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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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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4:1~2, 9~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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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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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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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군중들을 가르치시는 중에 수많은 비유를 들어 교훈 하셨다. 물론 주님께서는 당시에 가장 자연스러운 주변의 사물들과 일들을 들어 말씀하셨고 이러한 비유들은 네 복음서에 풍성하게 나타나는 내용들이다. 각 복음서들마다 독자들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에 다루는 비유들이 꼭 같지는 않지만 공관복음 속에 대부분 함께 기록되고 있다.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시는 우리 주님의 교훈은 가르치시려는 의미를 보다 더 깊이 있게 이해시키려는 시도 이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비유들 다루면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그 비유 자체를 너무 신비롭게 다루려고 하는 시도들이다. 분명히 보이는 것들을 들어 보이지 않는 신령한 이치들을 이해시키시려고 비유를 사용하셨는데 또 그 비유 자체를 너무 신비하게 풀려고 하는 데서 건전치 못한 성경이해와 신앙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들은 진행하면서 필요할 때 거론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살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천국을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한계가 있고 또 그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는 땅에 여전히 육체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육신의 삶을 신령한 삶으로 변화시키는가 하는 것 역시 사람마다 다르고 각 사람 속에 천국이 시작되고 자라는 것 자체가 우리의 이성적인 이해로는 쉽지 않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는 최대한 이해 가능한 비유들을 동원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시키시려 하신 것이다.
오늘도 우리가 함께 같은 말씀을 듣고 있지만 그 듣는 것을 소화하는 능력은 사람마다 다르고 각 사람의 인격에 따라 이해하는 것도 다른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이 최대한의 이해에 가깝도록 여러가지 비유를 사용하시면서까지 천국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려는 데 최선을 다하셨다. 제자들조차 비유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자들과 만 있을 때 또 다시 비유의 뜻을 풀어 증거하심도 본다. 적어도 오순절에 성령이 그들에게 부어지기 전까지는 제자들도 일반 군중들과 다르지 않았음을 보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보면 신령한 하나님의 나라나 말씀은 역시 그것을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의 감동 없이는 이해가 불가능함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친히 말씀하셨고 그러한 구체적인 말씀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하셨지만 이것은 時期를 말씀하신 것이기 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서 역할은 적어도 성령의 감동 없이는 불가능함을 가르치신 것이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의 서론과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 이유 부분을 먼저 생각하고 다음시간부터 구체적인 비유들의 내용을 생각하고자 한다.
Ⅰ. 사람들을 끄는 권능(1~2)
이미 2:13에서도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하신 역사는 갈릴리 여기 저기서 반복되었던 모습이었을 것이다. 3:7에서도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v9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하셨던 것처럼 어디에 계시든지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요즘 건전치 못한 사람들처럼 거짓(모략)이나 어떤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집안이 되었든지 산이 되었든지 바닷가가 되었든지 사람들이 각지로부터 몰려 들었다.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1) 예수 그리스도의 의도는 어디에 계시든지 자신을 찾아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물론 질병의 불편을 치료하시는 것도 일이셨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시는 것이었다. 인류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한번도 이 자진의 사명에서 빗나가시는 것을 볼 수 없었었다. 가르치심은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하신 것처럼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는 구원을 위해 가르치신 것이다.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1fm) 예수 그리스도 당시 세계는 로마의 황제숭배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아 피의 제전을 보게 하여 맹수와 검투사들과 싸우게 하고 최종적으로는 검투사들끼리 싸우게 하여 최후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피를 흘리는 모습을 연출하여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그런 일들이 콜로세움 같은 원형경기장에서 이루어졌고 그런 행사의 마무리로는 그리스도인들을 맹수들에게 나 검투사들에게 죽이게 하거나 불에 태워 화형을 시키는 일들이 있었던 것으로 역사들은 전하고 있다.
그런 모임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의 모임이 예수 그리스도께 나타났다. 로마의 사악하고 잔인한 구경거리와는 다르게 거룩하고 신령한 하늘의 가치를 가지신 우리 주님께 몰려드는 모습을 생각할 수 있다. 원형경기장에는 피에 굶주린 관중들의 눈과 귀를 자극하는 일들이 연출된 것이라면 우리 주님은 조용히 천국을 가르치심으로 오히려 사람들은 잘 듣기 위해 조용히 침묵으로 움직였을 것에 대한 차이를 생각할 수 있다.
여기 큰 무리가 모여를 “군중이 너무나 많이 모여들었기 때문에”(공동)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처럼 쓰여진 “큰”[πλεῖστος ← πολύς의 최상급] 형용사의 최상급으로 쓰였기 때문에 공동번역이 그렇게 번역을 한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매력 그것은 분명 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든 영혼들이 갈망하는 하늘의 신령한 아름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1) 이 모습이 상상이 되는 것은 주님께서 몰려든 군중을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다가 나중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3:9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하셔서 가르치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2) 이제 다음 시간에서부터 구체적으로 거론될 하나님의 나라의 비유들을 여러가지로 그 많은 군중들에게 가르치시고 그 가르침은 살아 계셔서 오늘 우리를 가르치고 계신 것이다. 여기 사용된 비유[παραβολή]란 요즘 우리식 표현으로 이해한다면 옆에 두고 비교해 보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병행되는 기록인 마태복음13장에서는 모두 7개의 비유를 기록하고 있지만 이 마가는 등불의 비유(21)나 자라는 씨앗의 비유(26~29)를 더하여 마태보다 2개를 더 기록하고 있다.
Ⅱ.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질 수 있는 자(9~11)
우리 주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하시는 말씀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신다. 그 많은 군중들 중에서도 말씀을 듣고는 있지만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진리로 듣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모여온 사람들의 바라고 기대하는 방향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의 이해가 다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오늘도 우리에게 같은 효과를 주고 있다. 꼭 같은 메시지를 듣지만 반응은 나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분명히 소리를 듣는 귀는 있지만 세상의 소리일지라도 모두가 들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하늘의 소식도 들을 귀 있는 사람만이 듣고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를 통한 가르침처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롬10:14) 먼저는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듣고 믿을 수 있기 때문에 들을 수 있는 귀가 중요한 것이다.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9) 이런 이유에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살후3:2b)는 바울의 경계도 듣게 된다. 세상의 부와 지혜를 다 누린 바 있는 솔로몬은 조금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교훈을 주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전6:2)
모든 사람이 귀는 다 가지고 있고 듣고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분명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을 것이고 천국에 대한 소망과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히브리서 기자의 증거는 “…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히4:2b) 무엇을 듣든지 신뢰 즉, 믿음으로 들어야 한다는 경계를 주고 있다.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 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해 물으니”(10) 제자들과 남은 소수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비유에 대하여 물었다고 하는 것은 그들도 역시 비유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11f) 하나님 나라의 “비밀[μυστήριον]”은 그 의미에 있어서는 당시의 신비종교가 특별히 전수된 사제들 만을 통해서 가지는 감추어진 비밀을 외부적으로는 나타내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이미 모두 열려 있는 것임에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신비일 수밖에 없다.
이해할 수 없는 입장에서 비밀과 같은 것임을 증거하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이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를 순종하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비밀이 되지 않는 충분한 이해가 가능한 것은 복음을 순종하기만 하면 약속대로 주어지는 성령께서 일깨워 주시기 때문에 더욱 확실한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다만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라고 한 것은 역시 주님을 따라나선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라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모두 열려 있는 개방된 것임에도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11b)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거절하고 반대하는 자들을 일컫는 말씀이다. 이런 입장에서 세상의 영광된 무리들 즉, 부유한 사람들의 그룹이나 권력세력에는 포함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의 외인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사실 우리도 과거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비밀을 함께 나눌 수 없는 외인들로 바울이 말하고 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2:12~13)는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과거 하나님의 기업을 함께 나눌 수 없는 비극의 주인공들인 외인들이었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지금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교훈을 직접 듣고 있는 이 큰 무리들 보다도 감사해야 할 행복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인 것이다. 믿습니까! 우리에게는 오히려 많은 신비 즉, 비밀을 가지고 있다.
죄인 되었던 우리를 저주의 죄에서 씻어 깨끗케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신비,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약속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 소속의 변화의 신비, 온 갓 더러운 영에 붙잡혀 어둠 속을 헤맬 수밖에 없었는데 거룩한 하나님의 성령에 붙들려 거룩한 미래의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감격 등등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들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었다. 할렐루야!
Ⅲ.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12~13)
그럼에도 주님께 모여든 이 큰 무리와 다르게 그리스도의 비밀을 함께 나누거나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그 때도 지금도 있을 수 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안타깝지만 직접 말씀하심을 마지막으로 생각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말씀은 본래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이었던 이스라엘을 향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안타까운 예언의 내용의 인용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사6:9~10) 물론 인용된 내용과 이사야서의 내용에서 말의 순서는 좀 다르다.
이 말씀에 심각성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아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씀으로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랑 하심처럼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즘말로 코~드가 맞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씀이다. 마치 바벨탑을 쌓을 때의 비극이 다시 재현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이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백성들의 완악함으로 보이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시는 것처럼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이런 상태에서 회복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는 이사야를 통해서 이런 안타까운 예언을 주신 이스라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집트의 탈출에서부터 가나안의 정착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으로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다. 북조 이스라엘은 말할 것도 없고 다윗의 후손을 통해 지속된 남쪽 유다는 북쪽 이스라엘이 단과 벧엘에 여로보암이 송아지 우상을 세워 끊임없이 우상숭배에 빠져서 마침내는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만다.
그럼에도 남쪽 유다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언약(삼하7:16)처럼 아달랴와 같은 사악한 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쪽 이스라엘보다 136년이나 더 왕권과 나라를 유지하게 하셨다. 그럼에도 백성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따랐고 저들의 완악함은 행여라도 자신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회복될까 봐 염려할 정도로 완악 해져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완악한 마음상태 그대로를 묘사하시는 표현을 이사야를 통한 예언이었던 것이다.
그런 마음의 상태가 바로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12f)라는 反語法(표현의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실제와 반대되는 뜻의 말을 하는 것-못난 사람을 보고 ‘잘났다. 정말’라는 식)을 사용하여 당시의 예언 대로 오신 메시야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죽이려고 하는 완악한 종교지도자들을 마음에 두고 인용하시는 말씀일 수도 있다.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12b) 역시 뜻을 강조하시기 위하여 반대적인 표현을 사용하신다. 앞에서 인용한대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말씀이 듣기 좋은 헛소리가 아니라 진실일 진데; 그것도 자신의 백성들이 믿고 죄사함을 받기를 얼마나 바라시겠는가! 그럼에도 완악해진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만큼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거역하고 대항하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의 완악함은 치료받기를 거절한 중병환자의 상태와 같은 안타까움 이셨을 것이다.
이 말씀에 더 중요한 의미를 오늘 우리 자신들에게 가져올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거론했던 대로 본래는 이스라엘밖의 사람들로 하나님과는 관련이 없었던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우리들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이라 부르는데 이르렀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만큼이나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주시는 교훈과 진리를 나의 것으로 주님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사죄와 임마누엘의 감격을 누려야 함에도 세상의 다른 것들에 눈과 마음이 팔려 주님의 음성이 잘 들리지 않는다면 역시 회개하고 처음 자리로 돌아가야만 할 것이다.
“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13) 이 말씀 역시 당시의 주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듣고 있었던 제자들과 같이 단순한 씨를 뿌린 흙들과 같이 그만큼 따라다니면서 가르침을 들었고 치유의 능력을 목격했다면 이제 이런 자연을 통한 단순한 비유는 소화가 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조금은 서운한 주님의 심경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같은 말씀을 받는 우리의 마음 밭에서도 점검되어져야 할 것이다. 앞에 드신 비유는 길가와 돌밭, 가시밭 그리고 옥토와 같은 네 종류의 말씀에 반응하는 쉬운 비유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더 깊은 천국의 비유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는 우려를 일깨우심이다.
우리 주님은 분명 세상의 어떤 스승과도 다른 매력(마력)을 가지셨다. 그것은 분명 세상의 귀한 사람들과 다른 신비한 하늘의 매력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그 매력에 끌려 있다면 그 아름다운 우리 주님의 하늘의 매력을 나도 힘입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 사는 삶이 될 것이다.
복음은 이제 만 천하에 뿌려졌다. 그럼에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 복음을 듣고 응답했다고 하는 우리를 향하여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말씀하신다. 우리의 믿음이 천국의 비유를 다른 사람들에게 풀어 증거할 수 있을 정도로 천국의 비밀을 가진 자로 살고 실천하는 자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 더 많은 마지막 시대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오늘 내(우리)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면 천국을 모르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지 못하는 천국을 기쁘게 소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을 알고 천국을 알 수 있도록 경건을 위해 주님을 더욱 의지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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