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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막3:28~35 2026-10-04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오늘의 내용은 지난 시간에 연결되는 내용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가족 구성원을 말씀하신다.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을 힘입어 이런 권능을 행한다는 바리새인들의 비난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부정하는 행위이자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모독하는 행위이다.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다는 두려운 평가를 주고 계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범죄하여 스스로는 절대로 그 죄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죄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구세주라는 별명이 붙여진 것인데 그 사죄의 역사를 불경스럽게 평가하는 것은 이 육신의 삶에서뿐 아니라 영원한 세계에서까지 용서가 되지 않는다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어떤 죄를 지었든지 그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지 못할 죄는 없다고 확신해도 좋다. 그러나 조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선하신 성령을 모독하는 행위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사죄가 불가능한 죄라는 사실을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 세상에 살면서 최종적으로 어려움을 함께 감당하는 것은 밉든지 곱든지 가족이라고 한다. 이런 이유에서 가족이란 개념은 일생동안 그야말로 生死苦樂을 함께 하는 관계라고 한다. 친구이건 이웃이든 어떤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떠나게 되고 홀로 남겨 두지만 가족은 평생 동안을 함께 먹고, 굶고 웃고 우는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다. 결혼이란 전혀 다른 관계에 있다가 그 가족 구성원이 되는 것이고 진정한 혼인이란 이런 의미에서 중요하지만 이 세상이 마지막 시대로 가면서 이러한 부부의 관계조차 희미해져서 좋은 것은 함께할 수 있지만 고통이나 어려움은 함께할 수 없다는 이기적인 인간관계가 되어가고 있음을 본다.

그럼에도 우리 주님께서는 육신의 가족들의 찾음을 보시면서 영원까지 가는 가족관계를 말씀하신다. 그런 관계의 해석을 마지막 절에서 말씀하심을 듣는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가족이라고 말씀하신다.

가정마다 가훈이라는 것이 있고 그 가훈 밑에서 같은 생각과 방향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데 천국의 가족이란 육신의 피가 아니기 때문에 맏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씻김을 받고 하늘로부터 거듭난 ‘누구든지’인 것이다. 하나님의 가족은 이 우주속의 가족 공동체의 가장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영원 속에서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각자 자신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가정의 가족 구성원임을 이해하게 된다.



Ⅰ. 용서받지 못하는 죄(28~30)

불신의 눈으로 보는 것은 어느 것도 바르게 보이지 않는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어떤 권능을 행하시든 모두 밉게만 보이고 생명을 얻는 일을 옆에서 봐도 그것이 오히려 자신들의 인기만 떨어뜨릴 뿐이라는 생각으로 보기 때문에 바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믿음은 중요한 것이다.

성경을 읽든 메시지를 듣던 불신으로 보고 들으면 모두가 이상하고 이해될 수 없는 것들뿐이다.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이집트에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을 그 노예 생활에서 끌어내 주셨음에도 ‘왜, 잘 살고 있는 우리를 이 광야에 끌어내어 고생을 시키느냐!’는 저들의 불만을 보면 불신이 얼마나 불행이며 무서운 것인가를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나 긍휼이 전혀 이해되지 않고 “왜!”라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대드는 모습을 가나안을 들어가기 전의 40년의 광야 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속에서 본다. 이런 이유를 잘 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40년의 세월 속에서 그분의 백성들의 믿음을 훈련시키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일지라도 복이 되지 못할 것임을 아셨기 때문이지만 이렇게 믿음을 훈련시켜 들여보냈음에도 불신으로 다시 종노릇 하는 안타까운 역사는 반복되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Ἀμὴν λέγω ὑμῖν)…”(28f) 주님께서 귀중하고 진실된 가르침을 주시면서 주로 사용하시는 말씀의 시작이다. 마태복음에는 31번이나 이 표현을 쓰셨고 요한 복음에는 “진실로(λέγω)”를 반복하여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보다 진지한 표현을 25회나 쓰셨다. ‘이 말씀은 너희들이 잊어버리거나 듣지 않으면 손해볼 수 있다’는 귀중한 표현이다. 당연히 우리 주님의 하시려는 말씀이 바뀔 수 없는 생명의 진리임을 강조하시기 위해서 이 표현을 사용하셨다.

물론 이 말씀 뒤에는 복된 말씀이 따라오기도 하는데 오늘 본문처럼 용서는 틀림이 없음을 선언하시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비극적인 결과를 말씀하실 때도 바뀔 수 없는 진리임을 말씀하실 때 주로 이 표현을 쓰셨다. 복된 표현을 한 곳만 인용하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는 말씀이다.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28b)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중요한 목적이 이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통하여 죄를 용서받고 죄에서 자유케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지불하시고 피를 흘리셨다. 심지어는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 죄를 짓는다고 해도 용서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같은 병행구절인 마12:32f에서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의 모든 죄, 모든 모독”이라 하셨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용서되지 못할 죄는 없다는 말씀이고 특히, “사하심을 얻되[ἀφεθήσεται ← ἀφίημι]”라는 말이 未來時制이기 때문에 앞으로 지을 죄까지도 용서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29) ‘과연 하나님께서 용서 못하실 죄가 있을 수 있는가?’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가까이 구체적으로 역사하시고 구원으로 이끄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병행되는 마태복음에서 이를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마12:31) 함으로써 사람에 대한 죄와 성령에 대한 모독을 구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요한 사도는 형제를 위하여 사죄를 기도할 것을 격려하면서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5:16) 당부하는데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한 것처럼 사람은 죄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게 되는데 용서되지 않는 죄를 위해서는 기도하라 하지 않는다고 요한은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29) 하신 것은 다르지 않은 말씀으로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가 된다고 하시는 것과 같은 가르침이다.

이제 그 이유를 말씀하시는 것이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30) 우리는 이미 앞에서 본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귀신을 쫓아 내시는 것을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혹평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역사를 귀신의 역사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오늘도 우리 속에 오셔서 항상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따라 회개를 요청하시고 선한 일을 하라고 부추기시는 성령을 순종하는 것이 가장 신앙을 잘 할 수 있는 비결이다.



Ⅱ. 육신의 가족(31~32)

v21에 이미 본 대로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는 안타까움을 지켜보고 바리새인들로 부터는 귀신이 지폈다는 악평을 들은 마리아나 주님의 육신의 동생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안타까운 상황에 계신 것을 보고 들으면서 가족으로서 남 다르게 안스러웠을 것이고 그런 이유에서 설득하여 집으로 데려가려는 의도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밖으로 불러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전형적인 혈육의 정이고 의무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때로 예수님께서 나타내시는 반응은 일반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응대하시는 것은 이런 육신적인 관계보다도 더 깊은 영적인 이유 때문이었음을 아마 마리아도 어렴풋이 이해했을 것이다. 때문에 이런 처우를 받고도 항의하지 않는 것은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낳고 키우면서 있었던 보통 사람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을 겪고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첫번째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이적이 있었을 때도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요2:3b) 하였지만 주께서는 어머니라는 표현 대신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4b)는 대응을 볼 수 있다.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31) 식사할 겨를도 없이 분주한 예수님을 무엇을 위해서 인지는 나타나지 않지만 불렀다. 그 때까지도 마리아가 천사들로부터나 예루살렘성전에 예수님의 정결예식을 행하러 갔다가 시므온이나 안나 같은 선지자들로부터 들은 예언(눅2:25~38)들과 아기를 살리기 위하여 이집트로 피난을 다녀온 일이나 12살의 유월절 때에 예루살렘성전에서 있었던 사건들과 같이 많은 일들을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그의 혈육의 동생들은 자신들의 형에 대한 이해나 믿음을 갖고 있지 못했던 때이다.

어쨌거나 밖에서 기다리면서 사람을 보내어 조용히 아들을 불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물론 밖에 선 것은 군중들 때문에 예수께서 계신 곳에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 자녀들과는 유별나게 나고 자라서 당시 로마의 압제 밑에서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감당할까 어머니는 걱정하고 근심했을 수도 있지만 역시 가족으로서의 모습 그대로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32) 병행구절들에서 마태나 누가도 이 내용을 다 기록하고 있지만 다만 “누이들”까지를 거론한 것은 이 마가복음뿐이다. 여기에 가록되는 내용으로 볼 때 예수님의 온 가족이 다 나타나 찾은 것이라 생각되지만 다만 아버지 요셉이 언급되지 않은 것은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이렇게 온 가족이 사람을 보내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지만 주님께서는 자신을 찾는 가족들에게는 직접 대응하지 않으시고 대신 다음의 내용에 보는 대로 참된 영적인 가족을 말씀하심을 본다.

몇몇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주님께서는 아직도 자신을 믿지 못하는 동생들의 불신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가장 나중에 복음서를 기록한 요한은 이를 밝히고 있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요7:5) 이런 불신의 사실을 이미 알고 계신 예수께서 저들이 자신을 찾는 이유가 가족으로서의 염려였을 것이기 때문에 뒤에 연이어 영적인 가족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주님의 이러한 내용에 관계없이 어쨌거나 가족들이 주님을 찾은 것은 가족의 염려와 안타까움을 그대로 볼 수 있으므로 가족은 이런 안타까운 상황에서도 함께 하는 사람들임을 마가는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이다.



Ⅲ. 천국의 가족(33~35)

자신을 찾고 있는 어머니를 비롯한 동생들의 소식을 들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의 진정한 가족이 어떤 사람들임을 말씀하심으로 이 상황을 정리하신다. 또 주님께서 이렇게 하셨기 때문에 가족을 무시해도 된다는 가르침은 분명 아니다. 참 가족이라면 그 가족을 위하여 일하고 대우하고 무엇보다도 그 가정을 이끄는 가장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때 튼튼한 가족관계는 지켜질 것이고 세상의 가족 구성원이 그렇다면 영원에까지 함께하는 하나님 아버지 밑에서의 가족은 더 온전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33) 앞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요한복음 2장의 말씀을 인용한 바 있지만 이 내용도 어머니 마리아가 들었을 때는 조금은 서운하게 들릴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들은 염려가 되어 찾아와 만나려 하는데 거기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반응은 인간적으로는 상당히 서운하게 들렸을 수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밖에 서 있는 자신들을 그대로 세워 두고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물으시는 우리 주님의 반문을 들을 때 그랬을 것이다. 분명 사랑하는 아들의 위기를 듣고 찾아왔는데 이런 대우를 받는 것이 안타까울 수도 있지만 앞에서 언급했던 대로 마리아는 이미 이런 일을 예수님을 키우면서 수없이 경험했던 과정들이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이것은 인간적인 가족관계를 부정한 것이 아니며 진리를 가르치시려는 것이고 가족관계를 가볍게 여기시거나 업신여기신 것이 아니라 신령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공경하신 모습이다. 사실 함께 어려움을 끝까지 책임지는 것은 그래도 분명 가족이고 신앙하는 사람들도 이를 부정할 수 없다. 주님께서는 바울 사도를 통하여 이를 분명히 하셨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 최근에 가족의 아픔으로 힘겨워하는 우리 교회 내의 가정들을 보면 더욱 실감되는 말씀이다.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34f)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어머니와 동생들은 밖에 세워 둔 채로 앞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시면서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하셨을 때 ‘서운한 감정이 어땠을 까’를 생각하게 한다. v5f에도 비슷한 표현이 나타나 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으냐 물으시자 아무 말도 못하는 저들을 노하심으로 둘러보셨다면 여기서는 모르긴 해도 웃으시면서 둘러보셨을 것이다.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34b)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 모두를 두고 하신 말씀이기 보다는 병행 구절인 마태가 기록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마12:49) 자신과 함께 자라난 동생들이나 친족들은 안타깝게도 자신을 믿지 못하지만 “나를 따르라!”는 한 마디에 모든 것을 뒤에 두고 따라 나선 제자들이야 말로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는 가족인 것을 바로 뒤구절에서도 말씀하고 계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35f) 조금은 막연하게 들릴 수 있다. 과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어떤 것일까? 그러나 어려움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뜻은 어떤 신비한 소리로 듣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기록된 말씀 속에 모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조금 달리 기록하고 있지만 이 사실을 누가가 확인해 주고 있어 감사하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눅8:21)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마12:50)

눅10:25~는 어떤 율법사가 자신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묻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고 어떻게 읽는가 고 물으신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 대답했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눅10:28) 여기는 인종이나 계급은 물론 어떤 것도 제한이 없는 것은 “누구든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흔히 우리는 “믿으면”이 구원의 방법이라고 말하고 생각하지만 다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인정하는 것으로 온전치 못하다.

성경에 기록되는 마지막의 예언 속에 언제나 나타나는 것은 믿음으로 산 사람들에게 갚으심을 언약하고 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7)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2:6)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 한결 같이 “각 사람이 행한 대로”이지 “각 사람의 믿음 대로” 라고 하지 않는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35b) 이것이 모든 가족 구성원은 아닌데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가 하면 이미 v32b에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라고 말한 바 있기 때문에 거기에 그대로 답하는 내용이지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 즉, 천국의 구성원들은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만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의 신부 된 교회의 구성원들로 형제요 자매로 구성된 것은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우리는 쉽게 ‘내가 설마 성령을 모독할 수 있는가?’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이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님은 성경을 읽을 때나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좋은 생각이나 판단을 행하지 않고 뭉개 버리는 것이 성령을 거절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데서 영혼의 소리에 민감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나 지체들에게 전도든, 연보든, 격려든 행해야 한다고 생각이 들면 계산 없이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 지극히 하찮은 것 같지만 성령을 순종하는 것일 수 있다.

가족의 중요성은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우리의 평생의 보호처요 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를 나 되게 하는 가족도 태초부터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셔서 에덴에 두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 다르지 않다. 그럼으로 내가 믿음이 있다면 육신의 가족들에게도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하늘의 가족 공동체에 함께 편입시키는 것도 믿음의 역할이다.

우리 각자의 믿음이 좀 더 장성해서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가족들을 혈육의 가족보다 귀중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하고 이 주님의 교회에 즐거움뿐 아니라 어려움과 아픔도 가족이기 때문에 함께 감당해 가야 할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2:11)라는 우리 주님의 겸손과 섬김을 따라 순종하며 섬겨서 하늘의 가족으로 부끄러움이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