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 종배 전도자
마 27:45~54 2003-07-17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우리는 오늘 주님께서 이 수치의 십자가에 오시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다 언급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는 바로 예수의 죽음에서 출발하는 신앙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용서가 되고 화해가 되는 것도 십자가 밑에서만 가능하다. 은혜의 출발점도 십자가이고 새 생명의 근거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십자가는 저주받은 인생이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을 연결하는 연결 고리다.

내 죄를 의로 채우시는 능력의 역사도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인류의 저주 중에서는 가장 으뜸일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로마인들은 몸서리쳐지는 이 장면을 즐기고 있었다. 사람의 죽음의 고통을 즐기는 것만큼 잔인함이 있을까? 그러나 역사 속에서 죄악이 극에 달할 때마다 사람들은 사람의 고통스런 최후와 왜곡 된 성(性)을 즐기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역사였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사람을 나무에 달아 죽이는 형벌이 없었다. 다만 어떤 특정한 범죄자는 죽여서 사람들에게 교훈이 되게 하려고 죽인 시체를 나무에 달아두는 예는 있었다. "사람이 만일 죽을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신21:22)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미 2천년 전에 그리스도의 인류를 위해 친히 저주의 십자가를 지실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3) 넓은 영적인 안목을 가진 바울은 이미 이를 간파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Ⅰ.인류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이며 심판이시다.(45~46)

“제 육 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바울 사도는 범죄한 인류를 향하여 절망적인 선언을 한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하였고 앞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라고 절망하며 다시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롬6:23) 라고 비극을 고백한다. 이러한 신앙적 논리는 구약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에스겔 18:20에서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참고: 신24:16; 대하25:4)고 선언했고 지혜의 왕 솔로몬도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7:20)고 고백했다.

이렇게 모든 인생에게 일반적인 범죄와 거기에 따른 심판은 창조주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면 죄는 반드시 형벌 받아야만 한다. 그러한 죄의 대가를 감당하고 살아날 인간은 이 인류 역사에 한 사람도 없다. 천하의 영웅호걸도 하나님의 진노를 견딜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공의를 충족시키기 위한 진노를 자신의 아들에게 쏟으심으로 공의를 만족시키신 것이다.

1.죄로 인한 형벌과 고통의 절정이다.

역사상 가장 잔인한 사형방법이 바로 십자가형이다. 우리 나라의 능지처참(陵遲處斬)이 라는 것이 있기는 하였지만 이것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십자가형은 단순히 십자에 달리는 것으로 완료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형이 선고된 죄인은 먼저는 채찍으로 온 몸이 찢길 정도로 매를 맞게되고 생으로 된 무거운 나무 형틀, 지기에 힘부칠 정도의 그 형틀을 친히 질 사람에게 메워서 탈진할 정도로 힘을 빼고 사형장까지 온다. 우리는 같은 병행 구절인 마가복음 15:21에서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라는 상황 속에서도 이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오늘날 성서의 땅에서 모형으로 만들어지는 마른나무로 만든 가벼운 십자가가 아니다. 그것이 꼭 우리가 오늘날 생각하는 열 십자형이(†) 아닐 수도 있다. 본래 성경에 쓰인 십자가는[헬, stauros,ꃃ (위로 향한) 기둥, 말뚝, 곧은 막대기; 헬, stauro~ ꂿ 말뚝을 고정시키다, 십자가에 못박다, 말뚝에 못박다.] 의미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 잔인 무도한 형틀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천년 전부터 있어왔고 바로 온 인류의 죄를 그 형들 위에 쏟으시므로 그 고통은 극에 달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3시간동안 십자가에 달려 계시시다가 운명하셨지만[요한복음19:31~33에는 예수는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이미 운명하셨지만(요19:36-출12:46) 강도들은 아직도 죽지 않아서 다리를 꺾었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이 형틀에 달린 어떤 사람들은 2~3일을 버티다가 죽기도 한다고 역사가들은 전한다. 우리가 아는 대로 주님께서는 이 십자가에 오시기까지 전날 밤부터 한 숨도 주무시지 않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떨어지도록 기도하시고 이 운명을 맞으셨기 때문에 이미 기진 할대로 기진 해 계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후의 범죄 한 인류를 향한 모든 진노를 예수 그리스도께 한꺼번에 다 쏟으신 것이다.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죄 없이 사신 예수 그리스도께 온 인류의 죄를 모두 실어 형벌 하시는 장면이다. 이러한 고난을 받으시는 주님의 절규가 바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이셨던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2.죄로 인한 수치의 절정이다.

우리는 많은 그림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림들은 모두 고상한 모습으로 주님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함을 보는데 요한 복음의 기록이 이를 확인 시켜 주고 있다.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19:23~24) 라는 기록을 볼 때 주님은 완전히 발가벗겨진 상태에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분명하다.

바로 직전에도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시고(막14:65, 15:19), 희롱을 당하시고(마27:29, 41; 막15:31; 눅22:63, 23:11, 36), 모욕 받고(마27:39; 막15:29) 욕을 들으시며(마27:44; 막15:32; 눅22:65) 죄 없으신 예수님은 견딜 수 없는 수치심으로 외치시기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셨다. 왜인가? 바로 저와 여러분이 받아야 마땅한 수치를 대신 당하고 계신 것이다.

3.단절과 고독의 절정이다.

“제 육 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45~46)

가장 밝은 시간에 3시간 동안 이 땅에 어두움이 임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향한 처음이자 마지막 외면이셨다. 주님께 있어서 참으로 비참한 형벌은 십자가의 고통보다도 수치보다도 하나님께서 눈을 돌리시고 외면하신 고독이었다. 창세이전부터 영원에서 영원까지 함께 영광을 나눠왔던 아버지하나님께서 [요17:5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우리모두의 죄를 지신 주님을 외면하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울부짖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비극적인 죄에 대하여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죄에 대하여 철저하게 절망하지 못하면 범죄 한 인생을 긍정하게 되고 궁극적인 해결책을 필요로 하지 못하고 십자가를 바로 보지 못한다.[나는 예수가 아니라도 그래도 쓸만한 사람이지…]

주님께서 왜 이러한 고독을 맛보셔야만 했는가? 바로 저와 여러분을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해서이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고통과 수치와 버림받은 고독의 절정을 경험하셔야 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여기에 있게 되었다.

Ⅱ.죄 아래 죽음과 절망으로 신음하는 인류를 향한 사랑의 절정이다.(51~53)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십자가는 죄를 향해 진노하시는 철저한 공의의 진노이면서 동전의 양면 같은 한편에서는 스스로 죄를 해결할 수 없는 죄를 범할 수밖에 없고 죄의 종노릇하는 것으로 일생을 허비하고 영원조차도 저주일 수밖에 없는 가련한 온 인류와 역사 속의 죄인들을 향한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의 극진하신 사랑의 행동이다. 죄의 성격은 고통과 수치심과 버림받은 고독이다. 이러한 비극만이 전부인 인생을 구원하시고자 하나님은 대속의 제물을 바로 자신의 독생자로 삼으신 것이다. 사도 요한을 통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6~17)고 십자가에 높이 달린 예수는 광야 같은 세상에서 죄의 불뱀에 물린 모든 인생들로 하여금 쳐다보고 믿고 살게 하시려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임을 고백한다.

바울사도는 이에 대한 사랑을 묘사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고 고백한다. 만년에 다시 요한 사도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우리는 죄인 된 인간이 구원 얻을 귀중한 논리인 로마서를 통하여 죄에 대한 처절한 절망과 함께 그 뒤에 뒤따르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역사를 본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철저하게 고통 당하시고 수치를 당하시며 버림을 당하시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십자가 위의 주님의 절망의 외침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식 속에 하나님의 “내가 사람을 사랑하노라!”는 은혜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이 놀라운 은혜의 역사의 결과로 “이에 ①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②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③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①일년 일차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가려져 있는 지성소는 가렸던 휘장이 찢어짐으로 이 은혜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공간이 되어 하나님은 임마누엘이 되게 되었고 ②무덤은 더 이상 죄인을 가두고 썩히는 장소가 되지 못하고 수치를 들어내게 되었고 ③죄로 인하여 들어 갈 수 없었던 거룩한 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로 씻김을 받은 자들마다 들어가게 되는 모습을 하나님은 사랑의 절정인 십자가의 죽음 바로 직후에 보여주신 것이다.

Ⅲ.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게 하는 이유이다.(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6~11)

여기 본문의 백부장은 이스라엘의 사주로 빌라도의 명을 받아 바로 주님의 사형을 집행하던 로마의 군인이었다. 이 백부장은 아마도 이전에도 많은 죄수들을 십자가에 처형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죽은 사람은 없었던 까닭에[눅23:34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 놀라운 사랑의 헌신의 죽음 앞에 머리를 숙이지 못할 강심장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죄로 인하여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만이 고개를 쳐들고 큰소리 칠 뿐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울부짖는 죽음 뒤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알고 죄에 순종하여 죄의 종노릇하던 데서 돌이켜 의의 종노릇하게 되었다. 할렐루야!

Ⅳ.이제는 나 자신이 죽어야 할 이유이다.

바울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고 고백을 하면서 주님께서 달리신 바로 그 십자가에 자신이 죽었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2~24) 라고 증거하고 있다. 로마서 6:11에서는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라는 바울의 당부를 듣는다.

이것은 우리 자신들에 대하여 몇 가지를 요구하고 이는 것이다.

①십자가를 보면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늘 확인하는 것이다.[어떤 경우든지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늘 확인하는 것이다.- 다시 범죄치 않을 근거다.] ②나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불하고 사주신 새로운 피조물임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우리 인생의 목표를 늘 바로 보게 한다.] ③불변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이유가 된다.[십자가를 보면서 “독생자를 죽이고 나를 살리신 사랑의 역사”의 장소-]

롬8: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39 …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주님은 가치 없고 천한 죄의 종인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믿는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절망의외침은 우리 모든 인류에게 소망이 되었다. 이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보다도 수치보다도 고독도 예수 그리스도는 능히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는 이로 인하여 오늘 저와 여러분을 살리고 인류를 살릴 수 있다는 사랑의 기대 때문이었다.

그럼으로 참으로 비참한 형벌은 십자가의 고통보다도 수치보다도 하나님의 이 사랑의 역사를 믿지 못하는 비극일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란?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것이다. 미국의 한 전도자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운명하신 날을 D-day 라고 했다. Death(죽음), Darkness(암흑), Destiny(운명)

그리스도의 교회는 바로 예수의 죽음에서 출발하는 신앙이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용서가 되고, 화해가 되는 것도 십자가 밑에서만 가능하다. 은혜의 출발점도 십자가이고 새 생명의 근거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내 죄를 의로 채우시는 능력의 역사도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저주받은 인생이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을 연결하는 연결 고리다. 이 십자가 뒤에만 영광의 부활이 있음을 믿으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