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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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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3:7~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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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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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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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사람으로서 사회생활이 어떠해야 함을 증거한 저자는 이제 신앙 속으로 한층 깊이 들어와 믿음의 삶을 사는데 있어서 전혀 새로운 은혜의 삶을 누리는 그리스도인들이 과거의 율법의 제사가 아닌 영원한 속죄의 제사로 온전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의지하고 또 주님의 희생을 따라 살 것을 당부하고 있다.
특히 ~v17에서 과거(過去)와 현재(現在)의 신앙의 지도자들의 삶을 살피고 옳은 헌신을 본받는 사실적인 신앙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을 권면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간접적으로 육신의 유익을 위해 행한 에서와 같은 자세는 영원 속에서 유익을 얻지 못했음을 다시 경계한다.
더불어 영원히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역사는 과거에나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구원의 역사에 자신의 삶을 드리는 자들에게 특히, 완성된 속죄의 제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제단으로 삼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생명 진리의 교훈 외의 교훈을 부정적으로 교훈 한다.
최종적으로는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약속의 도성인 예루살렘 밖에 내침을 받으면서까지 속죄의 희생과 순종을 이룬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비록 육신적으로 볼 때 치욕을 당한 모습이었지만 그를 힘입어 속죄를 입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러한 헌신을 적극적으로 따를 것을 당부한다.
Ⅰ. 영원한 말씀에 산 자들을 본받으라! (7~9)
(7)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8)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9)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먼저는 말할 수 없는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안일을 돌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죽음을 당하기까지 한 믿음을 위하여 자신들의 삶을 포기한 신앙의 지도자들을 본받으라고 당부한다.
어쩌면 신앙은 새로운 창조이기보다는 먼저 잘 감당한 사람들의 삶을 본받는 것이 바람직한 과정인 것 같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 하였지만 이 히브리서를 기록하고 있는 때는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대할 수는 없는 때이고 그 주님을 본받아 살던 믿음의 지도자들이 말씀을 전하는 삶을 본받을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7)
나중 v17에 한번 더 같은 당부를 하고 있지만 여기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7f)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일러주고 인도하던 사람들의 구체적인 직책이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아직 사도들 외에는 교회의 직책이 일반화되어진 때는 아닌 것 같고 특히, 너희에게, 너희를 한 것으로 볼 때 일차적으로는 이 서신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신앙에 영향을 준 하나님의 일꾼들인 것 같다.
그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7b) 했는데 여기 “행실의 결말”에서 행실은 다른 사람들과 삶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그와 관계하던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어떤 사람이든지 세월이 많이 지나고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그 사람의 평가가 어느정도 정확할 수 있다. 우리 교회의 과거 말씀을 전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지금은 그래도 어느정도 객관성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음 주에 보게 되겠지만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17)는 당부는 현재 그들의 신앙을 지도하고 인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현재형으로 쓰였지만 오늘 첫 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의 충실한 말씀의 인도자들로 이제는 세상을 떠난 이들이지만 그들의 살아서의 사역은 지금도 후예들에게 좋은 본으로 가르침을 계속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기서 거론하는 사람들은 11장 전체에서 증거했던 OT의 인물들은 아니고 복음 속에 충성된 일꾼들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입장에서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11:4)라는 실제적인 믿음의 지도자들이었음을 환인 해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8) 어찌 보면 앞의 내용과 전혀 조화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왜, 갑자기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불변성이나 영원성을 거론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럼에도 어렵지 않은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은 앞에서 수많은 OT의 믿음의 선진들을 10~11장에 거론해 왔고 또 바로 앞에서는 복음을 위해 모범적인 사람들을 말한 바 있다. 또 이미 말했던 대로 v17에서는 당시의 신앙의 지도자들을 말한다고 하였고 이들에게서 공통적인 것은 그들이 모두 믿음의 모범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미 떠나버린 사람이 대부분으로 계속해서 모범과 교훈을 줄 수는 없는 시간 속에 갇힌 사람들에 불과했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나 현재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영원한 믿음의 교사요 모범으로 바뀌지 않을 것이고 본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고백이다.
물론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표현한 야고보의 가르침과도 다르지 않는 분이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8) 이런 분을 사람의 범주에 넣어서 생각하고 이해하려 하기 때문에 탄생의 날이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것이 크리스마스 같은 것을 만들게 된 이유이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9) 이 말씀도 바로 앞 절인 v8에 연결되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교훈, 진리의 교훈은 하나밖에 없다. 이것에 가장 극명한 차이가 다신교를 믿는 일반 종교와 생명의 복음의 차이라면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려고 하는 데는 다른 종류 즉, 성경이외의 많은 가르침들이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한다.
이 말씀도 두 가지로 나눠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먼저는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9f) 여기서는 여러가지 다른 교훈들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오직 하나의 교훈 즉, 복음을 말하고 있다.
생명의 교훈은 좁힐수록 좋다. 그런 이유애서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빌3:8~9f)”라는 고백과 같다.
오늘도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십자가에 나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 외에는 어떤 것에도 마음이 팔려서는 안될 것이다.
다음으로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9) 이 말씀은 9:10의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는 내용을 마음에 둔 1세기의 사람들이 만든 인위적인 경건의 방법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흔히들 이해한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12:16에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는 오로지 육신의 삶에 더 비중을 둔 삶을 경계하는 교훈이다.
성경 속에는 꼭 본받아야 할 사람들이 있고 절대로 본받아서는 안되는 사람들이 또한 있다. 이렇게 분명한 결과들을 보고 있는 오늘 우리는 그만큼 유리한 조건 속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이 가능한 유리한 입장에 있으면서도 바른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더욱 불쌍한 삶이다.
오직 영원부터 영원까지 불변하시는 영원한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따름으로 허락된 모든 은혜를 일지 않는…
Ⅱ. 우리의 영원한 속죄의 제단(10~11)
(10)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11)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이 히브리서에서 계속해서 다뤄왔던 OT의 제사와 복음의 차이를 다시 한번 결론적으로 거론하는 것이다. OT의 제사장들에게 복음의 제단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 제사가 결코 어떤 특별한 혜택도 없음을 확인하고 있다.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10) OT 대부분 제사의 제물들은 제사장들의 몫이었지만 속죄일에 드려진 속죄제의 제물은 제사장들이 먹을 권한이 없었었고 진영밖에서 불태워야만 했다.
여기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하는 제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온 인류를 위한 속죄의 십자가 제사를 거론하는 것으로 이해가 되고, 이 완성된 새 언약의 제사에서는 더 이상 OT과 같은 제사장의 역할이 필요치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자 제물이셨기 때문에 그런 이유에서 제사장의 분깃이 있을 수 없었다.
레위기16:27에서 “속죄제 수송아지와 속죄제 염소의 피를 성소로 들여다가 속죄하였은즉 그 가죽과 고기와 똥을 밖으로 내다가 불사를 것이요”라고 한 것처럼 속죄제의 모든 제물의 피는 제단에 뿌려졌지만 그 짐승의 육체는 모두 불 태워졌다.
속죄일의 제물들은 정해진 속죄일에 이스라엘의 죄와 허물을 용서받기 위하여 성밖에서 태워지는 것이었다면 새언약 속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는 역시 자신의 민족인 유대인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온 인류를 위해 예루살렘 밖에서 십자가에 피를 흘림으로 속죄를 이루신 온 인류를 위한 속제의 제물이 되셨다.
이런 입장에서 OT의 제단을 섬기던 제사장들이 복음의 역사에 전혀 관계를 갖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확인이다.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11) 앞 구절의 확인으로 OT의 속죄일의 제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의 모든 죄를 속하실 모형이기는 하였지만 복음 속에서도 여전히 구약의 율법 속에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는 전혀 효력을 줄 수 없을 것이라는 히브리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을 경계하는 교훈이다.
이렇게 울법은 그 때까지도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온 인류를 위해 예루살렘 성밖의 골고다에서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복음을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제단이다. 뿐만 아니라 같은 믿음을 가진 왕같은 제사장들에게 그의 몸과 피를 기념하며 먹을 권한을 주는 것에서 OT의 율법과는 완전히 다른 확실한 은혜이다.
Ⅲ. 주님께로 나아가자(12~13)
(12)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속죄의 제물이 되셔서 인류를 위한 제사를 친히 드리시고 제물이 되신 사랑을 받은 우리 또한 주님의 삶을 본받고 따라야 할 것을 다시 한번 당부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12)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문밖 골고다에서 희생당하신 것은 과거 이스라엘의 속죄제를 완성하시는 동시에 율법으로는 불가능했던 완전히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주님의 고난 받으심의 확실한 이유를 지적하는 데서 중요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이미 10:4에서는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고 OT제사의 한계를 지적하였다.
그러나 9:13~14에서 율법 속에서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라고 짐승의 피도 효력이 있었다면 그리스도의 피의 확실함을 확인한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13) 이렇게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입은 우리가 역시 주님을 본받고 따라야 할 것을 권면하는 말씀이다. 대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얻게 될 영광을 먼저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본다.
그럼에도 영광은 현재가 아니라 장래에 얻게 될 것인데 그 영광은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본받고 희생한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을 성경은 약속하고 있다. 주님의 안식의 초청도 다르지 않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13) 이러한 당부도 그렇게 행복해 할 명령은 아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현실에서는 주님처럼 치욕스럽고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할 수 있는 복음을 위한 삶을 당부하신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막8:34; 눅9:23) 그러므로 사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니 이런 주님의 명령과 더불어 한해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모두가 싫어하는 치욕을 짊어지고 귀한 사람든은 없는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삶이 되었는가 돌아 보는 것이다. 우리 주님의 역설적인 표현이 침례자 요한을 두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마11:8)
그렇지 못했다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이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려는 삶을 다시 새롭게 각오하고 성령을 의지하여 주님의 뒤를 바짝 따를 결심을 해야 할 것이다. 막연히 이 땅에서 만사형통과 영광만 바란다면 거기에는 안타깝게도 아무런 영광의 약속도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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