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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히 12:25~29 2022-12-11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우리는 바로 앞에서 시내산에서 오직 두려움으로 임재 해 계신 하나님을 대할 수 없어서 빨리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기를 소원하며 모세에게 간청하던 OT의 언약 속의 이스라엘의 공포(18~21)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완성된 하늘의 회복된 예루살렘과 그 안의 창조주요 구세주 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그리고 교통하는 하늘의 성도들의 비교(22~24)를 본 바 있다.

제사장 나라로 선택(출19:6)되어 사용되었지만 메시야를 이 땅에 오시게 했음에도 그 그리스도를 거역하여 멸망한 이스라엘의 유한 한 세상 속에서의 경계를 그리고 그들의 실제적인 후예들인 히브리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제 영원 속에 유효한 언약을 거절한다면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음을 마지막으로 경고하고 있다.

우리 일상에서도 거절해도 다시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거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거절하고 두고두고 후회할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아야 하는 경우를 세상에서도 더러 있는 일들이다. 그러나 우리 말에 ‘땅을 치며 후회할 일’은 영원을 잃고 탄식하는 일일 것이다.

성경에도 이런 내용들을 더러 보는데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부자와 나사로의 일이었다. 오죽하면 이 부자는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눅16:28)라는 하소연을 아브라함에게 하게 되었는가!

그렇다 때로는 잘 못 판단하여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거절해버리는 일은 온전한 지혜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더러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영원히 후회할 일을 하는 것은 최대한 막아야만 한다.

오늘 말씀은 결론이나 정리를 하지 않을 것이다.



Ⅰ. 경고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25)

“너희는 삼가 말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먼저는 대조되며 반복되는 두 낱말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거역”과 “경고”라는 두 단어가 그것이다. 이 두 낱말은 서로 연관성을 가지면서 다 반복될수록 좋지 않은 의미를 가지는 낱말이다. 그리고 그 출처를 “땅에서”와 “하늘로부터”로 그 중요성을 비교하고 있다.

“너희는 삼가 말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f) 사실 말해도 말해도 듣지 않으면 결국 경고로 진행할 수밖에 없다. 특히 “삼가”라는 말이 앞에 나타나 강조적이다. “삼가”라는 본래적 의미는 “보다(βλέπω, see)”라는 의미에서 출발한다. 빤히 보면서 손해볼 일을 하는 것이 어리석은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초청을 보면서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죄진 인류를 위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결코 죽음으로 가는 인류를 향해 잠잠하실 수 없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이 특권이고 그럼에도 쉼없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듣지 않아서 망한 역사는 구원의 이스라엘 속에서도 수 없이 보는 사실이다.

요즘이야 워낙 거짓이 많고 속이는 일이 흔하기 때문에 어떤 말을 해도 일단 의심부터 해놓고 보는데 사실 이것은 비극이다. 서로 신뢰의 관계보다 편하고 좋은 것은 없다. 죄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랑과 진리로 말씀하시는 것조차 의심부터 하고 들으려고 하니 참 안타까운 일이다.

이집트의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능력으로 자유케 하시고 이제는 완전한 자유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도 믿지 못해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이집트가 좋았다고 차라리 거기에서 나오지 않았었다면 광야에서 죽지 않을 것이라고 계속 원망하던 이스라엘에게 끊임없이 확신과 소망을 말씀하시지만 결국 은혜를 거역하던 사람들은 모조리 광야에서 죽고 만다.

결국 그러므로 “너희는 삼가 말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f)는 본보기는 먼 이야기가 아니었다. 사랑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적어도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10b)라는 사무엘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

결국 이집트라는 세상에 익숙한 이스라엘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요청대로 직접 말씀하실 수 없어서 모세를 중보자로 말씀하셨는데도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실 때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19b)라는 상태였다. 그 두려움과 경외감은 다 잃어버리고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말씀을 거역하고 만 사실을 돌아보면서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m) 이라는 과거의 사실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땅에서 경고하신 이”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과 그 이후의 모든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것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셨지만 다음의 경고하시는 이는 모세가 아니라 친히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특히 땅에서 경고를 받은 이들은 “그들”이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가까이 가져와서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b) 즉, “우리일까보냐”라고 한층 강화되고 직접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

마치 계시가 사람에게 자연에서 성경으로 주어진 것이 점진적이었듯이 그때 그들에게 말씀하셨던 하나님은 오늘 여기 우리에게 말씀하심을 듣는 것으로 땅에서 보면서 두려움으로 들었던 경계를 거절하였다면 이제는 하늘에서 직접 말씀하시는 언약을 거절한다면 더 이상 기대의 여지가 없다는 말씀이다.

과거에는 돌과 양피지에 기록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 종이나 먹이 아니라 바울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을 편지로 표현하면서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고후3:3)고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육신의 삶에 복을 약속했던 과거 율법의 기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거절한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이미 10:27에서 봤던 대로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는 두려운 경계를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Ⅱ. 하늘과 땅이 진동될 때가 있을 것이다(26~27)

(26)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27)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시내산에 영광과 위엄의 하나님께서 오심으로 산이 진동하고 그로 인하여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던 것처럼 이재 이 역사의 마지막에는 시내산처럼 한 지역의 땅이 아니라 땅과 하늘을 뒤흔드는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희생으로 구원을 완성하시고 그 은혜로 거듭난 자들을 영원으로 데려 가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오실 것을 예언하는 말씀이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순간의 역사와 이 지구와 우주을 창조하시고 사람들에게 주셨지만 이 모든 순간적인 것들은 사실 영원을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들로 영원의 역사가 완성되고 다가왔을 때 이 순간(瞬間)에 속한 물질적인 것들은 폐한다는 것이 성경에 말씀해 오는 사실이다(사34:4; 벧후3:10~12). 바울 사도도 이러한 역사를 데살로니가전서4:15~17에 증거한 바 있다.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26f) 이집트를 나와 시내산에 임재 하셨던 하나님의 위엄을 이스라엘 전체가 친히 경험했던 사실을 다시 묘사하고 있다. 시내산에 모세를 통하여 준비하게 하신 하나님의 임재의 모습이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출19:16)고 기록되고 있다.

다시 v18~19에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 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는 기록을 볼 수 있다.

거기에 좀 더 진보된 언약을 주셨음을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26m)라는 말씀에 이어지고 있다. 이것은 과거에 있었던 역사가 아니라 장래에 있을 약속이면서 하나님의 경외하며 섬긴 자들에게는 감사의 언약이지만 과거 신내산에서 하나님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두려운 약속일 뿐이다.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26b) 우리가 자주보는 사실이지만 천둥이 치면 땅과 하늘이 동시에 흔들림을 볼 수 있고 과거에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도 다른 것이 아닌 나팔 소리였다.

앞에 인용된 대로 시내산에서 들리는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임재에 자주 나타나는 현상들이었듯이 바울은 주님의 재림의 순간에도 그대로 증거하고 있음을 본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살전4:16f)

사람들이 만들어 부는 은이나 뿔나팔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들릴 소리로 요한계시록 8장에는 일곱나팔이 이 역사의 마지막에 울릴 것도 예언되고 있고, 이로 인하여 땅과 하늘이 진동될 것을 예언하고 있는데 과학적인 이론에서도 큰 건물의 흔들림이 작은 환풍기에서 비롯되는 것들을 볼 때 충분히 합리적인 증거이다.

이제 다음절에서 이 말씀이 해설되고 있다.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27f)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는 땅이 진동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속에 더러 있어왔던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임재하심으로 땅을 흔드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여기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27f)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역사에 마지막으로 오실 재림의 때를 마음에 두고 하는 말씀으로 이해된다. 주님 자신을 바라는 자들을 위해 다시 오심은 보이는 세상을 정리하시고 영원한 세계로 주님께 붙은 사람들을 데려가시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그 다음은 두 번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가 어렵지 않은 것은 연결되어지는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27m) 이제 영원하신 하나님의 것들을 흔들림 없이 보존하기 위해서 항상 상대적인 보이는 것들을 정리하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27b) 출애굽 시대에도 그랬지만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더욱 분명하고 확실한 언약을 주셨는데(1:2) 그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신들의 고집대로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불경스럽게 여기고 불순종한 사람들을 형벌하시는 것도 사랑의 하나님이자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당연한 언약 중의 하나이다.

불신의 사람들은 항상 보이는 것들 즉, 눈으로 보기에 확실한 것들에 기대와 소망을 두고 어찌 보면 더욱 귀중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지 않기 때문에 형상을 갖지 않으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

바울은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 증거하였고 이 히브리서에도 “…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11:3b)고 보이지 않는 영적이 세계가 보이는 세계의 근원임을 증거한 바 있다.

그러므로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27b) 하신 것은 이 보이는 세계에 모든 것을 의존하고 오로지 보이는 것으로 행하는 불신의 사람들이 의존하는 이 보이는 세계를 모두 정리하실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이 낙심하지 않을 이유를 베드로 사도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3) 라고 확인해 주고 있다.



Ⅲ. 은혜를 받은 대로 경건함으로 섬기자(28~29)

(28)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이제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은 믿음의 백성들에게 주는 당부의 내용이다. 우리가 받은 약속은 어떤 경우에도 요동치 않을 불변의 나라이며 지금도 계속 부으시는 은혜를 놓치지 말고 우리를 도저히 불가능한 비극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백성으로 삼으신 그 하나님을 세상의 다른 종교와 다르게 경외함으로 기쁘시게 섬겨야 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28f) 이것은 적어도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확신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비유 중에 주신 약속과 다르지 않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25:34)

세상의 모든 영광이나 권력은 항상 유동적이다. 즉, 흔들리고 변화무쌍하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반석같이 든든하게 보여도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이유와 방법으로 무너지고 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하루아침에 왕의 자리에 앉았다가 포로가 되어가는 경우들도 성경이 기록한 역사에서조차 더러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이라는 고백은 이런 모든 세상의 변화하는 권력과 다른 창조주의 권력이며 이 세상의 군주들에게 권력을 주시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시는 왕 중의 왕이신 최고의 권력으로 주어진 권세이다.

많은 사람들은 변화무상한 이 세상에 불안하고 절망하지만 이런 하나님께서 찾아 주신 나라의 백성으로 선택된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흔들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이라는 확신 때문인데 그것도 이미 “받았은즉”이라는 과거에 이미 받아 계속 누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지불하시기까지 치열한 싸움을 싸우셔서 우리에게 주셨지만 우리 자신들은 이 나라를 총칼로 싸워서 빼앗은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즉, 선물로 거저 받은 것이라는 데도 충분히 감사할 이유가 된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고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럼에도 이 은혜의 나라에 들어온 자들에게 선물은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주어지고 있다. 그런 이유에서 이 히브리서 기자는 강권하기를 “…은혜를 받자…”(28m)고 당부하고 있다. 세상의 선물도 주는 시기가 지나면 받을 수 없지만 우리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과 다르게 주시는 것을 결코 그치지 않으신다.

감사하게도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라고 항상 증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넘치도록 주시고 끊임없이 주시고 그 은혜를 끊지 않으시는 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고 받은 은혜를 어떻게 사용하여야 하는 것도 헤아릴 필요가 있다.

히브리서기자는 그 주시는 은혜를 사용할 방법도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28b) 이것이 바로 은혜 받은 자의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인 것이다.

“은혜를 받자”한 다음에 “이로 말미암아”로 은혜 받은 자의 삶의 자세를 자연스럽게 증거해 주고 있다. 그 첫째는 “경건함(εὐλάβεια)”으로 이 말은v5:7 예수 그리스도께 사용되어 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오늘 이 본문과 빌립보서에서는 주로 “두려움”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거저 받았으니 아무나 거저주시는 그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공경하고 존경하며 그 사랑과 은혜에 보답할 양으로 신앙의 신중성으로 기도하고 구원을 이루어가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여기 사용된 “두려움(δέος)”은 NT에 여기 한 번만 사용된 낱말로 주로 신앙에 있어서는 주로 “경외(敬畏)”라는 말로 사용된다. 은혜 받은 자의 삶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대로 경외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다가 아닌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라고 연결되기 때문이다. 세상적으로는 두려워하는 곳에는 사실 기쁨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경외감을 가지고 섬길 때 비로소 자긍심과 신령한 기쁨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앞에서 인용한 5:7의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배우게 된다.

또 이러한 이유들을 마지막 절에서 본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29) 쉽게 표현하면 “우리 하나님은 태워 없애는 불이심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을 사람의 성격에 비유한다면 급한 성격을 묘사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 적용할 때는 전혀 다르다.

우리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성품을 두가지로 묘사한다면 공의와 사랑이고 복음속의 표현으로 진리와 은혜라고 할 수 있다. 우리 하나님의 성품은 이 두가지에서 절대로 치우치는 경우가 없으시다. 당연히 그의 참된 백성도 이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으려고 힘쓸 것이다.

믿음의 백성들에게는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시지만 불신과 불순종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진노로 소멸하시는 불이신 하나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