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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다룬 식물의 성장의 비유는 어떤 개인 속에 하나님의 나라의 씨인 말씀이 들어가 싹을 틔우고 자라서 마침내는 추수에까지 이르게 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생명력에 대한 비유였다. 오늘의 겨자씨의 비유는 한 사람 속에서의 성장보다는 교회로 이해하는 것이 더 옳을 것 같다. 과거를 돌아보면 어떤 곳이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통해서 복음이 들어가면 처음에는 미약해 보이는 것이지만 거기에 또 한 사람 두사람이 더해지면서 점점 자라서 마침내는 그 지역에 생명을 끼치고 힘겨운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통해서 평안과 위로를 얻는 데까지 역할 하게 됨을 보게 된다.
특히 이런 일들은 도시보다는 시골에서 더 실감하게 된다. 처음에 시골 교회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로 시작하여 복음의 역할을 바르게만 한다면 나중에는 그 마을의 유지들까지도 교회에 더해지는 일들을 보면 이 겨자씨의 비유가 실감이 난다. 같은 비유를 다루는 마태(13:31~33)나 누가(13:18~21)는 이 겨자씨의 비유에 누룩의 비유를 붙여서 기록하고 있지만 마가는 단지 겨자씨의 비유만을 기록하고 있는 점도 독특하다. 이제 이 비유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해설해 주시는 것으로 끝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움직이심이 자연과 사람들 속에서 보통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이적들을 행하시는 행보를 마가는 기록하고 있다.
Ⅰ. 비유가 쉽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30)
이 말씀을 읽게 되면 생각나는 것이 어떤 건강식품을 그 제품회사의 사장이 직접 선전하는 내용이 생각난다. ‘정말 좋은 것인데 설명할 방법이 없네!’ 그 광고는 사람의 육신적인 건강으로 부부생활을 잘 할 수 있다는 그런 내용으로 조금은 정욕 적인 내용을 표현하려는 것임에도 공공매체에서 사실적으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투의 카피다.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이런 형태는 이스라엘에서는 교육의 일반적인 방식이었다고 한다. 질문으로 시작하여 답변을 이끌어 내는 전형적인 문답식의 교육방식이다.
그럼에도 천국은 맛본 사람만이 귀하고 좋은 것을 아는 데서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비교한다고 할지라도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데서 하나님의 나라의 행복과 신비를 제대로 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육신의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것 자체가 한계가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적어도 세상에는 없는 이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설명하며 또 무엇으로 비유할 수 없는 한계를 육신을 가진 우리 이 세상에서는 사실 완전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와 표현에 한계가 있어서 가 아니라 그것을 듣고 받아들이는 우리 사람들의 이해의 한계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믿음의 열정으로 불타는 마음으로 전도를 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사실 천국의 행복이나 귀중성,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한계는 분명히 있다. 그런 이유에서 성경말씀을 아무리 유창하게 나열하고 조리 있게 증거한다고 해도 자신이 사실적으로 경험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에서 농사와 더불어 산 사람에게 도회지의 편리한 삶을 설명하는 것 과도 비교할 수 있을 것이고 마치 조선시대의 사람들에게 이 21세기의 도시를 설명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현대의 최첨단의 도시 문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꼭 같은 안타까움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미 가지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는 너무나 안타까우셨을 것이다.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조금이라도 천국을 맛본 사람들은 이러한 말씀이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이해될 것이다. 천국은 그 신비와 깊이의 차이는 어찌 보면 각자의 영성의 깊이에 비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앙 안에서도 이렇게 천국의 이해를 하는 것이 차이가 있다면 아직 천국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시키는 것이 더 어렵겠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사실 세상에는 천국을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πῶς, 어떤 방식으로]”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천국의 영광을 나타낸다고 해도 그 아름다움과 영화로움을 비교할 수 있는 것들이 이 지상에는 없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불신자들에게 천국의 좋은 것을 이해시킬 방법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을 설명하기를 “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계21:21) 이 비유가 비유가 아닌 사실이라면 사람들은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석에도 실증을 낼 수 있고 유리 같은 정금위를 걷는 것은 마치 스카이 워크위를 걷는 것처럼 위험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요한 사도를 통하여 비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하시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우리의 한계는 분명히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완벽하게 육신을 입은 가운데 이해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무엇을 천국의 옆에 붙여놓고(παραβολή) 설명해볼 수 있는 것이 이 땅에는 분명히 없다. 천국을 우리는 먼저 물질적으로 이해하려는 것 자체가 문제이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고 증거한 바 있다. 먼저는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어떤 것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해될 수 없고 육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사람의 인격(知情意)이 성령의 충만 안에서 불공평이 전혀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평화와 기쁨을 넘치도록 누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가장 작게 라도 이 세상 속에서 누리는 경험은 바로 사죄의 은혜이다. 의로움 속에는 전혀 두려움이 없고 의로움 속에는 하나님이 의식되고 마치 비 온 후의 맑게 개인 하늘 아래 자연을 보는 평화로움 같은 감동과 미래가 완전히 보장되어 있다는 감격과 기쁨으로 살게 되는 그런 것이 어쩌면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믿고 거듭나 사죄의 감격을 맛보며 사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의 나라 백성됨의 감격일 것이다.
이왕에 신앙생활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는 완전히 설명할 수 없고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천국을 맛보는 삶이 된다면 절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떠날 수 없고 또 우리의 삶에 모든 것보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선 순위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Ⅱ. 예상될 수 없는 천국(31~32)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을 비유하는 데 있어서 이만한 비유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비유를 주고 계신 것이다. 처음에는 있는지 없는 지의 구분도 어려울 정도로 미미한 존제가 시간이 감에 따라 점점 커지는 인생에 있어 서나 사회성에 있어서 그 범위나 크기가 점점 왕성 해져 가는 겨자의 성장 비율은 천국을 비유하는데 적절함을 볼 수 있다. 다만 우리 나라에서 이 겨자라는 채소가 일반적이지 못하고 직접 접할 수 없는 것에 한계는 있지만 우리 나라의 채소 중 배추의 장다리가 난 크기도 어느 정도는 비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31) 채소 중에서 무, 배추, 상추(1mm) 겨자씨 순으로 크기가 작지만 무엇보다 겨자씨는 채소의 씨 중에 가장 작다고 하는 것이 비유의 이유였을 것이다. 이스라엘을 갔다 온 사람들이 이 겨자씨 한 알을 투명필름지로 라미네이팅(Laminating, 코팅)을 한 책갈피 같은 것을 기념물로 사오는 것을 보면 실감이 난다.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만지면 거의 만저지는 아주 작은 씨앗이 생명이 들어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지만 그런 미미한 정도의 씨앗에서 싹이 나오고 자라면 마침내는 3~4M 높이까지 자라고 어떤 것은 7M까지 자라게 되는데 줄기는 사람의 팔뚝만큼 굵어지는 것을 상상하면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씨앗이 아닌 겨자씨로 비유를 하셨는지 실감이 날 것이다.
겨자씨일 찌라도 여러 개의 씨가 한꺼번에 뿌려지면 별로 실감이 안 날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한 알이 강조되고 있는 것도 의미가 있다. “땅에 심길 때에” 흙에 심겨지기 전의 상태에서는 여기 이어지는 표현대로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31b) 그러므로 싹이 트기 전에는 이스라엘에서 적어도 땅에 뿌려지는 씨 중에 겨자씨보다 작은 씨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한 알을 강조하신다. 아무리 큰 덩치의 씨 일지라도 생명이 없는 죽은 것은 절대로 커질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할 때의 중요성은 생명의 능력이다.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아무리 미미한 것일지라도 반드시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되어 있다.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32f) 심기기 전에는 모든 채소 중에 가장 작은 것이었지만 싹이 나고 자라면 모든 주변의 풀이나 채소들 위에 오르도록 자라게 된다는 말씀이다. 물론 이 지상에는 겨자씨보다 작은 씨들(거의 먼지 크기인 난(蘭) 종류 - 그럼에도 이런 것의 키는 자라도 겨자와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작다.)도 있기는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겨자씨를 말씀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것들을 예를 드시는 것으로 먼 곳이나 접하기 어려운 어떤 것을 비유로 들지 않으시고 믿음과 존경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비유로 가르치시기 때문이다.
일단 흙에 심겨지고 나면 그 성장력은 처음의 씨앗과는 비교될 수 없어서 앞에서 네 가지의 토양으로 비유하실 때 30, 60, 100배와 비교될 수 없는 성장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제일 적게 자란 것일지라도 3M를 자란다고 할 때 그 키만 가지고 씨와 계산을 해도 최소한 300배가 되는 셈이니 엄청난 성장을 비유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겨자 나무의 성장성의 놀라움을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이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하시는 데 강조점이 있다. 처음에 한 사람 속에 생명의 씨앗인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질 때는 보이지도 않고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 같지도 않지만 일단 천국의 씨앗이 싹이 나고 자라기 시작하면 제대로 천국의 맛을 본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일생의 어떤 것보다도 인생의 범위를 넓게 차지하고 다른 사람들 에게까지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제 하반절에서 이런 사실을 좀더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32b) 여기 “깃들다[κατασκηνόω, 장막을 치다, 살다, 거주하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잠시 앉아서 지저귀거나 쉬어 가는 정도가 아니라 그 가지에 보금자리를 틀다 라는 의미로 이해되고 OT에서도 이러한 새들의 안식의 모습을 거론하는 내용들을 볼 수 있다.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겔17:23) 하였고 바로 뒤의 다니엘서에서도 느부삿네살 왕의 꿈을 해몽하는 다니엘의 말에서도 거론되고 있다.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이 거기에서 먹을 것을 얻더라”(단4:12)
건전치 못한 사람들은 이 새들을 어두움의 영들의 지도자로 이해(신천지)하기도 하는데 옳지 못한 해석이다. 특히 이 비유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라고 하는 데서 더욱 그렇다. 어떤 사람 속에 심겨진 하나님의 나라의 씨앗은 그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로 말미암아 또 다른 사람이 천국을 얻어 안식을 얻는다는 데서 더욱 그렇다.
분명 하나님의 나라는 본래 창조시부터 사람들의 것이었기 때문에 죄인이 십자가의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의 씨앗인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보잘것없는 것 같은 하나님 나라의 씨앗인 말씀으로 역사 되어 이 땅 위의 어떤 것보다 귀중한 천국을 찾고 삶의 가치를 불변하시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평강과 기쁨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야 말로 인생에 가장 소중한 가치요 변화이다. 여러분 모두가 이런 겨자씨의 비유 같은 하나님의 나라를 사실적으로 누릴 수 있기를…
Ⅲ. 비유와 해석을 병행하시는 주님(33~34)
오늘 마지막 말씀은 지금까지 비유에 대한 결론으로 주시는 말씀이다. 그럼에도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수준에 맞추어 말씀을 해설해 주시고 대적하는 반대자들에게는 하늘의 신비로 말씀하시지만 주님을 가까이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모든 말씀을 이해시키시는 배려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입장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순종하는 자세와 대적하는 자세의 안타까움을 보게 되는데 계속 반복되는 상황이지만 말씀을 깊이 안다고 큰 소리 치고 거드름을 피우는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은 오히려 오랜 예언과 언약을 따라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없었음을 볼 때 불신의 비극을 보는 것이다.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와 해석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는 이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 이미 성경에 예언된 사실임을 증거하기 위하여 시편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시78:2; 마13:35)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33) 역시 우리 주님의 깊은 배려를 여기서도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교육자 로서의 가르침이 아니라 가르침 받는 자나 듣는 사람들의 수준에 맞게 말씀을 가르치셨고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데까지 가르침을 멈추지 않는 사랑과 긍휼의 자세를 보게 된다. 사실 가르치고도 이해하지 못하면 안타까워하고 언성을 높이기도 하지만 이런 모습 속에서도 역시 메시아 다운 우리 주님의 면모를 보게 된다. 이런 전체적인 모습에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라는 말씀은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데까지’ 이해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이렇게 가르치신 것은 역시 세상적인 삶의 지혜나 다른 처세술이 아니라 “…말씀을 가르치시되”하신 것이다. 어떤 지식도 하나님을 깊이 가까이 아는 지식보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없다. 말씀을 바르게 배워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나라를 알며 어떻게 해야 바른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가도 알게 되므로 하나님 말씀의 바른 이해는 어느 때 어느 사람들에게도 중요하다.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의 안타까움은 하나님을 뒤돌려 놓고 다른 신을 섬기려고 했던 영적으로 어둡고 무지한 상태에서 있어졌던 역사적인 전례를 볼 때 생명의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땅에 교회가 탄생하고 연보를 받아 사람들을 공궤 하는 일이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보다 비중이 높아질 때 사도들은 그 일을 가능한 사람들에게 맡기면서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행6:2)라고 그 일을 다른 7사람들에게 맡기는 성령의 지혜를 본다.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가르치는 기준을 분명히 보여주고 계신다. 어떤 유창한 언어구사나 듣기 좋은 강연이기보다는 비유를 들어 가르치신 이유가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가 모든 가르치심의 바탕이 되었음을 본다. 이것은 어느 시대 어떤 사람들에게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느 사람들에게나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시키고 천국에 가고 싶은 믿음이 생기도록 말씀을 전하는 것은 우리 주님의 모습을 본받는 자세임을 배운다. 저 또한 그렇게 말씀으로 섬기고 싶다.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34f) 이러한 표현은 언제나 비유로만 말씀하셨다는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적대자들이 있을 때만이지 항상 그러셨던 것은 아니셨다. 이런 입장에서도 “비유[παραβολή, 곁에 둠, 비교]”도 의미를 달리 이해하게 된다. 불신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 없는 비유로 말씀하셨지만 진리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어떤 비유를 사용하셔서 라도 천국을 보여 주시고 이해시키셨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34b)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좀 더 구체적으로 지도하셨음을 본다. 우리가 쉽게 알고 있는 산상보훈이나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는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귀한 교훈들을 그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베푸심을 볼 때도 모든 순종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말씀과 빛의 보화를 조금도 감추지 않으셨음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34b)는 말씀이나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33)라는 모습은 다르지 않은 주님의 의도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래의 의도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딤전2:4)기 때문이다. 비유를 해석하시고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자세는 다른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사죄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맛본 사람들은 그 자신이 경험한 천국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신과 꼭 같이 경험시키고 싶지만 그럴 때 마다 이 좋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표현할 방법이 모자라 안타까워할 때가 많다.
하늘 나라의 생명의 씨인 복음이 처음에는 하찮은 것처럼 한 사람의 삶에 들어와 마침내는 그 사람이 알고 경험했던 세상의 어떤 것보다 커져서 그것이 삶의 이유와 가치가 되고 그러한 확신을 가지게 될 때는 허무한 세상에 힘겨워하는 다른 사람들 까지도 자신과 꼭 같은 안식과 평안을 끼치게 되는 데까지 삶의 비율에 커지게 된다.
사랑의 우리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나라에 무지하기를 결코 원치 않으신다. 되도록이면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영광의 나라에 참여하게 되기를 자신의 목숨을 주시기까지 원하신다. 우리 또한 하나님 나라를 다른 사람들이 좀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삶으로서 나타내고 더불어 누리는데 우리 인생의 가진 지혜와 정력을 다 쓸 수 있는 모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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