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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이미 OT성경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는 더 과격한 권면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미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사랑을 알고 산다면 그런 신앙의 삶이 되어서는 안되지 않느냐!’는 이유에서 그랬을 것이다.
어느 부분에서는 바울의 권면이나 당부보다 더 직접적이고 과격하기까지 한 내용도 더러 보았다. 특히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경고들이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이러한 권면도 원수에 대한 비난이나 대적하기 위한 것이기 보다는 사랑이 바탕이 되고 있는 데서 역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다르지 않다.
이제 이 히브리서는 일반적인 신앙의 논리와 권면을 마무리하고 마지막 권면과 인사말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 이런 결론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또 무슨 말이 나올까?’하는 긴장감 보다는 보다 가까운 삶의 부분의 믿음을 정의해 주고 있다.
야고보서가 주로 그렇지만 대부분 바울의 서신들도 신앙의 논리를 가르친 다음에는 반드시 그러한 신앙적 논리가 삶에 적용되어져야 할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신앙의 편지나 서신들이다. 아무리 그럴싸한 신앙적 논리도 삶을 움직여 가지 못한다면 공염불이나 모레위에 지은 누각(樓閣) 같은 교훈이나 다름이 없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주신 교훈들은 그것을 삶에 실천하려고 할 때 반드시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그러므로 바람직한 믿음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음은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주신 약속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믿음의 백성들도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특별한 사람들일지라도 여전히 세상 속에 살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일반적인 사람들과 삶이 다른 것은 삶의 기초가 육신이 아니라 영적이기 때문이다.
이 결론적인 내용에서는 먼저는 오늘 다루게 되는 사회 생활에 있어서 교훈 하고 다음에는 ~v17 교회생활에 관한 교훈을 주고 있다. 이러한 권면들은 오늘 혼란한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구분해 주고 있다.
결국 이 모든 삶에 있어서 최종적인 평가는 사람이나 사회가 아니라 하나님께 받을 것이기 때문에 현실의 반응에 민감할 필요가 없고, 또 상대의 반응에 관계없이 사랑과 의를 행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의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면서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라고 보호와 상급을 하나님께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Ⅰ. 형제사랑은 지속적으로(1~3)
모든 신앙적 권면 후에 여전히 강조되는 것은 형제사랑이었다. 1세기에 유대교로부터 건전치 못한 거짓된 신앙으로부터 유혹을 받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가장 일반적인 힘은 바로 자신보다 어렵고 힘겨운 처지에 있는 형제들을 위한 사랑이었다.
유대교에도 동포에 대한 사랑과 고아나 과부, 그리고 나그네에 대한 배려를 가르쳤지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의무감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사랑을 받는 자들 만이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특히 위장된 거짓종교에서는 있을 수 없는 항목이다.
이런 이유에서 교회 안에서 한번이라도 세상과 다른 사랑을 맛본 사람들은 그 형제사랑에 엮일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모든 밖으로부터 나타나는 유혹들을 물리치고 이길 수 있었다. 그럼에도 오늘 날은 이러한 사랑도 많이 퇴색되어 가고 있음을 본다.
성경도 마지막의 징조로 들고 있는 것이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2)는 것은 벌써 나타나고 있는 모습들이다. 주님의 이 경계는 진리 즉 법은 사랑과 함께 하고 불법은 사랑을 잃게 만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감정적인 부분이 더 강하고 사실적인 것이기 때문에 교육이나 강요에 의해서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이면 그 크신 사랑받음이 힘이 되고 활력이 되어서 그 받은 사랑은 당연히 옆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1) 하였는데 이 말은 이미 그들이 형제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전제로 한다. 그런 이유에서 다만 이미 하고 있는 것을 멈추지 말라는 의미에서 “계속하고” 라는 당부를 주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한 바울의 당부를 보면 “형제를 사랑하며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12:10) 했기 때문에 상대의 반응에 관계없이 해야 하는 것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리고 나를 사랑하신 역사에 대한 순종이라고 볼 수 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많은 모범 중에서 이 형제사랑도 거론되고 있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살전4:9)
유대인의 수사도라고 하는 베드로 역시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1:22) 하는 것도 이미 저들이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라는 것으로 봐서 실천을 하고 있었고 이 귀한 역사를 중단하지 말라는 당부다.
또 다른 베드로 사도의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1:7)는 교훈은 v4~ 보는 대로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4)한 다음에 신앙의 성장의 최종적인 결과로 형제 우애 즉, “형제 사랑”를 확인하고 있음도 믿음이 자라야 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2) 사람 스스로는 절대로 의로울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한 교회의 실천편에서 바울은 이 사실을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12:13)는 같은 당부를 주고 있다.
OT에 익숙해 있는 히브리인들에게 저자는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2b) 창세기 18장에 아브라함을 찾아왔던 3천사의 이야기를 예로 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브라함은 처음에 그들이 천사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잘 대접했다가 이삭의 탄생을 예언 받는 복된 계기가 되었다.
물론 하나님을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복받는 비결로 전승되고 있는 것은 동서양이나 대륙을 막론하고 다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아랍권을 포함한 중동은 물론이고 몽골의 유목민들, 그리고 과거 남미의 잉카문명에서도 전례 되고 있는 관습들이다.
그러므로 이 손님 대접은 자신과 전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을 접대한다는 데서 모두가 자신이 섬기는 신이 거기에 대해 보상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는 신앙적인 요소가 있는 행동이다.
하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야 당연한 것으로 사실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것은 그 대접받은 나그네로부터 되갚음을 받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마지막 때를 예언하시면서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마25:35) 라고 보상하시겠다는 언약을 주셨다.
물론 이 말씀 속에서의 손님 대접은 당시 1세기에 복음을 전하며 전혀 숙식을 제공받지 못하는 복음의 전파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가르침이 가장 구체적인 이 당부의 이유로 이해되어지고 있다. 요즘이야 모든 교회들이 그렇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자립 된 교회들은 말씀의 사역자들의 생계를 책임져 주지만 복음이 환영받지 못하던 1세기 당시의 순회하며 생명의 진리를 전하는 주님의 종들은 오히려 박해받는 일이 더 많았던 것으로 기록들은 전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인 윤리규범의 세번째는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3)는 좀더 복음으로 인하여 갇히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처지에 동참하라는 당부를 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갇혀 스스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죄인 된 인류를 위하여 이 죄의 감옥인 세상에 친히 내려오셔서 자신이 죄의 형벌인 사망을 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의 저주에서 자유케 하셨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요즘은 형무소에 갇혀도 먹는 문제나 지내는 것이 일반적인 사회에서와 같지는 못할지라도 국가적으로 보호되는 일들이지만 1세기에는 가족이나 동료들이 음식을 넣어주지 못하면 굶어 죽는 일이 일반적인 것으로 국가나 감옥이 갇힌 자들의 의식주를 해결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의식주를 넣어주는 사람들은 그 갇혀 있는 사람과 같은 취급을 받기도 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영치금이나 먹을 것을 공급하는 것이 더욱 어려웠다는 내용들을 역사(歷史)에서 전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시 말세의 예언에서 그 갇힌 자를 찾아보는 것이 곧 자신을 찾아본 것이라는 말씀을 주고 계신다.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6)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형제사랑은 상황 속에서 전혀 자신과 관련이 없고 대가가 없는 대상에게까지 확대되고 있는 것을 본다. 이런 내용에서 믿음의 사람들의 형제 사랑은 마치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반응에 상관없이 사랑하시는 것과 같은 원리를 당부하고 있다.
Ⅱ. 결혼은 귀히 여기라(4)
가장 사회에 민감한 영향을 보이는 것이 사실 결혼생활 즉, 혼인한 부부관계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회 경건의 지표가 혼인 생활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의식하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육신의 부부생활도 그만큼 깨끗하고 경건하게 유지하게 된다.
죄가 범람하는 인류의 안타까운 상태는 결혼을 귀히 여기지 않는 모습들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 서약을 하면서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 풍부할 때나 어려울 때에도 변함없이 사랑하겠다.’는 맹세를 지키지 않고 요즘은 이제 이 지켜지지 못하는 언약조차도 혼인예식에서 하지 않는 것도 보게 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혼인관계는 적어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이해해야 하는 것을 에베소서5:22~33에서 기록하고 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22)하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섬기는 것처럼 남편에게 순종이 안되면 복종이라도 해야 할 것을 당부한다.
그러나 남편에게도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25)고 명령하신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33)고 양편 모두에게 권면을 주고 있다.
이 바탕위에 자녀가 생기고 부모를 봉양하게 된다. 이런 신앙적 규칙이 지켜진다면 혼인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쪽이라도 이 주님의 명령을 거역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을 것이고 평생의 언약인 결혼은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f) 결혼은 어느 결혼은 귀하고 어느 결혼은 덜 귀하지 않은 혼례에 차별은 있을 수 없다. 이 사회의 건강은 바로 각자의 결혼생활이 그대로 바탕이 되기 때문에 혼인의 문제는 중요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결혼이라는 제도를 만드신 이유를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전7:2)고 확인하고 있다. 두 사람 간의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것은 침소를 더럽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침대나 침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관계를 바르게 지켜갈 것을 당부하는 교훈이다.
이렇게 결혼의 관계를 귀중하게 다루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제도에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반드시 심판하시겠다는 두려운 경계를 주고 있는 것이다.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b)
적어도 결혼의 관계는 그냥 두사람이 함께 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가장 근본적인 삶의 모토가 있고 창세후부터 하나님께서는 혼인의 관계를 귀중하게 다루고 계시다. 이 관계를 바르게 하지 못하는 당사자를 하나님은 심판하신다는 무서운 경계를 주고 있다.
Ⅲ. 주님을 의지하는 경재생활(5~6)
이 마지막 부분은 그리스도인들의 경재생활에 대한 신앙적 권면이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라고 말문을 열지만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것 중의 하나로 사람들은 값없이 구원을 주신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한다.
그 이유는 영적이고 영원한 세계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가능하며 어디로 가든지 형통케 하는 것이 세상에서는 돈처럼 보인다. 이렇게 세상에서 전능한 하나님 같은 존재로 여긴다. 그럼에도 이 돈에는 인격도 없고 생각도 없고 옳고 그름도 모른다.
그런 이유 때문에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다만 끊임없이 움직여 돌고 돌아야 하는 것이라는 데서 돈일 뿐이다. 그러므로 돈은 사랑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고 사용의 대상일 뿐인데 이것이 바르게 움직이면 많은 사람을 행복하고 웃게 만들고, 어두움 쪽으로 움직이면 그 반대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힘들어 한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5f) 이런 이유 때문에 성경은 돈에 경계를 자주 주고 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3:3말미에 교회지도자들의 덕목에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라는 경계를 주고 있고, 다시 6:10에서는 본문과 같은 경계를 다시 주고 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5f) 이것은 돈을 멀리 하라 거나 거절하라는 표현이 아니라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즉, 자신의 분수에 넘어서지 말 것을 경계로 주는 교훈이다. 그런 다음 이어지는 말씀들은 그 이유를 분명히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적어도 해결책 없이 어떤 것을 명령하시는 일은 없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5f) 어디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늘 자신의 백성들에게는 친히 말씀하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자신의 자녀를 책임지신다는 확신으로 들린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5b) N, OT 성경에 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향한 언약으로 약 20회 사용되고 있고 최초의 내용들은 오늘 본문과 그 순서가 바뀐 것으로 나타난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신31:6, 8; 수1:5)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할 때 “과연”은 “절대로”라는 말과 다르지 않은 표현이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가장 큰 확신은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약속이다. 심지어는 아버지를 속이고 외삼촌집으로 도망가는 야곱에게 벧엘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창28:15b)라고 약속하신다.
모세의 뒤를 이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끄는 여호수아에게도 같은 약속을 주신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1:9)
최종적으로는 복음을 완성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주님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b)고 언약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잊고 버리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절대로 자신의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6f) 오히려 시편에는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시118:7) 라고 좀더 결과적인 확신을 고백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표현의 한계는 잊지만 하나님께서 내 편(어두움의 반대)이시고 돕는 자로 계신다는 것은 단순히 돕는 자가 아니라 우리 각자의 인생을 기꺼이 드리기만 한다면 반드시 승리하는 인생, 성공하는 인생이 되게 하실 것임을 언약하시는 표현이다.
이런 이유에서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6b)는 것은 당연한 고백이다. 나에게 실패를 끼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성공을 돕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2:22)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부터 영원까지 살아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기만 한다면 거기는 절대로 실패가 있을 수 없는 인생이 될 것이다.
형제사랑(φιλαδελφία)은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지속되어야 만한다. 그리스도인 부부와 가정은 반드시 어떤 변화속에서도 성결 하게 지켜져야만 한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말씀을 지킨다면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이나 가정을 절대로 버리지 않으시고 떠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돈이나 삶의 문제에 두려움이 없이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육 간에 성공과 자신 인생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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