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
|
|
 |
이종배 전도자 |
|
 |
막4:21~29 |
 |
2026-10-25 |
|
 |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
|
|
네 가지의 토양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을 씨 뿌리는 비유로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복음서에는 비유보다도 가르침 속에서 거론하신 빛의 역할을 위한 위치를 비유적으로 말씀하신다.
이러한 비유들을 듣는 각자의 마음의 비율에 따라 생명의 씨앗이나 빛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생에 부유할 수도 있고 빈궁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귀 있는 자는 들으라!”거나 듣는 것을 조심하라고 경계하신다. 각 사람이나 삶 속에 천국이 들어오고 그 천국의 범위가 커지고 자라는 것은 보이지는 않지만 그러는 가운데서도 천국은 자라게 되고 마침내는 추수하는 때가 올 것이라는 마지막 역사를 의미하는 비유 까지가 나누는 말씀이 오늘의 메시지이다.
요즘은 스위치만 올리면 환하게 밝아지는 빛의 세상을 누리고 있는 시대에는 과거 호롱불을 켜서 어둠을 밝히던 시대와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역시 이 빛의 비유의 원리는 바뀔 수 없을 것이다. 과거에 필름 뒤에 환등기는 의도적으로 비춰서 어떤 사진이나 영상을 보이게 하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빛을 감춰두기 위해서 켜는 일은 없을 것이다.
특히 별로 밝지 못한 올리브 기름으로 불을 켜는 등불은 가까이에서 보지 않으면 희미했던 것도 OT의 선지자들을 통한 메시야 예언이 아직 어두운 등불과 같았다면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광명한 생명의 빛을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더 이상 없어야 할 것도 의미적으로는 담고 있는 비유라고 할 것이다. 오늘은 결론은 없다.
Ⅰ. 빛은 밝히기 위해서 있다(21~23)
과거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 사기그릇과 같은 성분이나 놋쇠 같은 것으로 만든 심지를 끼운 호롱불은 요즘 젊은이들이나 아이들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지만 지금 주님께서 비유를 드시는 등불과 거의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주로 등유를 넣어서 불을 켰는데 심지가 길게 나오거나 많이 그을리게 되면 불에 검은 연기가 섞여서 하룻밤을 그 불 밑에 있다 보면 코밑이 시커멓게 그을리는 경험을 하기도 했을 것이다. 다만 이스라엘은 등유가 아닌 감람(올리브)기름을 썼기 때문에 그런 그을음은 없었을 것 같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불을 끌 때는 그 불이 켜지는 부분의 뚜껑을 내려 덮어서 껐다고 한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21)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 등불은 단순히 어두운 데서 책을 읽거나 바느질을 위해 사용하는 등불이기 보다는 오히려 어두운 사람의 심령에 생명의 등불인 복음을 말씀하고 계시다는 데 더 무게가 있다. 별로 밝지 않은 등불로 비유하고 계시지만 등불은 어두운 데를 밝히기 위한 것이라고 할 때 빛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죄로 인하여 칠흑같이 어두워진 인간의 마음에 생명이 빛이신 하나님을 알게 하는 복음의 빛을 증거하고 계신 것이다.
요한 사도는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1:5)고 하나님을 빛으로 소개하고 있다. 우리 주님께서는 직접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말씀하셨다. 마태는 이와 같은 말씀을 천국의 비유인 13장이 아닌 산상보훈에서 거론하시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같은 말씀을 주님께서 증거하심을 기록하고 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5:14)
다시 v15~16에 같은 내용을 말씀하시며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직접적인 도전을 주고 있다.
전등불이라도 특별히 장식을 이나 모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바닥에나 구석이 아닌 천정에다 메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는 것은 등불을 사용하지 않을 때 곡식을 되는 말 밑에나 침대아래에 넣어 두는 것처럼 생명의 복음을 감춰두어서는 안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좀더 가까이 이해를 하면 믿는 사람들이 전도한답시고 자신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한다면 그것 못지 않게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주님을 믿는 백성됨을 나타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22) 조금은 역설적으로 어렵게 번역이 되어 있지만 “감추어 둔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공동)라고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영원히 감출 수 있는 비밀은 없고 하나님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는 두려운 이론이다.
병행구인 눅8:17에는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 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앞의 말씀과 연결해 보면 나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산다면 결국 하나님께서 들어내실 것이라는 이론이 되고 생명의 빛을 가진 자라면 적극적으로는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그 생명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중요하고 또 두려운 가르침이 되는 샘이다. 그렇지 않으면 주변의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으로 나타내실 수도 있다는 경계의 교훈이다.
여기서도 마무리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23) 경고하신다. 이미 v9에 씨뿌리는 비유를 하신 다음에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말씀하신 것의 반복이다. 어떤 비유이든지 모두가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영에 속한 하나님의 말씀은 비유가 아닐지라도 모두가 듣지 못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각성을 다시 한번 일깨우시는 경계의 말씀이다. 사람들이 세상의 언어가 다른 말까지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창조주요 사랑의 아버지 이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큰 안타까움은 없을 것이다.
또 이 말씀의 좀 더 적극적인 당부는 듣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여 천국을 살라고 하시는 사랑의 권면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듣는 것으로는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이 말씀은 진리라 좋다!”에서 끝나면 듣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 들은 것을 나의 것으로 행할 때 비로소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당부가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하신 후에 이제 깨달은 율법교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10:37) 당부하신 것이다.
Ⅱ. 부익부 빈익빈(24~25)
세상에 공정하다고 하는 자본주의 상황에서 가장 실감나는 이치가 富益富貧益貧이다. 그러나 이 이치는 영적인 원리에서도 다르지 않음을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을 듣는 어떤 사람은 ‘그렇다면 세상과 다름이 없는 그 천국이 왜, 필요한가?’ 라고 한탄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기의 부익부빈익빈은 세상의 야비함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삶의 얼마를 하나님의 나라에 투자하느냐에 따라 영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면서 너무나 공정한 하나님의 공의가 지배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서처럼 투자하고 손해보면 힘들어 하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손해날 일 없는 투자에 대한 이득은 조금도 소홀함이 없이 갚아지고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24) 우리 주님께서 산상보훈에서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2) 말씀하셨고 좀 더 적극적으로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하셨다.
여기서도 첫째 경계는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24) 이 말씀은 v21~ 가르치시는 우리 주님의 교훈에 대해서 흘려듣지 말고 진지하고 조심하는 자세로 하늘의 교훈에 귀 기울일 것을 당부하시는 말씀이다. 우리는 천국에 관한 교훈을 듣든지 읽는지 거기에 생명이 달려 있다는 진지한 자세로 듣고 소화해야 한다.
그냥 흘려버리거나 지나치는 소리로 듣고 만다면 어떤 귀한 교훈도 생명이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경계를 주고 계심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변화가 없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이 달린 귀중한 교훈으로 듣지 않기 때문에 듣기는 들어도 삶에 변화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24b) 우리가 세상의 투자를 할 때는 여러가지 거기에 대한 정보들을 수집하고 분석하고 손해가 나지 앓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을 때 투자를 하게 된다. 그럼에도 세상의 일이라는 것은 수시로 변화가 많기 때문에 그렇게 심중함에도 이득을 얻기보다는 손해를 보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천국에 대해서도 같은 자세로 대하려는 경향이 생긴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미 검증되고 실증되고 하늘과 우주에서 인정된 생명의 이론이기 때문에 오히려 계산해보고 헤아려 보고 받아들이려고 하는 경우는 오히려 은혜와 생명의 풍성함을 놓질 수도 있다.
천국의 이치는 세상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더 많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한다면 하나님께 받는 은혜와 사랑도 비례할 것이고 특히 이러한 이론은 단순히 자신 속에서만 검증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속에서 더욱 실증되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천국은 나 하나의 변화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과의 실제적인 삶의 변화이다. 앞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듣는 것은 하나님의 바른 진리인지, 진리와 비슷한 거짓 것인지를 헤아릴 필요가 있었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한 투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명령을 육적인 헤아림이나 판단으로 행하려 한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절대로 천국은 풍성하게 누릴 수 없는 것은 천국의 이치는 세상과 반대되기 때문이다.
이 말씀과 더불어 이해하게 되는 바울의 교훈이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9:6)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한 것인데 우리가 육신의 삶을 위해서 심는 정도로 하나님을 위해서 심을 수 있다면 참으로 영원 속에서 큰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지만 육신 속에 있는 삶에서 그렇게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대부분의 신앙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하나님께도 심는 것보다 더 받기를 기대하는 육신적인 성향이 더 많이 적용되는 것을 본다. 주님께서도 직접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이 말씀은 사람 대상의 교훈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이다.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25) 이 v24~25 말씀의 병행구절인 눅8:18에서는 한 구절로 정리는 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여기까지 천국의 신비를 비유로 말씀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천국에 더 가까이 가려고 애쓰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천국의 신비를 더 깊이 이해하고 하나님 나라의 더 깊은 경지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라는 일차적인 의미를 가진다.
누가가 표현하는 것처럼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는 이해가 좀 쉽지 않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신앙적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치 생명을 가진 씨앗이지만 그 씨앗이 싹도 트지 못하고 사탄에게 먹혀버린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안타까움에서 하나님께 가 아니라 사탄에게 생명의 씨앗을 빼앗기게 되는 것은 앞의 비유에서도 이미 보아온 말씀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를 가려듣는 것이 중요하고 믿음으로 행하는 것은 사람의 기준에서 헤아리는 것 보다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도록 믿음으로 행하는 자는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신령한 것과 더불어 더 받을 것이다. 반면에 사용하지 않는 믿음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까지도 잃게 될 것이라는 경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Ⅲ. 성장은 볼 수 없지만 자라고 추수때는 온다(26~29)
이 4장의 첫 부분의 비유는 씨 뿌림을 받은 토양과 같은 마음 밭의 차이들을 비교했다면 여기서는 또 다시 같은 씨 뿌림을 말씀하고 있지만 그 복음의 씨앗 자체의 성장과 열매와 추수 까지를 비유하면서 앞의 비유와는 또 다른 의미의 비유를 보게 된다. 생명을 가진 씨는 반드시 발아하여 싹이 나고 줄기로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추수되지만 그 과정은 알 수 없다는 생명의 신비를 이르는 말씀이다.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26) 앞의 v3~4ff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라는 말씀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주체로서는 토양을 비유하는 밭의 형태와는 크게 다르게 생명을 가진 씨의 능력을 비유하면서 그것이 보이는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서는 볼 수 없음에도 마침내는 이삭과 추수에까지 이르게 되는 생명의 신비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적어도 생명의 성장에 있어서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단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적절히 땅을 고르고 씨앗을 뿌리는 데까지이다. 활동사진이라고 하는 것이 등장하면서부터 심은 씨앗의 성장을 계속 찍은 필름을 빨리 돌림으로써 씨가 움트는 데서부터 줄기가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며 익는 과정에까지 한 눈으로 볼 수 있다.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 지를 알지 못하느니라”(27) 여기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는 시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이다. 사람은 씨를 뿌려놓고 기다릴 뿐이지만 씨는 싹을 틔우고 떡잎의 영양을 받아 자라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이와 같이 식물의 성장조차도 그것에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생명을 움 틔우고 자라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자연 식물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영적인 문제에도 복음이 사람의 마음 밭에 떨어지고 자라게 하시는 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님을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고백하고 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6~7)
신앙이 빨리 자라지 않는다는 안타까움으로 탄식하는 사람들을 향하여도 같은 말을 자주 하게 된다. ‘콩나물에 물을 주고 물은 다 빠지고 다시 줘야 하지만 몇일을 지내다 보면 어느새 콩나물이 자라고 뿌리가 생기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의 성장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식물을 키워서 알곡을 거두는 농부들의 행동도 믿음이 없이는 곡식을 갈 수 없다. 땅이 반드시 이 곡씩의 싹을 틔워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라는 믿음 없이는 곡식 종자를 땅에 뿌리지 못한다.
같은 원리를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입장에서도 가지고 전하게 된다. 생명을 가진 씨앗이라면 흙과 태양(빛)과 물을 통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역사로 곡식이 자라 열매를 맺는 데까지 물론 걸음을 주고 잡초를 뽑는 부차적인 일들을 비록 사람이 한다고 해도 역시 자라게 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영역이다. “초목에 대하여 말하되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논했다고 하는(왕상4:33) 솔로몬은 너무 계산적인 사람은 종자를 뿌리는 것조차 불가능함을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못하리라”(전11:4)고 증거하고 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28) 이제 여기에는 성장의 진보를 말하고 있다. 우물에서 숭늉을 구하는 것처럼 씨앗에서 열매를 구할 수 없다. 반드시 순서를 따라 건강하게 성장한 식물에게서만 충실한 이삭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의 식물의 성장이 이럴 진데 영원의 알곡을 위한 성장이야 더 그렇지 않겠는가 하는 이치를 말하려는 것이다. 성장이나 결실에 있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앞에서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26) 하였지만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라는 것은 열매 맺는 일에 사람의 공력이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생명을 가진 씨앗이 스스로 나고 자라고 열매 맺게 되지만 역시 씨를 뿌리는 일이 없이 이것은 시작부터 불가능함을 볼 때 사람의 역할을 전혀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장과 결실의 구체적인 상황은 생명을 가진 열매의 생명에 의해서임을 말함으로써 사람의 복음 전함이 반드시 시작이지만 자라고 결실케 하는 것은 생명의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심을 확인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28b) 비록 우리 사람은 알지 못하고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시간은 식물의 성장을 지속시키고 마지막의 결실기가 있는 것처럼 어쩌면 하나님의 나라 역시 사람이 의식하지 못하지만 완성되어가는 과정에 있고 반드시 충실한 이삭을 거둘 천국의 완성은 오고 있다는 이론이다. 이러한 이론은 사람 스스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하지만 사람 스스로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역시 생명의 능력을 주신 하나님의 추수 때가 있음을 증거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29) 농사의 절정은 추수이다. 싹이 트고 자라고 꽃피고 열매 맺는 과정은 반드시 거쳐야 하지만 이것은 모두 추수를 위한 과정이다. 이 인류의 구원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아주 사소하게 여겨지는 하나님의 역사도 모두 구원의 완성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곡식을 심는 것은 추수를 위함이고 생명의 씨인 복음을 증거하는 것도 역사의 마지막을 위함이다.
이 추수의 기쁨을 즐기는 것은 복음의 씨를 뿌린 것처럼 사람들이다. 그럼으로 천국의 최종적인 기쁨은 복음에 충성한 믿음의 사람들의 것이 될 것이다(요4:38) 그럼에도 이 역사의 추수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복음을 완성하시고 복음의 씨를 뿌리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신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