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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12:9~13 2022-11-13
하나님은 오직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사랑하기 때문에 게으르고 잘 못 가는 자식을 징계하는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증거하는 내용이 지난 주에 이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오늘의 내용에서는 이러한 징계가 아버지의 권위를 내세우거나 아버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녀를 위해서임을 증거한다.

또 징계를 받게 되는 당시에 이런 문책이 절대로 즐거운 것이거나 행복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이러한 징계를 잘 견디고 성장하게 되면 영원에 속한 의와 평강의 열매를 결실하게 됨을 확인한다. 그럼에도 징계를 주시는 이유는 결국 영적인 연약함을 치료하고 천국을 향해 가는 데 있어서 보다 건강하고 능력 있는 행보가 되기 위해서라고 증거하고 있다.

바울 사도의 표현처럼 오늘 우리의 시대에는 모든 것들이 “…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빌2:15) 이기 때문에 이러한 아버지의 징계조차도 바르게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책망과 징계조차도 반항하고 법적으로 대항하려는 자세들조차 보이고 있어서 안타까움을 가지게 된다.

다음 주부터 세상과 구별된 하늘의 가치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런 권면을 주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 아버지 자신을 위해서이기 보다 온전히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백성들을 위한 것으로 힘겹고 비틀거리는 천국행이 되지 않기 위해서임을 증거하고 있다.



Ⅰ. 육신의 아버지를 공경한다면…(9)

오늘의 세대는 세상에는 기준으로 세울 가치조차 잃어버린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육신의 아버지를 비유하여 영의 아버지를 비유하기 어렵다는 안타까움이 그것이다. 세상에 영원의 모델이 될 수 있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b)는 바울의 비유처럼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을 계속 변화하는 것으로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히브리서에서도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11:3) 말한 바 있다. 사실 보이는 세계는 오히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인류가 범죄한 후에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조차도 어두움의 세력에 넘어가서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를 비유하는 데는 어떤 것도 적절하지 못하다.

어쨌거나 그래도 인간 세상의 최상의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9f) 바울 같은 경우도 교육자로서 스승보다는 아버지를 더 높이 두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4:15)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9f) 비록 육신의 평생을 사는 아버지도 자신의 자녀들이 그릇되면 매질하여 바른 자리에 돌아오게 하려는 훈계는 분명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의 아버지가 아닌 우리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의 자녀를 회초리 쳐도 공경하여 순종하는 것이 옳은 자세이다.

어떤 경우에는 완력으로 한다면 아버지가 책망받는 자식보다 힘이 없고 약할지라도 그 교훈을 공경하여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그것이 미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여 바르게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망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징계하는 아버지께 대항하거나 거절하는 것은 정상적이지 못한 모습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징계를 증거하면서 “하물며”라는 이유를 전제로 영원하신 영의 아버지 그것도 개인의 아버지가 아닌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창조주 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이라도 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임을 지적한다.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9b)

“모든 영의 아버지”라 했는데 이것은 OT의 율법에서부터 강조되고 있는 표현이다. “…하나님이여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여…”(민16:22, 27:16)라 고백함을 본다. 욥은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욥12:10)고 증거하는 말에서도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는 것이다.

그런 대상이시기 때문에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고 격려하는 것이다. “복종하다[ὑποτάσσω, ~아래 두다, (스스로) 복종하다, 주인으로 인정하다]” 즉, 순종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시키는 것을 억지로라도 따라야 하는 표현이다.

신앙에서는 더욱 그렇다. 자녀들에게나 사람들에게 시키다 시키다 듣지 않으면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은 순종이 안되면 복종이라도 해야 멸망이 아니라 생명이기 때문에 복종이라도 해야 한다는 권면이기도 하다.

마태복음21:28~31f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시기를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여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뇨…” 하셨다.

물론 복음에 불순종하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주신 말씀이지만 하나님 아버지께는 어떤 경우일지라도 명령하시는 말씀을 듣지 않으면 비극이 됨을 알게 하시려고 이런 비유를 베푸신 것이다.

덧붙여 더욱 깊이 헤아려야 하는 것은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함으로써 단순히 듣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명령하신 바를 삶에 실천하여 언약이 생명이 되도록 해야 하지 않느냐는 간곡한 당부이다.



Ⅱ. 징계는 전혀 우리를 위하여(10~11)

자식을 매질하면서 행복할 아버지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라고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셨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잠시동안 징계를 주시는 것은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힘드시겠지만 오로지 우리를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데려가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으로 자신을 위하시기 보다는 전혀 우리를 위해서이다.

징계를 받는 당시에는 살지 못할 것 같고 끝나지 않을 것 같고 그런 이유에서 슬프고 힘겹지만 그 사랑의 채찍을 잘 감당하여 믿음의 연단을 잘 견디고 나면 거기에 따른 상급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결실인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므로 지나 놓고 보면 큰 감사가 되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의 매질이다.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10f) 앞에서 육신의 아버지의 징계를 영원의 아버지의 징계와 대조하기 위하여 다시 거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그들은” 당연히 좋은 마음으로 자녀들을 징계하는 아버지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안타깝게도 행복한 시간과는 다르게 고통의 시간, 징계의 시간의 길이는 길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채벌을 당하는 시간은 어떤 시간보다도 길게 느껴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아버지로부터 회초리를 맞는 시간이건 군대에서 얼차려를 받는 시간이건 길게만 느껴지지만 육신의 아버지들도 자식을 길게 힘겹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버지들의 뜻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자기의 뜻대로” 라는 것도 비록 불완전한 사람의 뜻일지라도 자식들이 그 징계를 바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서 올바르게 변화 받기를 바라는 것 역시 자식을 징계하는 모든 정상적인 아버지들의 마음이요 뜻일 것이다.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10b)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는 이유를 최종적으로는 오늘 마지막 두절(12~13)에 기록하고 있지만 여기서도 증거하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이 징계조차도 첫째로는 하나님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의 자녀 된 그리스도인들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그것이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오늘 제목으로 잡은 내용이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유익을 위해 어떤 일을 하시지 않으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보여주신 삶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수많은 기적들을 병든 사람, 불편한 사람,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쓰시면서도 주님께서는 자신을 위해서는 어떤 고통이나 어려움에도 한번도 기적을 사용하신 적이 없으셨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위해 무엇을 명하시든지 그것은 오직 죄인 된 사람들을 위해서 기적도 고난도 징계도 주신다. 그런 이유에서 확인하는 우리의 고백이 바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이다.

다음으로 징계를 허락하시는 두번째 이유는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이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심으로 그의 모든 피조물들과 구별된 분이시기 때문에 이를 거룩하시다 즉, 구별되신 분이시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구별되심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과도 나누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사람은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일그러지고 거룩됨을 잃어버리고 말았지만 그 사람들을 징계하셔서 라도 자신의 거룩하심에 참여시키기를 원하시는 것이 바로 징계하시면서까지 교훈하시는 이유라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을 위하여 징계하신다는 이유가 이해될 것이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11f) 전쟁에는 이기고 싶어도 훈련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전쟁에 이기기 위하여 고달프고 힘겨운 훈련을 감당한다. 군대에서 ‘훈련에서 많이 흘리는 땀이 전쟁에서 흘릴 피를 줄인다.’는 말이 있다.

어떤 경우에도 징계를 받으면서 기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징계를 잘 감당하고 오는 열매로 더 큰 위로와 기쁨을 받게 된다. 그런 이유에서 징계이건 훈련이건 감당하게 되고 그런 이유에서 믿음의 사람들의 징계는 바로 훈련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앞의 v6에서 분명히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는 사실을 이미 확인한 바 있다.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11b) 징계를 그냥 지나친 자를 이야기하지 않고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이라는 결과를 확인하고 있다. “연단 받은[γεγυμνασμένοις, (γυμνάζω, 벌거벗고 훈련하다, 완료 수동 여격 남성 복수)]” 목적을 가지고 훈련을 시켰고 거기에 충분한 결과를 이룬 사람들을 의미하고 그 결과를 다시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의[δίκαιος,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조건]” 죄의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럼에도 “연단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기대의 수준까지 열매를 맺게 된다는 기대이다.

“평강[εἰρηνικός, 불안에 반대되는 평화로운 상태]” 당연히 앞의 “의”와 연결되는 것으로 죄의 사람은 그 죄에 대한 형벌의 공포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평할 수 없고 이렇게 하나님과 불화의 관계는 함께 세상에 존재하는 피조물들과 관계도 불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사랑의 아버지 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연단 받은 자들”은 비로소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고 이것은 당연히 피조물 서로 간에도 화평을 가져오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그런 결과를 바울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8~19) 증거하고 있다.

이 뒷부분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한 것도 “열매[καρπός, (땅의) 열매, (동물들의) 새끼, 산물, 이익, 성과, 결과]”이고 “맺느니라[ἀποδίδωμι, 갚다, 보상하다, 보답하다, 돌려주다]”는 최종적인 결과를 의미한다.

이것이 “연단 받은” 결과 즉, 열매라는 것인데 징계가 이런 놀라운 결과를 이룬다면 충분히 감당할 만하다. 그럼에도 ‘징계받고 싶은가?’ 묻는다면 그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당시에 견디기 힘겨움 때문에 징계를 절대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믿음의 사람들조차 징계를 좋아하지 않지만 언제나 입에 쓴 약이 효과가 좋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처럼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징계를 허락하시는 것이다.



Ⅲ. 징계의 최종적인 목적(12~13)

앞에서 말한 논리에 따르면 분명히 징계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사랑하시는 방법이며 선물이라고까지 이해한다. 특히 빗나가려고 하는 사람들까지도 다시 바른 관계를 회복하시려는 사랑의 역사이기 때문에 어쩌면 여기 2구절에 거론하는 사람들에게 더 절실한 회복의 방편이라고 보여 진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12) 이 말씀과 비슷한 표현이 이사야35:3~4f 보인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이나 “모든 손은 피곤하고 모든 무릎은 물과 같이 약할 것이라”(겔7:17)는 내용들과 같이 적들로 인하여 낙심 되어 있는 이스라엘을 격려하는 메시지이다.

피곤한 손이나 연약한 무릎은 전쟁을 앞두고 더 이상 싸울 의욕을 상실해버린 상태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어쩌면 새로운 복음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믿음을 잃어버려서 의의 선한 싸움을 싸울 의지를 잃어버린 백성들을 새롭게 세우시는 하나님의 의지를 선언하고 있다.

이런 표현의 구체적인 내용들이 OT에 더러 보이고 있는데 “이에 왕의 즐기던 얼굴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 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친지라”(단5:6)는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고 자신의 영광을 자랑하려던 바벨론 왕 벨사살의 두려워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내용이다.

또 니느웨의 멸망을 앞두고 “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폐하였도다 주민이 낙담하여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히며 모든 허리가 아프게 되며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나2:10) 라고 묘사하는 내용과도 같다.

절대적인 능력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꾼들이나 백성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신다면 안타까워하실 수밖에 없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난 하늘의 백성들에게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셨는데도 손은 힘이 없어 늘어지고 무릎이 사시나무 떨듯이 서로 부딪히고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워 하실까! 짐작이 된다.

“너희들이 연약하기 때문에 내가 너희와 함께 한다고 약속하지 않았느냐!” 확인하시는데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은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 상태인 것이다. 사람은 비록 연약할지라도 하나님은 권능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결국 하나님의 훈련의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권능을 확신하고 회복되기를 소원하신다.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13f)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통하여 “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잠4:26~27) 당부하신 바 있다.

앞의 솔로몬도 그랬지만 신앙 속에서 흔히 행하는 삶에 있어서나 판결에 있어서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신5:32, 17:11, 20, 신28:14)라는 경계를 율법의 결정판이라고 하는 신명기에서 자주 거론하고 있다.

우리 말로 ‘갈지(之)자로 걷는다.’는 표현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신앙은 좌우에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곧은 길을 바로 걷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13f)라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로 바른 천로역정의 길을 회복할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의 시련은 결국 좌우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인 천국을 향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13b) 힘을 잃어 비틀거리는 믿음에서 흔들리기 보다는 ‘빛과 진리로의 회복을 받게 하라’는 의미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어그러지다[ἐκτρέπω, ~로부터 얼굴을 돌리다, 피하다, 돌아서다, 외면하다]”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결국 회개라는 말이 다르지 않은 표현이다. 본래의 자리에서 흔들리고 갈등하던 모습에서 바른 궤도로 회복을 위해서도 징계는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2:5f) 이만큼 하나님과의 처음 사랑은 중요하고 지속되어야 만할 믿음의 과제이다.



일평생의 삶을 염려하여 징계하는 육신의 아버지도 공경했다면 영원의 삶을 잃지 않게 하시려는 영의 아버지의 징계는 더욱 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구별된 영광에 참여시키려고 당장에는 결코 기쁠 수 없는 징계를 허락하심으로 영적으로 성숙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적인 의와 하나님과 만물과의 화평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영적으로 힘을 잃은 손과 후들거리는 연약한 무릎들을 튼튼하게 세우셔서 좌우로 흔들림이 없는 견고하고 흔들림이 없는 믿음의 걸음으로 천국에 곧 바로 들어가게 하신다.

이러한 사랑의 의도로 허락하시는 징계를 믿음으로 복되게 잘 견디고 훈련하여 은혜에 합당한 결과를 지체들 모두가 누릴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