지 않아도 될 이런 고통을 당하면서도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견뎠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내용은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36)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믿음 때문에 당하는 육신적인 환란과 고통들이 나타내고 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육신이 평안하고 태평한 것이 복이라고 말하는데 “조롱과 채찍질”이나 “결박과 옥에 갇히는” 것들을 결코 복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중요한 것은 오늘 그들과 다르지 않은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내가 믿음을 지켜 이 세상의 것들과 비교될 수 없는 더 좋은 생명의 영광을 얻기 위하여 이런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가 각자 스스로를 돌아봤으면 한다.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