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
|
|
 |
이종배 전도자 |
|
 |
히 12:4~8 |
 |
2022-11-06 |
|
 |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
|
|
앞에서는 운동선수로서 스스로 상을 얻고자 하여 훈련하는 과정에서 당할 수 있는 고난에 대처하고 견디고 이겨야 하는 내용으로 주로 자기와의 싸움인 육상선수에 비유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아버지에 의해서 장성하여 유업을 물려받아 그 기업을 잘 운용하고 이끌어 나가는 데까지 양육하는 아들에 대한 비유로 내용이 바뀌었다. 계속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로서는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역시 요한계시록의 일곱교회에 자주 거론한 “이기는 자들(계2:11, 26, 3:5, 12, 21:7)”에게 약속되는 영원한 것들에 언약하고 있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결국 허약하고 무능한 사람들은 참된 승리자로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특히 요즘은 인권이 강조되면서 아이들의 훈육(訓育)과 더불어 채벌에 대한 문제가 초등학교에서부터 문제가 되고 있다. 인권이 바로 되기 위해서는 바른 인격의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이고 그런 이유 때문에 성경은 아이들의 훈육에 채벌까지 교훈 하고 있다.
솔로몬을 통해서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잠23:13~14)하였지만 요즘 인권 옹호론자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의문이다.
그러나 역시 자신의 친 자식에게 라야 채벌에 분노를 실지 않고 사랑의 채벌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를 참으로 사랑하는 자식이라야 징계와 꾸지람이 효력이 있을 것이고 당사자도 ‘내가 바르게 되고 더 잘 되게 하시려고 아버지가 나에게 채찍을 드신다.’는 서로의 이해가 가능할 때 채벌은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측면에서 무익한 논증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만이 친 백성이 아니냐?’하는 문제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중의 이스라엘인이라고 하는 바울조차(롬11:1)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롬2:28) 증거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9:6b~8)고 선언한다.
이는 바울이 그리스 아테네에서 이방인들을 향하여 선언한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행17:26)
결국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은 같은 한 혈통인 아담과 하와에게서 난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선택하신 민족이지; 그들 만을 자신의 백성이요 소유라고 구별하시기 위해서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 모든 날 마지막에 모든 인류의 구세주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로 거듭난 사람들을 자신의 친 백성이요 자녀로 인치셨음을 확신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롬5:9)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1:7)
그러므로 오늘 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면 ‘그래도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친자식으로 대우하시니 감사드립니다.’라고 잘 감당하며 하나님께는 영광을 드리고 우리 자신으로서는 구속의 은혜에 참여함을 감사하는 친 백성으로서의 감사를 드리는…
Ⅰ. 감당할 만하다(4)
이 부분도 역시 믿음생활을 하는 것을 경기하는 앞의 내용에 연결되는 부분이면서 경주하는 각자의 스스로의 훈련에 비유했던 내용에 이어서 어쩌면 서로 치고 받는 그래서 피를 흘릴 수 있는 권투경기 같은 것을 상상하게 한다.
다만 그 상대를 “죄와 싸우되”라는 설정을 함으로 역시 우리 각자 지상에서 평생동안 싸워야 할 대상이 “죄”라고 말함으로 결과적인 대상을 증거한다. 결국 죄를 짓게 하는 것이 마귀 사탄이지만 그 어둠의 대상과의 싸움에서 지게 될 때 죄를 범하게 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주님께서 요한 사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 확인하고 있다.
좀더 구체적인 사실을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3:8) 증거함으로 죄를 짓게 만드는 마귀를 멸하려고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음을 증거하였다.
이 히브리서 기자도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히2:14)라고 같은 증거를 한 바 있다.
아무리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죄와의 싸움을 말한다고 해도 누구보다도 죄의 비극을 해결하기 위하여 피를 흘리신 이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때문에 오늘 주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힘겨운 믿음의 싸움을 싸웠다고 해도 주님만큼 피 터지게 싸워 본 경험은 없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오늘날 신앙의 사람들이 아무리 어려움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시면서 선택된 자신의 민족으로부터 외면을 당하시고, 온 인류의 대표로 상징되는 로마의 군인들로부터 조롱과 채찍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수치와 고통에는 견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당하는 환난이나 고통에 불평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를 행하므로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2:20)는 베드로 사도의 위로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Ⅱ. 사랑하시는 자가 징계를 당한다(5~6)
어려움을 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사랑하시는 자식은 반드시 훈육을 한다는 아버지의 사랑을 지혜의 사람 솔로몬의 잠언을 통해서 교훈 하고 있다. 징계받는 자식이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하는 한가지는 아버지는 자식을 미워서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용된 내용을 그대로 보면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3:11~12) 기록되고 있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5f) 우리가 믿음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는다면 역시 이 사실을 잊지 말라는 당부가 그 첫째이다. 만약에 이 사실을 자식이 잊어버린다면 아버지의 사랑은 안타까움이 되고 훈육의 가치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여기 “권면하신[παράκλησις, 가까이 부름, 옆으로 부름]”이란 말씀이다. 그러므로 어려움과 환난을 당하고 있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더욱 가까이 계심을 의식하고 더욱 순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5b) 여기에는 하나님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하는 부성(父性)의 더욱 친밀함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특히 징계하심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책망을 받을 때에도 낙심하지 말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어떤 것도 의미가 없는 것이 없기 때문에 절대로 가볍게 넘겨서는 안된다. 어쩌면 하나님의 징계를 가볍게 여긴다면 영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5b) 책망을 듣는 것은 절대로 행복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책망의 의도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절대로 낙심하지 않을 것이다. 억울하게 모든 것을 다 잃고 고난당하던 욥은 친구들에게까지 오해를 받아 비난을 당하는 가운데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직접 책망하시는 하나님께 대하여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42:5~6)라는 고백을 드린다.
사랑의 아버지는 자식을 보다 오래(영원히) 가깝게 두기 위하여 짧은 순간 동안 징계하시고 꾸짖으시기 때문에 이런 기회를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기회로 받아들일 것을 교훈 하고 있다. 특히 여기 “징계하심[παιδεία, 양육, 교육, 훈련]” 어린아이를 양육하심에서 사용된 낱말이다.
아무리 장성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나 다름이 없이 불완전한 존재일 뿐이다. 그런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 앞에 가르침이나 권면이 필요 없을 정도의 완전한 사람은 없다고 봐야한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6)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을 징계하시는 이유를 말하면서 아들을 단련하는 아버지 역시 그 마음은 편치 못할 것임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여기서는 아버지라는 비유적인 표현보다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6f) 라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παιδεύω, 양육하다, 교육하다, 가르치다, 습관을 들이다]”하신다고 확인시킨다. 그러므로 징계를 받을수록 ‘하나님께서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신다.’라는 확신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또 그럴 때 징계를 넉넉히 이기고 믿음에 더욱 든든히 설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6b) “채찍질[μαστιγόω, 매질하다, 채찍질하다, 징계하다, 응징(징벌)하다. 사전에서 이 단어는 (고문하다, 괴롭히다)라는 더욱 가혹한 형태의 처벌을 나타낸다.]” 그럼에도 이 역시 더욱 감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시는 사람에게만 가혹한 훈육의 채찍질을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채찍질 같은 시련을 감당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받아 주신 것이 분명함을 확신해도 좋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채찍을 받을지라도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을 받으시는 것이다.
또 우리 하나님은 반드시 어떤 채찍이나 어려움도 감당할 수 있는 정도 까지만 허락하신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이미 욥이 그런 사람임을 아셨기 때문에 그 무시무시한 시험을 허락하신 것이다. 만약에 사탄의 참소대로 욥이 그런 인물이 되지 못했다면 하나님은 절대로 욥에게 그러한 시험을 사탄으로 하여금 허락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결국 징계이든지 채찍질이든지 가능한 사람이라야 허락하신다는 사실이 감사하지 않은가! 만약에 감당할 수 없는 사람에게 이런 것들을 가한다면 사탄이 욥을 참소하는 것과 같이 될 것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욥1: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욥2:5)
나중 이런 채찍질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순종하는 백성들을 가려내신 후에 항상 하나님의 충성된 자녀들을 참소하던 자들은 쫓겨나게 될 것이다.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계12:10b)
징계를 당한다고 할지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만큼 가까이하시고 사랑하시는 증거로 받아드린다면 오히려 감사하고 찬양해야 할 이유가 된다. 또 징계나 시험일지라도 반드시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허락하신다는 확신도 감사의 이유이다.
Ⅲ. 아들로 대우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신다(7~8)
어찌 보면 바로 앞 구절의 확인으로 보인다. 만약에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거나 잘못 가는데도 그대로 버려 둔다면 그것은 분명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 자신과 관련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냥 버려 두는 것이 되기 때문에 징계를 받고 있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신하고 감사하라고 한 것과 어울리는 내용이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7f) 이 말씀은 표준새번역의 표현이 더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주께서 여러분을 훈련하시거든 그것을 견디어 내십시오.” 이것은 비단 솔로몬을 통한 권면이 아닐지라도 일반적인 훈련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이다.
대부분의 인생이 그렇듯이 어떤 큰 어려움이나 고통을 겪어보지 않고는 우리의 무사히 지나가는 일상이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해야 하는 가를 미쳐 알지 못한다. 건강을 잃어보거나 다른 어려움을 당해보고서야 우리의 탈없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적으로 그냥 지나가는 우리의 일반적인 삶이나 부모들의 건강문제를 견디고 나서야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 조차도 얼마나 감사한가를 비로소 알게 되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의 무사안일을 일깨우시기 위한 징계가 있을 수도 있다.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7m) 우리의 믿음 생활이 무사안일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신앙한다고 하는 것이 짐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나태해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시는 가도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될 때 살려 달라고 울고불고, 하지 않던 기도를 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요란을 떠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러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너무 멀리 느껴졌을 수도 있다.
앞에서 욥의 이야기를 인용한 바 있지만 의인으로 살았던 욥이 그랬던 것 같다. 그 많은 재산과 자녀들이 잘 굴러가고 돌아갈 때 욥은 하나님을 가까이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의 모든 시험을 다 겪은 후에 42:5의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는 내용에서 그렇다.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7b) 옛날 우리 속담에 아버지 없는 자식은 불량아가 될 수 있다는 표현을 더러 들은 것 같다. 아무리 어머니가 자식을 엄하게 키운다고 해도 아버지만큼은 강한 훈육을 못하는 데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다.
또 남의 자식은 아무리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매질했다면 폭력으로 오해받기 쉬울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아버지라는 자리는 사랑의 표현이 쉽지 않은 것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아들을 징계했다는 사실은 아버지가 그 아들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는 사실이라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징계하셨다면 역시 그를 자신의 사랑의 자녀로 인정하시는 것이 분명하다는 이론이다. 이런 입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자신을 아들로 대우하시는 주님께 감사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우리가 비록 세상에서는 명문가의 자녀로 태어나지 못했을지라도 이 우주의 창조자요 섭리자요 운행자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이라는 사실로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고 그 영원한 영의 아버지로부터 간섭 받는 자녀라는 감사와 자긍심으로 빛의 자녀됨을 드러내고 의를 행하여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본래적인 태생으로는 불가능하였지만 하나님의 참 아들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함께 나눔으로 가능하게 된 것에 무한한 감사와 찬양을 돌려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8)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는 강조되고 있다. 징계가 없다면 하나님의 참 자녀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그러므로 징계를 받고 있다면 슬퍼하기 보다는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권면까지도 주어지고 있다.
특히 여기 주목해야 하는 것은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이라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이 말을 역으로 말하면 한마디로 ‘징계가 없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라고 이해해도 지나치지 않은 표현이다. 어떤 사람도 결코 기뻐하거나 좋아할 수 없는 이 징계와 고난이 참과 거짓의 시금석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적극적으로 섬기고 있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과 멀어지고 있는데도 징계나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이 없다면 오히려 슬퍼해야 할 것으로 주님께 오히려 ‘하나님 저는 친 자식이 아닙니까?’ 라고 물을 수 있는 영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
먼저는 우리의 싸움과 고난이 진정으로 죄와의 싸움인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으로 인하여 아무리 어려움을 당했을지라도 나를 하나님의 친 자녀삼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주님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에 비교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의식할 수 있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데도 징계받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낙심하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을 더욱 확신할 필요가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던져버리지 않으셨다는 확신이다.
비록 우리 모두의 태생이 사생아와 같은 죄의 사람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께서 친 아들로 대우하셔서 징계하시고 바로 세우시려는 사랑의 채찍에 확신과 감사로 응답하는…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