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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딤전 1:12~15 2024-09-01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건전치 못한 무리들이 교회 속에 파고 들어 율법을 악용하여 옳지 못한 가르침으로 영적 혼란을 일으키는 가운데 율법이 왜 주어졌는가를 분명히 증거한 다음에 그런 이단 사설이 범람함에도 자신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그의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람이 구원받은 사실이 너무나 감격이 되었던 것 같다.

어떤 부정적인 상황들을 보면서 그보다 결코 나을 것이 없는 자신이 그런 부류에 휩쓸리지 않고 정상적인 상태에 있다면 사실 더 황송해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마치 자신이 하려던 이야기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자신이 구원받고 일꾼으로 부름 받은 사실에 감격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사실 끝없는 족보 이야기에 더 치중할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었을 것임에도 그런 어리석음에서 빠져나와 이렇게 생명의 복음을 누리고 전하는 사실이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나 흥분되는 감사를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바울은 자신의 다른 서신들에서도 이러한 형태의 간증들을 더러 볼 수는 있지만 좀 독특한 것은 자신을 변호해야 할 대상들에게 가 아니라 자신의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이런 확신을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의 신앙간증 중에서도 오늘 우리가 읽은 부분이 단연 압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편의상 나눠서 다루고 있지만 자신의 이러한 확신에 디모데가 따를 것을 v18~20에 당부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이미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이런 가정자체가 의미가 없지만 바울의 탄생과 공부나 인생의 모든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성경에 나타나는 것만큼 결과적으로 유명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그러지 못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비교할 수도자 없지만 저 역시 그렇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주님을 섬기고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누구나 바울과 같은 확신과 감격을 누구에게나 고백할 수 있을 할 것이다.



Ⅰ. 감당케 하셨다(12)

어찌 보면 이것은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이 들을 때는 허풍처럼 들리기도 한다.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히 있는 자라”(행22:3; 빌3:5)는 과정만 봐도 요즘 우리 시대로 본다면 최고의 스팩임에도 그런 교육과 훈련의 과정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자신이 배우고 취득한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내용이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12f) 이 고백대로라면 자신은 복음을 감당할만한 능력이 전혀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가능케 하셨다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능하게 하신[ἐνδυναμόω, = ἔν,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의 전치사 + δυναμόω(δύναμις), 힘있게 하다, 강하게 하다, 강화하다.]”이라는 표현 자체가 그렇다. 전혀 무능한 자신에게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서 주님의 복음으로 섬기는 일에 하나님과 같은 능력을 주셨다는 고백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래도 감당할만한 것을 아셨으니까 맡기셨겠지!’ 라고 생각할 여지를 거절해 버린다. 그럼에도 이것은 세상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생명구원의 일에서는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세상의 어떤 지식이나 지혜로도 죄인을 구원하는 일에는 별 가치가 없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일이 아닐지라도 노예를 해방시키는 일에서 조차도 그랬던 것을 과거 바로의 궁전에서 “모세가 애굽 사람의 學術(모든 지혜)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행7:22 한글) 한 사람이었음에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미디안에서 양떼를 따르면서 영성을 훈련한 다음에야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는 일을 할 수 있었음을 보는 데서 그렇다.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바울은 처음에는 다메섹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던 자신을 거꾸러뜨리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9:4b) 하시던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로 달가워했을 리가 없었다.

사울 당시의 그 행위 자체가 자신의 영광이고 위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의 감옥에 갇혀서 자신의 모든 행보를 뒤돌아본 결과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고 연이어 말하고 있지만 잘 순종하는 일꾼을 택하실 수도 있었을 터인데 자신을 붙들어 천하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들을 세우게 하신 일들이 참으로 감격이 되었던 것이다.

자주 하는 말이지만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일을 시키시면 확실히 믿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맡기신 일을 감당할 능력도 함께 주시는 분이심을 나머지 부분에서도 증거하고 있다.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12b) 처음의 사울이었을 때는 앞에서 말한 대로 전혀 충성된 사람이 아니었을 것인데 전후좌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현재적으로 보시는 우리 주님께서 보실 때는 하나님의 복음을 감당하도록 과거의 율법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이미 훈련시키신 사울이 하나님과 사람들을 섬길만한 사람으로 이미 바울을 알아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되어진 나(우리)를 보시기 보다는 되어질 나(우리)를 보신다는 확신으로 충성할 필요가 있다. 사실 스데반을 죽이는데 동참하고 증거물로 그의 옷을 맡고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사울에게서 충성됨을 볼 수 있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나님은 역시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을 보시고 미래에 되어질 가능성의 사람을 보시기 때문에 충성되이 여기심이 가능하셨을 것이다.

특히 여기 “직분[διακονία, 식사의 시중을 드는 봉사]”이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라 섬기는 직책이라는 데서 사람으로서는 감히 예상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유대교의 지도자 역할을 감당하려고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된 사람들을 죽이고 잡아가두는 세상에서 보기에는 영광스러운 지도자의 일을 버리고 복음으로서 하나님과 죄의 사람들을 섬기는 일을 맡기신 것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Ⅱ. 알지 못하고 행한 것을 용서하셨다(13~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철저한 비폭력으로 악에 대항하셨다. 산상보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가르치시고 이 말씀을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주심으로서 실천하셨다. 바울 사도 역시도 교회의 인간관계를 가르치면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본래 유대교에 있던 사울로서의 바울은 여기에 고백하는 것처럼 어떤 방법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위치를 지키려고 사람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일은 사도행전에서 나타나는 대로 그의 일상의 일들이었다. 거듭났다고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이렇게 과거의 죄를 숨기지 않고 들어내는 것은 현재로서는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13) 별로 영광스럽지 못한 자신의 과거 폭력적이었던 사실을 거리낌 없이 고백하고 있다. 또 이것이 자신의 동류들이나 윗사람과 같은 종류가 아니라 자신이 아들과 같이 대우하고 자신을 따라 배우며 사역할 것을 바라는 디모데에게 말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호소력을 갖는다.

어찌 보면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를 하면서도 자신의 낮은 성적 순위는 말하는 것을 꺼려하고 오히려 ‘아빠(엄마)는 잘했었다.’는 식의 허풍을 떨기도 하는데 바울은 같은 입장에서 오히려 자신의 수치스러움을 가리지 않고 믿음의 아들에게 스스로 폭로하고 있는 것을 본다. 물론 그것은 이런 삶의 개선을 가져올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다는 보다 극적인 모범을 디모데에게 끼치기 위해서임을 이어지는 내용에서 보게 된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13f) 여기 자신의 폭행을 3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비방자[βλάσφημος, 중상적인, 모독적인, 모독자, 훼방자, 욕하는, 비방하는]” 사실적인 고백을 사도행전26:11f에서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라고 아그립바 왕에게 자신의 과거 행적을 소개하고 있다. “박해자”로서의 사울은 사도행전7장에서부터 그가 예수 그리스도께 붙잡힌 9장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고 있는 사실이다.

“폭행자[ὑβριστής, 난폭한 사람, 오만한 사람]”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상태에서 사람들을 짐승 다루듯 대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을 보면 당시 하나님을 존경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기까지 한 사울의 폭력은 역시 바른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지 않음을 그대로 나타내는 행동들이었다. 요즘도 민족 간이나 국가 간의 사람을 살상하는 싸움이나 전쟁은 결국 창조주요 구세주 이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데서 나타나는 폭력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이라고 정상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임을 바울은 인정하고 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도 왜,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복음으로 이끌기 위하여 최소한 3년동안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훈련을 시키신 사도들 가운데서 택하지 않으시고 하필이면 땅끝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오히려 반대하고 박해하는 사울을 택하셨을 까는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 이유를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13b)고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조금은 소극적인 표현이지만 사울이 그렇게 박해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찾아 죽이려는 열심은 사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열심이었던 것이 사실이었고;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박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도 이런 극적인 변화는 흔하지는 않지만 가끔 볼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면 비상처럼 싫어하던 사람이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데 기존의 사람들보다도 더 적극적인 일을 가끔 보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서 열심은 그 방향만 바로 세운다면 좋은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사람이 뒤집히게 되면 적극적인 증거자가 되는 것은 비단 바울 한사람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의미를 그리스어 “διώκω”라는 낱말에서 본다. 박해하다는 뜻을 가지는가 하면 역시 ‘뒤쫓다, 추구하다, 열심히 따르다’라는 의미를 동시적으로 가지기 때문이다. 또 이 말씀에서 취하는 또 다른 의미는 알지 못하고 행한 것은 회개한 이후에는 정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14) 이것은 바울의 고백일 뿐만 아니라 역사 속의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의 고백이면서 오늘 구원받은 나(우리)의 고백이다. “넘치도록 풍성하여[ὑπερπλεονάζω, = ὑπέρ, ~위에, ~이상, ~넘어서 + πλεονάζω, 많다, 증가하다, 성장하다, 충만하다]” 남아 돌만큼,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단어는 다르지만 한 곳을 인용하면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엡3:8)라는 표현이다.

특히 여기에서는 신앙의 요소가 3가지로 표현되고 있다. 먼저 은혜는 사람의 공로나 반응에 관계없이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선물로 대상을 가리지 않고 부어 주시는 하나님 사랑의 결정이다. 그러나 그 은혜를 입을 수 있는 장소는 한정되고 있다. 세상의 어디에도 어느 종교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는 곳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외에는 없다.

이 은혜에 반응하는 죄인 된 사람 측의 반응이 바로 믿음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함께 사람 측에서 요구되는 것도 변치 않는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변하지 않는 신뢰를 역시 지속적으로 드리는 것이다. 이렇게 믿음으로 누리게 된 은혜는 그 은혜를 쉼 없이 부어 주시는 하나님과 함께 믿음으로 누리게 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불어 나누게 되는 것이 교회 안에서 지체 간의 사랑이다. 그러나 이 사랑이 변할 수 없는 것은 사람에게서 나온 사랑이 아니라 불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과 사랑은 은혜를 통하여 가능하고 하나님의 지속되는 은혜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풍성해짐을 증거하고 있는데 앞에서 증거한 대로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사울에게 풍성했다면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주어진 이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에서 제외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이론이 된다.

이런 이유에서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서도 사람들은 핑계할 수 없을 것이다. ‘왜, 나에게는 구원을 주지 않았습니까?’ 항의하는 사람들에게도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14)라는 바울 사도의 고백이 증거가 될 것이다.



Ⅲ. 하나님께서 미쁘시기 때문에(15)

왜, 하나님께서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사울 같은 사람에게도 그리고 오늘 나(우리)에게도 넘치는 은혜를 부으시고 구원을 주실 뿐 아니라 섬기는 직책을 주셨는가를 여기에서 증거한다. 이것 역시 사람의 기준에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믿음직하신 하나님의 성품 때문임을 증거하고 있다. 이것은 적어도 어떤 다른 사람의 경험이 아니라 바울 자신의 경험적 고백임을 확인할 수 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바울의 이 고백은 3:1의 “미쁘다 이 말이여!” 즉,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이라는 표현이 빠진 상태로 딤후2:11; 딛3:8 등등 이 두 젊은 일꾼들에게 쓴 편지에서 자주 사용된 표현이다. 마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고 중요한 신앙적 이론을 말할 때마다 앞서 말씀하셨던 것과 비슷한 예를 생각할 수 있다. 특히 4:9에서는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라고 본절과 다르지 않다.

그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믿음직한 말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15m) 복음을 한 마디로 요약한 듯한 표현으로 이 땅에 죄인 구원을 위해 육신을 입고 임하신 사람 되심의 고백이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셨다면 우리 대한민국의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인류는 과연 하나님과 관련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것을 예언하는 가브리엘 천사의 마리아와 요셉에 대한 수태고지의 때부터 그 이름을 이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예언되신 생명의 이름, 구원의 이름이 온 인류에게 주어졌고 이 귀한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복음에 믿음으로 반응하기만 하면 진노의 하나님이 아닌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불변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이 되신다.

이 복된 하나님의 언약 앞에 바울은 자신을 사실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15b) 이것은 자신의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전의 적대행위를 마음에 두고 여러 사람들에게 같은 의미의 고백들을 쓰고 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15b)는 고백은 하나님께나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이 가장 사악한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으로 이 고백에서 그의 신앙이 있게 되었고 겸손한 그의 섬김의 출발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바울의 이 고백을 우리 각자의 고백으로 드릴 수 있다면 과연 바울보다 나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볼 때 같은 탄식의 고백을 드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가 아니, 제 자신을 두고 볼 때도 하나님께 바울보다 더 잘한 것이 한가지도 없기 때문이다. 죄인임을 깨달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그 죄를 용서해 주신 사랑에 합당하게 헌신하는 것뿐이기 때문에 바울은 이 고백이 신앙과 헌신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고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믿음직한 하나님의 언약이요 말씀이라면 이것을 듣고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약속에 합당하게 반응하여 움지기는 것뿐이다. 이 귀한 말씀은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할 때 나 자신을 위해서도 응답해야 하겠지만 아직 이 귀한 언약을 확인하지 못해서 알지 못해서 반응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 해야 하는 것이 이 약속을 가진 우리 각자와 교회의 사명이다.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사울을 충성되게 여기셔서 섬김의 직분을 맡기셨던 우리 주님은 오늘도 부족하고 모자라는 나를 역시 하나님 자신이 신실하시기 때문에 충성되게 인정하시고 성도라는 하늘의 백성 삼으시고 그리스도의 것이 된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얻게 하셔서 영생의 소망에 들어가게 하셨다. 우리 각자 역시 맡기심에 후회하심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 우상숭배를 하여 진노의 대상일수밖에 없었음에도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인정하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성도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풍성히 내려 주셔서 이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그의 백성들과 더불어 사랑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하신 것을 합당하게 감당해야만 할 것이다.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내려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은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오히려 주님을 대적하던 스스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하던 바울이 구원받고 그 복음의 일꾼이 된 것이 믿을만한 사실인 것처럼 이제 결코 바울과 비교될 수 없는 나(우리)역시 과거를 돌아보면 부끄럽지만 미쁘신 주님의 신실하심에 의지하여 오늘 나의 구원을 확실히 해 갈 뿐만 아니라 나(우리) 주변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끼치는 믿음직한 일꾼으로 살 수 있도록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는 믿음직한 사람으로 쓰임 받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