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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12:14~17 2022-11-20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제 이 12장의 나머지 부분은 신앙의 사람으로서 지켜나가야 할 삶의 자세와 더불어 참된 진리를 저버리는 배교에 대한 경계를 주고 있다.

특히 모든 박해를 참고 견디며 훈련하는 생활이 되다 보면 다른 사람을 배척하고 독선적인 형태가 되고 삶이 굳어져 상쾌함이나 따뜻함을 잃어버린 모습이 되어 세상에 생명과 평안을 끼치기보다는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에 연연하여 자칫 삶에 생기를 잃어버린 모습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경계하고 있다. 오늘날 진리를 지켜간다고 하는 사람들 속에서 경계되는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부르신 삶의 미덕은 유연하고 여유를 가진 생활이 되도록 적극적인 삶을 당부하고 있는 내용이 오늘 다루게 되는 첫 부분이고 은혜를 잃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오히려 장애가 되는 삶이 되어서는 안될 것을 당부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뒷부분에서는 OT과는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복받는 권리를 에서처럼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는 경계를 주고 있다. 물론 뒤에 가서 좀 더 자세히 다루게 되겠지만 복음을 통해서 받게 되는 복은 육신과 세상의 것들에 그치지 않고 영원히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에서처럼 가볍게 여겨서는 안될 것임을 경계한다.



Ⅰ. 평화의 중보자로 삶(14)

승리를 위해 매진하는 사람은 대부분 경쟁의식을 가지기 때문에 옆의 사람들에 대해 배려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사실 믿음의 조상의 이름에 든 야곱이 그런 스타일의 삶을 살았다. 어머니 리브가의 역할도 있기는 했지만 형보다는 자신의 복을 위하여 아버지까지 속이는 인간적으로는 야비함을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복음 속에서는 그런 모습의 복받음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복이 옆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까지도 화평을 끼치는 역할이 되어야 함을 당부하고 그러면서도 역시 자신의 삶은 세상과는 구별되어야 함을 주문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대상과 힘써야 할 두가지를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14f)고 당부하고 있다. 먼저 간략하게 정리를 하면 모든 사람과 거기에도 자신을 잃지 않을 것을 가르치고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주님을 만나지 못하게 되 수도 있음을 경계하는 내용이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14b)는 결과를 지적하고 있다.

이런 구체적인 경건은 야고보가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1:27)

이 말씀은 오늘 v14의 말씀과 다르지 않은 표현이다. 베드로 사도는 이를 좀 다르게 표현하여 이르기를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벧전3:10~11)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과 화해를 이룬 그리스도인의 화평의 대상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라고 범위를 확인한다. 여기에 불신자를 제외할 수 없고 더욱이 함께 신앙하는 동료는 당연할 것이다.

다만 적극적으로 적대시하는 마귀 사탄의 하수인들을 포함시킬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바울 사도는 이런 한계를 마음에 두고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12:18)고 교회 속에서의 실제적인 신앙의 삶 속에서의 교훈을 주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라는 범위에서 제외시킬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 “모든[πᾶς, 온갖, 전체의, 어떤 것이든지]”에서 제외될 수 있는 대상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비록 원수 시 하는 사람일지라도 상대의 의향이나 자세에 관계없이 나는 화평할 수 있어야 함을 권면한다.

결국 위로 하나님과 바른 화평의 관계는 옆으로 모든 사람은 물론이고 피조물들과 화해가 이루어짐을 계속해서 이야기해 오고 있다. 그러므로 좀 더 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사람 간의 제사장 역할을 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화평을 가지고 타인의 행복과 복지를 위한 책임까지도 가지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을 이루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이것은 사회적인 책임이라고 하면 그러는 가운데서도 “거룩함을 따르라”는 또 다른 의무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거룩함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이기 때문에 신앙의 사람들은 베드로 사도가 OT의 이스라엘의 성결을 인용하며 당부하는 말씀과 같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5~16) 본래적으로는 거룩할 수 없는 죄의 사람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 거룩하게 하늘로부터 거듭나게 하신 것을 지켜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특히 여기 “거룩함을 따르라” 할 때 “따르라(개역한글-좇으라)[διώκω, 뒤쫓다, 추구하다, 박해하다]”는 표현은 좀더 적극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표현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중보자적인 제사장으로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을 따르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는 가운데 자신의 거룩함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이에 따르는 결과가 더욱 경계를 가지게 한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14b) 앞에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라 표현했던 저자는 여기에서 다시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말함으로써 이런 성숙에 이르지 못한다면 예외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뵙지 못할 것을 증거하고 있다.

또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14b)는 경계는 마지막 영광과 구원의 주님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뵐 수 없을 것이라는 경계의 교훈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는 표현은 한번이나 순간의 삶의 모습이 아니라 비록 자신의 노력이나 결심은 아닐지라도 성령과 더불어 성숙해 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주문하는 내용일 것이다.

오늘 이런 경계를 함께 듣는 우리 모두는 이 주를 보지 못하리라는 비극에 남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이 기쁨과 감사의 마라나타!로 주님을 뵙는 …



Ⅱ. 유익을 끼치는 자가 되라(15)

앞에서는 보다 적극적인 열심으로 이웃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유익한 역할을 감당할 것을 당부했다면 여기에서는 다시 말투를 부정적인 표현으로 바꿔서 당부를 주고 있다. 앞에서는 다른 사람이 먼저 거론되었다면 여기에서는 개개인 자신을 먼저 위하고 주변에도 부정적인 역할을 끼치지 않도록 당부하고 있다.

이 구절의 헬라어 서두에는 “너희는 돌아보아(개역한글)[ἐπισκοποῦντες(ἐπισκοπέω), 돌보다, 택하다, 방문하다]”라는 표현이 쓰여지고 있어서 강조적이다. 이 말은 교회의 장로의 역할 중에 감독의 직함으로 쓰는 말의 동사형으로 공적으로는 교회를 돌보는 일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공적인 돌봄을 당부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항상 객관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신앙 상태를 점검할 것을 당부하고 있는 교훈이다. 교회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는 권면인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구원에 있어서는 물론이고 교회 전체 중의 역할에서도 해가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에 방해가 되는 삶이 되지 말아야 할 것을 경계하고 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15f)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주님을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해 주셔서 구원을 잃지 않게 지키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럼에도 이런 안타까운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은혜를 받아 누리는 당사자의 거절이나 불순종으로 인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다시 갈 때에 이런 비슷한 안타까움이 있지 않을까 염려하는 모습을 경계하고 있다.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내가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가 원하지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 있을까 두려워하고”(고후12:20)

이 히브리서에서는 이러한 경계를 여러 번 말한 바 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모자람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서 어떤 혜택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 우리는 그 풍성한 은혜를 자신의 것으로 먼저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하신 것처럼 제한없이 베푸시는 은혜에 믿음으로 응답하여 넘치도록 누리는 것이 우리 각자가 항상 힘쓸 신앙의 과제이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나 교회가 은혜가 충만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은혜는 모자람이 없을 지라도 거기에 나 자신의 사모함이 없다면 그것은 다른 데로 흘러가 버릴 수 있으므로 먼저는 자신의 구원을 항상 지키는 것이 첫째이다.

그러나 OT의 신명기에서 인용되는 말씀처럼 전체 공동체에 부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도 우리 각자의 과제이다.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1b)

인용된 신명기29:18의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신29:18) 라는 말씀은 물론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계의 교훈이다.

OT에서 우상숭배를 확산시키는 것이 전체 이스라엘의 운명을 위기로 내모는 것이었다면 복음 속에서의 경계는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잃게 만들 정도로 그리스도인의 성결을 잃게 만드는 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결국 쓴 뿌리 즉, 독초가 나는 것은 어두움의 세력의 역할로 여러 사람들의 성결을 더럽게 하는 것인데 어떤 사람이건 그렇게 하고 싶은 의도로 되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항상 조심을 해야 하는 것으로 단순한 시험으로 한 순간에 어두움의 이용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괴롭게 하여[ἐνοχλέω, 어지럽히다, 병들다, 괴롭히다]”는 교회에 소란이나 혼란을 일으켜 병들게 하고 이러한 여파로 성도들의 성결을 잃게 만드는 경우를 의미하는데 이런 일의 시작이 결국 독초의 뿌리처럼 보이지 않게 시작하여 확산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그 확산이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는 비극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경계의 교훈이다. 좋은 영향력의 확산은 쉽지 않은 반면에 더럽히고 오염시키는 영향력은 파급효과가 빠르고 큰 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에서는 흔히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쉽게 ‘내가 부흥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는 없다고 해도 교회 성장에 방해역할은 안 한다.’고 자만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소극적인 자세 자체가 결과적으로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는 데서 조심해야 한다.

예수께서 직접 교훈하시기를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12:30; 눅11:23)는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다.

쓴 뿌리의 역할은 적극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소극적인 자세 자체가 반대의 역할과 모임을 헤치는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의 바른 역할은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이미 마련하신 은혜를 확산시키고 할 수 있는 한 사람들의 죄를 씻어 성결케 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시키는 일이다.



Ⅲ. 복받는 자리를 잃지 말라(16~17)

마지막으로는 하늘의 가치를 잃고 난 다음에야 그것을 위해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하지만 영원히 기회를 잃어버린 에서의 사실적인 예를 소개하여 경계를 주고 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현실적인 면에서 오히려 호탕하고 쉽게 생각하는 에서가 바람직하게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역시 하나님의 복 주심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야곱의 이름이 복을 이어받는 이름으로 남았다.

이 모든 것들은 순간과 영원의 가치의 차이를 분명히 이해하고 조금은 약삭빠르고 얄미운 믿음의 약속을 받고자 했던 영원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위해서 순간을 양보했던 야곱의 선택이 옳았음을 인정하고 있다.

야곱과 에서의 삶의 모습에서 에서는 분명 순간적이고 즉흥적이며 당장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모든 것을 결정해버리는 이 세상 사람들의 모형이었음을 그 때의 삶의 상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냥하다가 돌아와서 어머니를 도와 팥죽을 쑤고 있는 야곱에게 그것을 먹게 해 달라고 한다(창25:30).

그러자 야곱은 그 상황에서도 “…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31) 하였고 여기에 에서의 반응은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32) 하고 복을 이어받을 수 있는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그릇에 팔고 만다.

다만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여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32)라는 자세의 이유를 창세기 기자는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34b)고 기록하고 있다.

먼저 “음행하는 자가 없도록 살피라…”(16f)하였는데 이것은 에서에게만 적용할 수는 없지만 부모의 의향에 관계없이 가나안 여인들을 아내로 맞아 이삭과 리브가에게 안타까움을 준 것에서 에서가 좋지 못한 본보기가 된 것은 사실이다(창26:34~35, 27:46, 28:8).

대개의 경우 OT성경에서 음행은 하나님 아닌 우상숭배를 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보는데 에서가 가나안 헷 족속의 딸 유딧이나 바스맛을 아내로 맞은 것은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육신적인 처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1세기에 유행했던 정상적이지 못한 성관계가 교회속에서도 있었던 사실(고전5:1)을 지적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윤리의 기본조차 잃어버린 삶은 복음의 장애 요소가 될 수 있음을 경계하고 있는 내용이다.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16b) 세상에는 많은 거래(去來)가 있다. 장사와 거래, 업체들과 기업들과 서로 간의 거래들이 있는데 요즘은 흔히 deal이라고 한다.

역사 속에 유명한 거래들이 있고 잘했다고 돌아보며 기뻐하는 거래가 있는가 하면 두고두고 후회하는 거래가 그것인데 역사 속에 미국과 구 소련의 알래스카 딜은 미국 측에서는 두고두고 잘한 거래였고 구 소련에서는 그 반대의 거래였다.

그러나 소련이 미국에 팔아버린 알래스카 deal 보다 어리석은 거래가 성경에 형제 간에 이루어진 에서와 야곱의 장자권의 거래라고 볼 수 있다. 영원한 복을 누릴 수 있는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버린 것은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대로 “망령된[βέβηλος, 신성하지 않는, 세속적인, 모독적인, 불경스러운]” 거래였다.

도저히 이성적으로는 납득이 불가능한 거래를 한 에서는 다음 구절에 나오는 대로 이것을 회복하고 싶었지만 그야말로 끝나버린 거래였음을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17f) 즉, 모든 사람이 아는 어리석음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17m) 이 표현은 창세기27:38 “에서가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라는 내용의 인용이다.

에서가 소리 높여 울어 댄 이유는 하나님의 복의 권리인 장자권을 가볍게 여긴데 대한 아쉬움이나 회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단순히 복을 잃어버렸다는 다분히 기복적인 이유에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회개의 눈물이라고 할 수 없다.

영적인 복에 있어서 사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보다 중요한 것은 그 복을 주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이다. 이런 입장에서 짐짓 많은 그리스도인의 안타까움은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제쳐 두고 단순히 그분이 주실 수 있는 복만을 구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럴 때 에서처럼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17b)가 되고 마는데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라고 눈물로 축복을 간절히 구했어도 호소력을 갖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복의 계보를 이어받아 지속적으로 그 하나님과 복된 교제를 이어가는 그런 올바른 관계의 회복을 구하는 회개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버린 바 되었고, 복의 자리에 되돌아올 수 있는 회개가 아니었던 것이다.

오늘 복음 속에서의 진정한 복은 무엇인가? 에덴에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를 회복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되면 모든 것이 바로 된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가볍게 여기고 믿음의 자리를 떠난 배교자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것으로 현세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두려운 경고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로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가지게 된 은혜에 합당하게 같은 믿음의 동료이건 불신의 사람이건 화평을 위한 제사장 역할을 감당하고 자신의 경건을 지켜 기쁨과 감사로 다시 오실 주님을 맞아야 한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 속에서 쓴 뿌리의 역할로 혼란케 하고 병들게 하여 다른 지체들의 경건을 잃게 만든다면 이런 자세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할 믿음의 자세이다. 여기에 대해 단호하게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라” 경고하고 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에서처럼 순간적이고 없어질 것들로 영원의 영광과 바꾸려 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그러나 한번 잃은 은혜의 기회를 놓치는 것은 제 시간에 떠난 교통수단을 놓치고 후회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니 그것과 비교될 수 없는 비극이다. 놓친 열차나 항공편은 다시 시도할 수 있지만 한번 잃어버린 영원의 가치는 영영 회복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귀한 복의 기회를 잃고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는 에서의 안타까움을 거울로 보고 결코 이런 어리석음을 범치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