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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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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2:18~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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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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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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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N, OT의 신앙의 분명한 차이를 앞에서도 완벽하게 구분했었지만 바로 앞에서 언급한 에서와 야곱의 간격과 관련하여 다시 한번 율법과 복음의 간격을 정리하는 것으로 완성된 복음을 거역하는 것은 더 이상 소망이 없음을 경계하는 내용이 이 12장의 나머지 부분이다.
창조주요 구세주 이신 하나님을 가까이 뵙는다는 것이 죄를 짓는 사람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두려움인가를 과거 이집트를 빠져나온 후에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뵈었던 모세를 비롯한 이스라엘의 겪었던 두려움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거기에 비교한다면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시고 친히 죄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시고 사죄를 힘입은 은혜의 상태에서 하나님을 뵙게 되는 사실적인 하늘의 시온에서의 영광이 얼마나 영화롭고 놀라운 변화인가를 오늘 말씀의 뒷부분에서 증거하고 있다.
다음 주 나머지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렇게 완벽하게 두려움을 제거하고 영광에 함께 거하게 되는 복음의 영광을 거절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경계하는 내용으로 기록되고 있다
율법아래 오로지 두려움과 공포스럽기만 했던 영광의 하나님을 감사와 찬양으로 섬기고 임마누엘을 누린다는 엄청난 특권을 거절하고 외면하는 것이 얼마나 큰 비극인가를 경계하는 내용이다.
Ⅰ. 하나님의 임재의 두려움(18~19)
하나님의 열 가지 이적으로 마침내 이집트를 빠져나왔지만 그들을 권능과 능력으로 이집트를 탈출시킨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신들에게도 두렵고 무서운 존재였음을 최초로 계명을 받는 시내산에서 경험을 먼저 소개한다.
물론 이러한 경험을 그대로 소개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죄를 해결하고 만나게 되는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하고 평안한 대상인가를 극적으로 소개하기 위한 경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간격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집트의 장자들을 죽이시는 형벌 속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문설주와 문인방에 양의 피를 바르고 구운 유월절 양을 먹으며 평화롭게 밤을 지냈던 주님의 백성들과 집집마다 장자를 잃은 이집트 가정들의 차이이기도 했다.
결국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으로서 사랑받는 사람들과 그 반대로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형별의 대상으로서 간격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분명히 범죄한 인류와 다른 거룩한 분이시고 사람과 다른 신령한 분이시다. 그럼에도 사람으로 감당할 수 없는 구별된 하나님에 대한 감정은 두려움이라는 한 가지 대상에서도 다를 수밖에 없다.
아무리 두려운 대상일지라도 가깝게 교제를 나누는 형편에서는 오히려 더 존경이 가는 경외의 대상일 것이고 잘 알지 못하는 두려운 분은 그냥 무서운 분이라는 공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차이가 율법과 복음 속에 하나님을 다르게 느끼게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유가 될 것이다.
여기 앞부분에서는 먼저 일곱 가지 정도의 보이는 현상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으로서의 항목들을 묘사하고 있다. 어떤 나타나는 현상들이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함으로 공포스러울 수도 있다. 그것이 소리가 되었던 모양이 되었던지 하나님께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임재는 두려움뿐일 것이다.
이것이 먼저는 나 개개인 속에서 확인되어져야 할 것이다. 자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나를 죄에서 구원하신 그 하나님은 다만 두려움의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한없이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며 다정하신 목자 같은 주님이신가?
이 질문에는 당연히 우리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섬겨오고 대해온 바탕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충성되게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온 하나님이시라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다만 나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한 분으로 이해되어 질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기쁘게 감당하지 못하고 부분 부분만을 억지로 감당해 왔다면 그만큼 하나님은 멀고도 두려워할 분으로만 여겨질 것이다. 결국 율법과 복음 속에서의 차이도 깊이 이해하고 순종하는 하나님과 그렇지 못한 간격일 것이다.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18~198f)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나려고 했던 시내산에서의 보이고 들려지는 모든 것들은 어느 것 하나 분명한 것이 없어서 하나님께 대해서 ‘이것이다!’ 할 어떤 것도 없이 하나님에 대하여 더욱 모호하게 하는 것들뿐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19)라는 부탁을 통하여 오히려 자신들이 알고 보고 있는 모세를 통하여 말씀해 주실 것을 부탁드렸던 것이다.
뒤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들어가게 되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하늘의 영광과 다른 보여지는 것들이나 들리는 것들이 정확할 수 없고 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마다 다르게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이 사실 우리의 시각(視覺)과 청각(聽覺)의 한계이기 때문에 더 이상 두려움으로만 하나님에 관한 보는 것과 듣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이미 10:31에서 원수를 갚으시는 하나님의 대상으로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라는 두려우신 하나님을 이야기한 바 있다. 어떤 경우에서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대상으로 남아서는 안될 것이다.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두렵고 무서운 공포스러우신 하나님이시지만 공의와 사랑을 의지하고 맡길 수 있는 믿음의 백성들에게는 한량없이 너그러우시고 용서하시는 그러면서도 공의를 따라 상주시는 하나님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릴 수 있어야할 것이다.
Ⅱ. 모세조차도 두려워했다(20~21)
임재 해 계신 하나님 앞에는 그 거룩함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물론이고 짐승조차도 함께 할 수 없었음을 경계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런 입장에서는 짐승이나 다름이 없는 바른 영성을 갖지 못한 사람이 더 경계될 수 있는 비유로 여겨진다.
OT에서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대상을 돌로 치는 형벌을 명령하셨는데 사실 이 돌을 던져 죽이는 형벌은 어떤 징벌 보다도 끔찍한 것이어서 그것이 어쩌면 무서운 모범이 되었다. ‘그렇게 하면 돌에 맞아 죽는다.’ 지금도 복음을 인정하지 않는 모슬렘 세계에서 여전히 돌을 들어 치는 형벌이 허용되고 있다고 하는데 참으로 끔찍한 형벌로 사람으로서는 행할 수 없는 비극적인 모습이다.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20)
사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면서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짐승으로 비유하고 다루는 것들을 더러 볼 수 있는데 율법 속에서는 물론 복음 속에서도 볼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는 물론이고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에게서 종종 볼 수 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시22:16)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시22:20)라는 다윗의 안타까움을 듣는다.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 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사56:10~11)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빌3:2)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벧후2:12)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도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유1:10)
사실 사람과 짐승의 차이는 보고 듣고 이해하는 것이 사람은 가능하지만 짐승은 불가능함을 본다. 아무리 보고 들어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한다면 짐승에 불과하다.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짐승이라면 하나님 앞에 온다고 해도 가치가 없다.
최초로 이스라엘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영광은 보이는 것에서도 위엄과 존귀와 영광으로 충만하여 짐승이 아닌 이상 이를 영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경외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 영혼이 누구보다도 고요함을 가진 모세 조차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21) 여기에 “그 보이는 바”란 사람의 오감(五感)으로 듣고 보고 느낄 수 있도록 시내산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위엄스러운 영광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렇듯 무섭기로” 처음 에덴에서 특별히 창조 받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뵙는 것이 결코 부담스럽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따먹은 후에는 상황이 달라진 것으로 이해되는 것은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는 아담의 고백에서 깨닫게 된다.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21) 하나님의 임재를 모세는 광야 가시 떨기 불꽃 가운데서부터 경험하였고 천사는 모세에게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사람은 겸손해야 할 것을 주문하신 바 있다.
그럼에도 모세는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평화의 사람이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12:3)는 말씀은 사람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사실이다. ‘온유함’이나 ‘화평함’은 모두 두려움이 없는 평안의 상태를 의미하고 모세는 율법을 위해서 이건 또 다른 이유에서 건 불안을 모르는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면대하신 사람이었다.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민12:7~8)고 하나님께서 직접 인정하신 사람이다.
이런 모세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전체와 처음 임재하여 뵙는 하나님 앞에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21)는 고백을 하고 있다.
사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짐승처럼 고집을 부리면 안된다. 겸손과 온유로 우리 사람을 짐승의 가치와 다르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경외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으로부터 모세처럼 쓰임 받는 일꾼으로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지만 보는 것과 듣는 것으로는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었고 그 곳에는 모세를 포함하여 어느 사람도 완전한 사람이 없는 죄로 인하여 형벌에 공포를 가진 사람들뿐이었다.
이제 말하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완전한 사죄의 감격으로 보거나 듣거나 하는 시각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완전히 교통이 가능한 천국을 말하기 위한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다.
Ⅲ. 임마누엘은 공포가 아니라 평안이다(22~24)
앞에서는 죄진 인류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위엄과 영광을 보이심으로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로 접근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인하여 두려워했던 시내산에 임재하신 거룩하심을 감당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초라함을 표현하였다면,
여기에서는 영광의 하나님 앞에 공포스러웠던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사죄를 받고 육신의 가치를 넘어서 영원한 영광에 들어갈 수 있는 변화 받은 사람이 육신과 세상에서의 삶을 극복하고 최종적으로 들어가게 되는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는 감격을 찬양하고 있다.
앞에서 시내산에서의 물질적으로 묘사되는 시각적인 것들이었다면 여기서는 하늘의 본래적으로 비 물질적인 신령한 조화를 묘사하고 있다. 당연히 이 구성 자체의 중심은 모든 불경건을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앞의 두렵고 접근하기 쉽지 않은 공포스러운 시내산에 반대되는 곳을 말하려는 것으로 “이른 곳은”이란 나아갈 자격을 얻어 당당히 나아간 것으로 과거 죄로 인하여 접근이 불가능했던 하나님의 영광과 반대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접근할 수 있는 전혀 새로운 조건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가 바로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22) 한 것처럼 지상에 하늘의 모형을 따라 설치한 단순한 모형으로서 예루살렘의 성소나 지성소가 아닌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수를 헤아릴 수 없이 거느린 천사들과 함께 이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늘의 시온산으로 요한이 계시를 통해서 볼 수 있었던 영광의 성소를 그대로 표현한다.
그곳의 하나님과 더불어 구성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무리들을 여러 모양으로 중계해주고 있는 내용들을 이렇게 묘사한다.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23)
과거 율법시대에 선택받은 백성 중에 구속의 역사를 사모하며 오실 메시야를 기다렸던 비록 분명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그 약속을 따라 평생을 살았던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물론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고 그 십자가의 희생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평생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산 생명록 책에 기록된 성도들로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 장자들은 앞의 v16에서 “…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하였지만 단순한 육신의 장자들이 아닌 야곱처럽 하나님의 복을 이어받기 위해 신령한 복을 사모했던 요셉과 같은 믿음의 장자들을 의미하는 표현들이다.
여기에 붙여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했는데 다시 한번 온 우주 만물의 존재이유가 되시고 삶과 죽음의 권한을 가지신 창조주요 구세주 이신 하나님이 강조되고 창세전의 교회 예정을 통하여 정죄받을 이유가 없이 완전히 은혜의 피로 깨끗함을 받은 이 역사를 마지막으로 정리할 것을 기다리는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계20:4)을 증거하고 있다.
역시 이 말씀의 마무리도 이 역사의 중심에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자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심을 증거한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24)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와 주님의 사역을 겹쳐서 증거하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율법을 받아서 이스라엘에게 전달했던 모세가 옛 언약의 중보자였다면 짐승의 피가 아닌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9)는 실패할 수 없는 새언약의 중보자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24)는 표현은 주님의 복음으로서 인류를 죄에서 해방하신 사역과 사죄의 십자가 희생의 피를 최초의 죽임을 당한 아벨의 피와 비교하고 있다. 물론 아벨도 죄의 대가로 피를 흘린 것은 아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에덴에서 쫓겨나 에덴의 동쪽에 터를 잡고 자식을 낳고 번성하지만 죄가 끼어든 인간관계는 사랑의 관계이기보다는 경쟁관계가 되고 이런 상황은 아직 죄가 해결되지 못한 세상에서는 지금도 다르지 않다.
이런 비극을 해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죄의 피해자로 흘린 아벨의 피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아벨의 피는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4:10)시는 하나님의 책망처럼 억울함의 호소이다.
즉, 아벨의 피는 원수를 갚아줄 것을 호소하는 뿌린 피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은 원수처럼 죽일대상으로 사람의 관계를 망가뜨리는 죄를 해결하시고 보다 근본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함으로 인간관계는 물론 모든 자연과 우주 관계속에도 화해를 이루시는 사랑의 호소이다.
죄진 인류가 하나님과 만남을 시작했던 곳이 시내산이었고 사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두려움만이 창조주를 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장차 영원한 임마누엘을 누릴 곳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벌어지게 한 죄를 해결 받고 하나님과의 완전한 새 언약의 중보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희생의 피를 힘입어 영광을 누리는 자들과 함께 화평과 기쁨을 영원히 나누게 될 것이다.
오늘 시내산에서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힘겨워하는 이스라엘과, 살아 계신 하나님 영광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의 천사들과 성도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 중 어디에 더 쉽고 편한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오늘 우리 각자가 헤아려야 할 것은 보이는 외형적으로 든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에서 이든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이 감격이 되고 기쁨이 되는 신령한 교제에 익숙한 사람이어야지. 진리와 영적인 것들에 함께 하는 것이 부담이 된다면 나중 하나님의 영광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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