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경스러운 과거의 믿음의 선진들의 모범을 여러가지 예에서 살펴봤던 저자는 이제 그 과거에 가 있었던 우리의 눈을 현실로 와서 뜰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 바로 이 12장이다. 당시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엄청난 박해아래 있었고 그런 이유에서 과거 죽음으로 믿음을 지켰던 선진들의 모범도 중요하지만 지금 그들이 당면하고 있는 고난과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물론 수많은 과거의 믿음의 선진들을 거론한 것도 바로 그들이 당면한 박해를 그들의 조상들의 믿음을 본받아 이기도록 도전하였을 것이라는 이해도 크게 그르지 않을 것이다. 어쨌던 과거의 신앙의 선진들이 믿음으로 신앙을 지켜냈을 때는 복음이 완성되기 이전이었음에도 가능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시고 성령께서 오셔서 항상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는 현재야 말로 유리하지 않느냐는 확신을 주고자 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입장에서 과거 갈데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실 때는 어떤 것도 보이거나 손에 잡히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의 지시와 말씀을 순종했던 아브라함은 이런 입장에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데 손색이 없는 것이다. 복음이 완성된 후 우리가 갖는 확신을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고까지 표현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그리고 별빛처럼 희미한 언약의 실마리를 아들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가며 같은 믿음을 상속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오늘 우리시대를 보더라도 대단한 결단이고 도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개의 경우 우리가 누군가를 떠 올려야 할 때는 극단적인 기쁨이나 어려운 경우다. 마치 오늘의 본문을 상황적으로 생각해보면 1세기의 이스무스 경기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둘러 앉아 있고 그 가운데는 열심히 달음박질하는 육상 선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여기에 구름같이 모여 있는 관중들은 이미 과거에 육상경기를 치르고 모두가 승리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믿음의 달리기 선수로서 선배들이다. 모습으로는 구름같이 둘러싼이라고 하였지만 그곳에 그 수많은 관중들의 소리도 크게 들리는 것 같다.
마치 요한 사도가 하늘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표현하는 것과 같다.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계19:6, 14:2)
과거에는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던 하나님의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이제는 앞을 거쳐간 수많은 믿음의 증인들로 인하여 또 함께 같은 천로역정의 길을 가는 동료들이 지금은 많이 있다는 것 자체가 위로와 소망이 되고 감사의 이유가 된다.
이것이 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꼭 같은 몸으로 오셔서 사람으로서는 해결이 불가능한 영원한 형벌의 죄를 친히 수치와 고통을 당하시면서 해결하셨기 때문에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들까지 도 천국을 향해 달릴 수 있는 엄청난 기회를 제공받은 것이다.
Ⅰ. 수를 샐 수 없는 증인들(1)
우리는 아날로그 시대에 만들어졌던 [벤허]라는 영화 속에서 실감나는 전차경주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물론 1세기를 배경으로 쓰여진 소설이었지만 시저(Caesar) 황제까지 나와 있는 그 넓은 경기장을 가득 매운 관중들과 함께 볼 수 있다.
오로지 승리를 위해 전차를 끄는 말에게 채찍질하는 참가자들의 움직임과 때로는 편법으로 다른 선수의 마차를 상하게 하여 중단시키는 것을 볼 때마다 군중들은 분냄으로, 또는 응원으로 소리를 질러 댔다. 마치 그런 장면을 연상시키는 말씀이 이 첫 부분에서 보는 내용이다.
앞에 거론했던 모든 시련과 환난을 견디고 승리한 사람들 모두가 믿음의 달음질을 하고 있는 오늘 우리의 관람자로 응원자로 관중석에 있는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즉, 평가자로 응원자로 우리의 달음질을 지켜보고 있는 믿음의 선진들을 의식하며 법대로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나를 보고 환호성을 보내고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경기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로 감당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딤후2:5)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 두 가지가 그것이다.
이겼다고 해도 법을 어겼으면 그 승리는 헛것이 되고 아무리 법을 완벽하게 지켰다고 해도 이기지 못해도 역시 승리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당부하는 경계의 교훈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또한 이미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이미 약속하신 이김이다. 진리를 따라 순종하려고만 한다면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니라 임마누엘을 통하여 반드시 승리를 언약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고전15:57~58)는 격려를 듣는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1f) 과거 믿음의 선진들은 이름이나 3인칭으로 거론하던 기자는 이제 이 서신을 쓰고 있는 자신을 포함해서 1인칭인 “우리에게”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타나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은 과거 그 믿음의 증인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의 증인인 것이다. 사실 과거 그분들에게는 증인이 없었고 오로지 하나님의 언약만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이 오늘 우리의 의무가 더 크고 막중함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에 중요하고 중심이 되는 표현이 “증인[μάρτυς, (문자 그대로) 사법상, (유추적으로) 순교자,]”이란 표현으로 의미적으로 접근한다고 하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증인이 될 수도 있고 먼저 믿음 때문에 이미 순교를 당하기까지 한 승리자들인 샘이다.
그런 이유에서 오늘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이 엄청난 증인들을 모시고 확인하는 정도까지의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과거 6:15의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는 사실은 우리와 비교될 수 없는 도전이 필요했을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은 천로역정의 달음질을 하는 우리를 보면서 법을 어길 때 ‘그렇게 하면 안된다.’ 경고할 것이고 게으르면 역시 ‘그래 가지고는 안되니 열심을 내라!’ 격려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아니 이 증인들은 먼 과거의 믿음의 조상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먼저 살다 가신 나의 아버지일 수도 있고 나의 어머니일 수도 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1m) 이것은 무엇보다도 천국을 향해 달음박질하는 우리의 장애요소가 되는 것을 벗어버리라는 당부의 교훈이다. 달리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뛴다면 잘 달리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달음질한다고 하면서도 너무 많은 것을 걸치고 뛰려고 한다. 그러니 힘겨워하고 제대로 뛰지 못하고 넘어지기도 한다. 그런 것들 중에 가장 흔한 것이 세상의 부와 명예 같은 것들이다.
바울을 디모데에게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9~10)라고 경계하고 있다.
실제로 세상에서 돈이 많고 부하게 되고 명예롭게 되면 그것을 관리하는데 더 신경을 쓰게 되고 심지어는 그것에 잡혀서 천국을 던져버리는 안타까움도 얼마든지 있다. 그야말로 세상에서 ‘여기가 좋사오니!’가 되어 버릴 수도 있다.
여기서 특별히 무겁고 얽매이기 쉬운 죄를 지적하고 죄를 벗어 버리라고 교훈 한다. 역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가는데 있어서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늘가는 길이 밝을 수 있는 것은 죄를 잘 해결하는 것이다. 막연한 회개나 세상에 내맡기는 삶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과 더불어 죄를 늘 벗어 버려서 천국 행 달음질이 가벼워야 할 것을 당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거기에서 다가 아니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1b) 우리의 달려갈 신앙의 길이 결코 단거리 100M 경주가 아니라 평생의 마라톤이기 때문에 인내로 경주해야 하고 또 각자에게 맡겨진 경주가 다르기 때문에 나에게 맡겨진 신앙의 과제를 잘 감당하라는 당부이다.
Ⅱ. 영원한 우리의 모범(2)
3:1에서는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당부한 바 있는데 여기서는 생각을 넘어서 바라보자라고 격려하고 있다. 물론 생각하는 대상으로 서의 예수 그리스도와 바라봐야 할 대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도 약간은 차이가 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여기 한가지 독특한 것은 일반적인 주인이라는 뜻의 “주[κύριος]”가 아니라 “주[ἀρχηγός, 시작하다, 지배하다]”라는 표현이 쓰이고 있어서 모든 믿음에나 순종 있어서 시작이요 모범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앞에서 거론했던 모든 믿음의 조상들보다도 더 확실한 믿음을 가지셨던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실 것이다. 과거 믿음의 조상들에게나 오늘 우리에게나 한결 같이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으로 온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완전한 희생을 십자가에서 감당하신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한 바울의 고백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는 감격이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반복해도 감격이 되는 고백이고 모범이 되는 헌신이고 주님께서 그러셨다면 나는 더욱 그래야 되지 않는가 하는 도전이 되는 말씀이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신뢰의 모범이기 때문에 먼저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다가 이미 안식에 들어 가 있을 믿음의 조상들에게나 오늘 같은 믿음으로 나머지 주어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할 우리에게도 끊임없이 바라 봐야할 모범이 되신다. 할렐루야!
다만 바라 봐야할 모습에서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의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나(우리)를 위하여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 하심으로써 우리 자신을 온전케 하시는 역할을 하고 계신다.
이런 이유 때문에도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는 호소에 감격이 되는 것이다. 언제나 온갖 세상의 불완전하고 옳지 못한 어두운 것들에 끌려 다니기 쉬운 나(우리)를 한 시 동안도 버려 두지 않으시고 지키심을 감사하며 나 또한 그 주님을 늘 바라봄으로 믿음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이러한 표현이 세상에 있는 우리식의 표현이지만 앞에서 인용한 빌립보서2:6~8의 믿음과 순종에 합당한 것으로 보답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응답도 감사할 수밖에 없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
믿음에 있어서 일반적인 원리는 희생이 없이는 생명이 되지 못하고 잃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이치를 N, OT을 막론하고 모든 믿음의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역에서 확실히 보는 것이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상당히 모순되게 들리는 표현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치와 고통이 오늘 우리를 우리 되게 하심을 확신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모순이다.
이 세상에서 수치를 견디고 하나님을 순종한 자들은 그 수치에 비교될 수 없는 다함이 없는 하늘의 영광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환난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살후1:7)라는 약속에서도 이를 확인하게 된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신 것을 확인한다면 오늘 이 은혜를 누리고 있는 나(우리)도 그 주님을 위하여 어떤 수치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영원한 죄로 인한 저주의 수치를 위해서 대신 수치를 당하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역시 믿음을 위한 수치를 마다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가 바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완전한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고 늘 말해왔다. 그럼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 대로 하나님 보좌 우편은 언제나 승리의 자리요 영광의 자리이면서 사람의 힘으로는 차지할 수 없는 곳이다.
그곳은 먼저는 죄인들을 위해 아버지를 순종하여 죽으셨던 그리스도의 자리였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엡1:20)
그리고 그 자리는 창세전부터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자리였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25:34)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의 모범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고 이제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순종한 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자리이다. 여러분 모두가 빠짐없이 그 자리를 상속하는 …
Ⅲ. 배신과 모욕을 감당하라(3)
이 마지막 부분에서는 핍박과 환난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며 위로하고 인류를 위해 하나님으로서 받을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당하시면서도 직접 대항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께 맡기셨던 우리 주님의 자세를 본 삼을 것을 격려하고 있다.
어떤 어려움이나 고난 가운데서도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면서도 죄에 빠져 마귀 사탄의 수하에서 스스로는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을 영원한 저주 아래에서 구원하시려고 먼저 친히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획하시고 마련하시고 예정하신 일을 이루기 위하여 사람으로 서도 감당할 수 없는 조롱과 비난과 아픔을 당하신 사실을 생각한다면 ‘오늘 내가 당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생각하고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격려의 교훈이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계속되는 어려움이나 고난에서 지속적으로 그것을 감당하는 것이 연약한 사람으로서는 결코 쉽지 않다. 특히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우리도 계속되는 어려움에는 ‘왜, 나만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는 건가!’ 낙심할 수 있다는 데서 이런 격려가 필요할 것이다.
앞에서도 인용한 바 있지만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살후1:5~7f)라는 약속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주위의 온 갓 사람들이 다 저주와 조롱을 퍼부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나 그들의 사주를 받은 군중들은 대놓고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마27:41~42)는 내용은 복음서에 모두 기록이 되어 있다.
심지어 같은 십자가에서는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23:39)고 비웃고, 또 직접 관계가 없는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막15:29~30; 마27:39~40) 모욕했다. 공중과 땅 모두에서 저주의 소리를 들으셨다.
이렇게 모든 종류의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당하신 것에도 분명한 의미가 있는 것은 역으로 말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이런 이치에서 믿음으로만 응답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의 은혜에서 제외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의 믿음생활이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우리보다도 더 큰 어려움을 이기고 오늘 믿음으로 달음박질하는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은 구름같이 많다. 그들은 내가 나태해질 때 꾸짖으며 힘겨워할 때 격려하며 응원하고 있다.
이렇게 무수한 응원자들이 있지만 힘겨울 때 바라봐야 하는 분은 우리가 당하는 수치와 고난에 비교될 수 없는 조롱과 고난을 나를 위해 참으시므로 영광의 보좌 오른편에서 지금도 나의 온전함을 위해 중보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할 것이다.
오늘 나의 좌절과 절망을 능히 감당하기 위해 이렇게 당하지 않으셔도 될 온갖 비난과 조롱에도 참으신 우리 주님을 생각하고 본받을 필요가 있다. 그럴 때 반드시 승리하는 믿음의 경주가 될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