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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11:37~40 2022-10-23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이제 이 믿음 장의 결론에 왔다. 지난 주 말미에 믿음 때문에 당한 환란과 역경과 시험, 그리고 많은 불이익들을 감당해야만 했다. 사실 믿음생활이라는 것 자체가 이 세상의 안락함을 벗어 던지고 고난을 자초하는 삶이다.

그러한 이유는 이 세상을 즉, 육신의 삶을 절대적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반드시 거쳐가야만 할 과제이지만 절대로 타협하지 아니하고 훈련과 단련의 과정으로 여기며 영원한 의의 상급을 바라기 때문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이런 입장에서 세상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가치가 없고 세상도 그러한 믿음의 사람을 기뻐할 수 없는 서로의 상관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는 증거는 세상이 품을 수 없는 능력의 사람이며 반대로 이런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영광이 가치를 갖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대부부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이름을 남기고자 애쓰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다음 세대를 확인하지 못했고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의 가장 분명한 차이를 찾으라고 하면 아마 이런 간격일 것이다.

이런 이치에서 생각한다면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그 가치를 이 세상에 더 두고 살며 애쓰는 사람들은 하늘의 상급이나 가치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각사람의 가치와 믿음으로 산 것에 따라 갚아 주실 것이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모든 육신의 인생사가 잘되고 형통하는 것이 믿음의 대가라면 오늘 본문처럼 믿음으로 당하는 어려움이나 불이익은 믿음에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가?

또 경우에 따라서는 일반적으로 주어진 삶을 다 살지 못하고 죄도 없이 사형을 당하여 죽게 되는 것이 복이 될 수 있을까? 세상원리에 따른다면 오히려 억울해서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오히려 정반대의 이치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가르침이 오늘 본문과 어울리고 조화되는 말씀들임을 산상 보훈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마5:3, 4, 10) 라고 말씀하셨던 내용의 이해는 오늘 본문의 내용과 조화를 해보면 충분한 이해가 되는 내용들이다.

믿음의 사람들이 이렇게 살았던 것은 세상에서의 가치보다는 영원한 영광의 약속에서 가치를 찾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Ⅰ. 환난과 학대와 함께 유리하는 삶을 살았다(37~38)

일반적으로 주어진 삶의 길이도 다 채우지 못하고 비정상적인 사악한 방법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일들이 과거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더 일반적이었다. 그것도 어떤 법을 어기거나 죄를 범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법에 따라 올바로 사는 것으로 인하여 거짓을 행하는 사람들의 죄악을 들어내는 역할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37f) 먼저는 죽임을 당하는 방법들이 나열되고 있다. 세가지가 거론되는 데 ‘돌로 치는 것’이 그 첫번째이지만 사실 율법에서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범죄는 우상숭배나 일반적인 사회규범 중에서도 사악한 죄들을 다스리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게 하기 위하여 가했던 율법의 가장 엄격한 계율이었다.

다른 신을 섬기자는 유혹(신13:6~11, 17:2~7);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신21:18~21); 간통한 남녀(신22:23~23)

그럼에도 안타까운 것은 이 법을 집행해야 하는 왕이나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법에서 멀어져 오히려 자신들이 이런 형벌을 당해야 마땅한 죄를 범하면서 기득권을 차지하는 경우에 이 하나님의 두려운 계명이 반대로 사용되는 예를 범죄하는 이스라엘 속에서 볼 수 있다.

OT의 예를 보면 조상으로부터 받은 토지를 지키려는 의로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으려는 아합의 욕망과 비정상적으로 그것은 빼앗아 주려는 이세벨의 사주를 받은 나봇의 동네의 사악한 사람들에 의해 “때에 불량자 두 사람이 들어와 그의 앞에 앉고 백성 앞에서 나봇에게 대하여 증언을 하여 이르기를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매 무리가 그를 성읍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고”(왕상21:13)라는 기록을 볼 수 있다.

다른 한 곳은 사악한 아달랴의 왕자들을 몰살시키는 가운데 여호야다 제사장과 그의 아내인 여호사브앗에 의해 숨겨져 죽임을 면하고 7살에 왕위에 오른 요아스 왕이 여호야다 제사장이 세상을 떠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자 자신에게 바른 말을 하는 여호야다 제사장의 아들 사가랴를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령을 따라 그를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죽였더라”(대하24:21)는 기록이 그것이다.

세상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할 타락한 왕이나 대신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바른 진리로 자신들을 권면하는 진리의 일꾼들을 율법의 방식을 빌어 옳지 못한 방법으로 제거하고 자신들의 하려는 것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것은 복음 속에 와서도 다르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맨 먼저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들어 잘못된 예루살렘 사람들을 권면하는 스데반을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행7:58)는 기록이 그것이다.

바울도 루스드라에서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을 일으키고 그것으로 인하여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자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행14:19)는 경험을 고린도후서11:25에서 회고하고 있다.

‘톱으로 켜는 것’으로 죽이는 예는 성경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성경에 분명히 있었기 때문에 거론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저스틴이나 터툴리안 같은 교부들은 선지자 이사야가 므낫세 왕에 의해 이런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죽음과 같은 ‘시험’을 당한 사람은 OT에서도 의인으로 인정되는 욥의 예로도 충분하지만 이것은 사실 배도자들에 의한 것이기 보다는 사탄에 의해서 그런 시험을 당하고 친구들로 부터도 오해를 당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다르다.

‘칼로 죽임을 당하고’는 이세벨의 칼을 피하여 광야에 들어가 낙심한 채로 있다가 천사의 보살핌을 받고 호렙산에 가서 하나님께 항변하는 엘리야의 하소연에서 들을 수 있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19:10)

또 유다 말기에 우리야라는 기럇여아림 사람이 예레미야와 같이 예루살렘에 대해 경고하는 것을 여호야김 왕과 대신들이 죽이려 하자 이집트로 도망하지만 “그들이 우리야를 애굽에서 연행하여 여호야김 왕에게로 그를 데려오매 왕이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시체를 평민의 묘지에 던지게 하니라”(렘26:23)는 기록처럼 하나님 편에 서서 바른 말씀을 하는 전하는 사람들을 칼로 죽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시편기자도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시44:22고라 자손) 라는 결코 세상 속에서 평안하거나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없었던 사실을 안타까워한 바 있다.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37b)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마11:8; 눅7:25) 말씀하신 바 있다.

과거 엘리야나 엘리사가 우상숭배가 만연하는 시대에 광야에서 이런 삶을 산 것으로 성경은 말하고 있고, 1세기에 로마에 의해서 박해받던 그리스도인들은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힌 채로 굶주린 사자나 맹수들 앞에 내놓아 찢기기도 했던 것으로 역사의 기록들이 전하는 내용들도 있다.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고전15:32f)

변변치 못한 차림새에 입는 것이나 먹는 것은 늘 궁핍하고 어려움과 학대를 받으면서 죄악의 땅에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 진리를 사랑하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이었을 뿐이다.

v38b에도 이러한 사실을 보충하고 있다.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는 기록과 연결된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앞에서 보는 대로 이들을 잡아 죽이려는 간교한 계략이 늘 있었기 때문에 저들의 거처는 몸을 편히 누일 수 있는 곳이 없었다. 1세기의 박해 때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산 흔적들은 지금도 성서의 땅에 더러 남아 있는 것을 볼 수도 있다.

여기 두절 모두에 “유리하여[περιέρχομαι, πλανάω]”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정해진 곳이 없이 떠도는 삶이 된 것은 저들의 본향이 이 세상 어디가 아니라 영원한 본향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해 두신 처소만을 사모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28f) 한 것은 세상과 하나님의 백성 서로에게서 마찬가지였던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이 보호처나 영광의 가치를 줄 수 없는 사람들이었고 또 죄악으로 움직여가는 세상은 진리에만 순종하려고 하는 하늘의 사람들을 역시 배척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그들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인데 우리에게는 세상이 전부인 것 같고 세상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세상에 의존하는 것은 분명 우리의 믿음이 그들과는 같지 못하기 때문일 것임으로 회개하여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삶을 회복해야만 할 것이다.



Ⅱ. 그럼에도 약속은 받지 못하였다(39~40)

이제 이 마지막 두 구절은 믿음의 장 전체의 결론이다. 그러면서도 오늘 우리가 더 감사해야 하는 이유들을 기록하고 있다.

과거 죽음과 환난을 무릅쓰고 평안을 반납한 채 힘겹고 고달픈 삶을 그야말로 거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아직 메시아의 오심으로 완성될 약속은 막연히 기다리는 입장에서도 그렇게 하늘의 뜻에 삶을 맡겼던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우리가 참으로 이렇게 신앙하는 것이 맞는가! 두렵기도 하다. 물론 그들도 이미 9:15에 봤던 대로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한 것처럼 완전한 사죄의 은혜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루어 질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39f) 여기에 “이 사람들”은 당연히 이 히브리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믿음으로 살았던 모든 사람들을 일컫는 표현이다.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이러한 확신은 이미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2)는 확신과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5)는 기록에서도 확인한 내용이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 속에 있는 우리 못지 않은 확신을 가졌음을 확인하고 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는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함으로 죄에서 의로 옮기심을 받았다(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아직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은 형편에서는 막연한 기대와 희미한 대상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증거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39b) 이 말씀은 이미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33)라는 말씀과 사뭇 모순되게 들린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v33의 약속들은 각 믿음의 사람들 개개인에게 국한된 내용으로 들린다. v33b의 “약속을 받기도 하며”라는 말은 전체가 아닌 일부의 사람들 중에 v5의 에녹처럼 약속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v13에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라는 내용으로도 확인이 가능하다. 즉, 메시야에 대한 전체적인 약속을 받기 전이었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OT 속에서의 믿음의 사람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경험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자신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면서 온갖 불이익을 다 감당하며 그 이루어질 약속을 기대하며 믿음으로 살았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처럼 사모하고 힘겨운 삶을 살면서도 기대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받은 오늘 우리들의 믿음이 어떠해야 함을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샘이다. 이런 입장에서 이어지는 내용이 바로 그런 도전을 주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앞의 내용이 대부분 과거 이스라엘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기대하며 살았던 OT의 성도들의 이야기였다면 거기에 비교해서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적용해야 할 내용이 바로 나머지 부분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그때 그들에게”였다면 그것은 다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교훈이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40f) 앞의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이 증거는 받았으나 약속은 받지 못한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우리만큼 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예정과 과정 속에 아직 때가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의 민족의 구원을 소원하는 로마서9~11장에서 이러한 인류구원의 순환을 증거하고 있는 것을 듣는다. 대략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에게 메시야를 언약하셨지만 결국 오신 메시야를 그들의 완악함으로 거절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내용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들을 완악하게 하신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완악 함까지도 사용하신 것이다(잠16:4).

결국 언약의 백성이 먼저 선택된 백성이 그리스도를 거절하게 하여 이방인들이 접붙임을 받게 하고 이방인의 수가 차게 될 때 이스라엘에게서 불순종을 거두셔서 구원을 얻게 하실 것이라는 것이 그 내용으로 주로 11장에 이런 내용을 증거하면서 이것을 신비라(롬11:25)고 한다.

그러면서 바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3, 36)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40f) 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히브리서를 받는 대상이 사실적인 히브리 사람들 즉, 유대인들인데 그들과 더불어 하는 말이므로 이것은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유대인을 향하여 하는 말이라는 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방인 출신도 아닌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내려온 저들 중에서 로마서11장의 표현대로 적어도 잘려 나간 가지가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안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격인 것이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안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가 되고 찬양이 되는 것은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살후3:2b)”는 사실 때문이다. 언약을 따라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실적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40f) 적어도 하나님의 언약의 민족 유대인들 중에도 비록 나중에 돌아온다고 할지라도 떨어져 나가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완성된 복음에 머물러 있는 그들에게 더욱 감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밖에 이방인이었고 하나님도 없었던 약속에서는 외인이었던(엡2:11~12) 오늘 우리에게 더 좋은 복음을 허락하신 것에는 우리가 이렇게 소극적일 수 있는가 하는 도전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40b) 이 말씀을 표준새번역에서는 “그들은 우리가 없이는 완성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결국 막연히 기대하고 기다리던 약속이 이루어졌는데 그 열매가 없다면 그들의 약속은 허무한 것에 그치고 말 것인데 우리가 그 결실로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이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같은 믿음을 가졌다면 이런 자긍심을 가져야하지 않을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역사에 오시기 전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히려 더 믿음이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믿음의 대상이 보이지 않는데도 하나님의 약속 하나로 이 땅의 모든 누릴 수 있는 것을 거절하고 비교될 수 없는 하늘의 가치를 바라보며 살았고 그런 믿음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세상이 감당할 수 없었고 세상이 그들의 가치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산 그들을 칭찬하며 향수에 젖어 있을 수 없는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명한 증거를 받았다. 그렇다면 과거 그들보다 낳은 것이 무엇인가를 점검해야만 할 것이다.

세상을 감당치 못하여 붙들려 씨름하고 있다면 이제는 과거의 믿음의 사람들이 갖지 못했던 구속으로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신령한 눈을 떠서 우리의 자리와 가치를 확인해야만 할 것이다. 오늘 이 도전에 부끄러움 없는 주님의 백성들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