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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로마서 1~11장까지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인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죄에서의 구속과 주님의 새로운 피조물이 된 원리를 아주 논리 정연하게 증거를 한다. 그리고서는 그 전혀 새로운 주님의 구성원인 교회 속에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이 12장부터 하나 하나 증거를 한다. 사실 우리 죽을 수밖에 없는 절망에서 전혀 우리의 공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의 역사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 감격을 가진다면 이러한 삶을 자연적이어야 하는데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인간은 아직도 완전치 못하기 때문에 끊임없는 가르침과 훈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나아가라고 격려하는 것이다.
12장 서두인 1~2절은 세상과 완전히 구별된 하나님을 경배해야하는 신앙의 권면을 예배라는 인간존재의 절대 목적임을 선언하고 본문 바로 앞의 3~8은 하늘의 기관인 교회 속에서의 직분의 수행의 원리를 가르친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에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가족구성원들의 일반적인 인간관계의 방법과 덕목을 사랑과 열심의 격려로 소망을 향한 자세를 격려하고 있다.
우리는 오늘 이 귀한 사랑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바람직한 영향들을 살펴 가면서 오늘 우리 자신의 신앙의 모습들을 점검해 봤으면 한다.
[][][][][Ⅰ.사랑엔 거짓이 없다.(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우리는 이 시대에 참으로 진실하고 절실한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 사람들은 “사랑한다!”고 고백해 놓고서는 너무 쉽게 “이제는 아니야” 라고 돌아서는 모습들을 너무나 흔하게 본다. 참으로 비극이다. 이런 비극적인 일들이 너무 흔해서 이제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고 쉽게 단념해 버린다. 이런 모든 일들은 그것이 사실로는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임을 오늘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신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한다고 말씀하시고 책임을 지셨다. 사랑의 대상이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그 죽음을 친히 감당하셔서 십자가를 지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희생에 감격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거짓이 없다는 표현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표현이다. "거짓이 없나니"[헬, anypokritos an(모음 앞에서의 부정)+hypokrinomai(가면을 쓰고 연기하다)] ‘무대 위에서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는 것처럼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즉 위선자를 일컫는 말이다. 마치 연속극에서 자기와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의 역할을 하는 것과 같이 하지 않는, 진지한 자신의 삶으로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는 여러 가지의 가면을 쓰고 사는 이중적인 삶이 문제이다. TV 연속극을 통해서 전파되는 거짓사랑에 익숙해져 있고 또 그것을 흉내내려고 하는 것들이 문제이다. 물론 신앙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것을 무덤의 것과 속에 비유하신 바 있다. 것에는 회칠을 해서 깨끗해 보이지만 속에는 썩은 것으로 가득한 무덤을 말씀하시면서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을 책망하시면서 이 표현을 쓰셨다.[헬, hypokrites]
우리가 행여라도 가면을 쓰고 있을 때 사람들은 속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바로 알아보신다는 사실을 두렵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거짓된 삶을 버리게 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는데 바울 사도 당시에 진실 되지 못한 그리스도인인체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이중적인 자세로 주님의 교회를 들락거렸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온 십자가의 구속의 사랑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것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 새로운 피조물들인 교회 속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관계는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절대적 사랑의 피를 매주 나눠 마시는 예배야말로 우리들에게서 위선과 거짓을 벗게 만드는 강권하는 사랑이다. 이것은 세상에서 때로는 손해를 감수해야 하고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지만 언제나 “…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는 음성을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끔찍한 악을 몸서리 칠 수 있는 사랑의 사람들이 모여서 영광을 돌리고 그러한 것들을 확인하며 격려하는 세상과 다른 기관이 바로 주님의 몸 된 교회이다.
Ⅱ.사랑은 겸손하게 한다.(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감당치 못할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당연히 그것이 목숨을 바치는 친구로서의 사랑과 혈연적인 애정을 서로 나누는 것은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주님께서는 “…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마12:48~50; 막3:33~35)
피를 나눈 사람만이 형제요 자매이다. 교회 속에서 서로는 거룩한 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와 자매 관계이다. 이것은 세속적인 형제애를 뛰어 넘은 형제애로 맺어진 관계가 바로 성도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교회 속에서조차 혈육의 관계를 찾는다면 그런 사람은 엄밀하게 주님의 보혈을 귀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신비한 주님의 피로 엮어진 관계는 세상의 모든 사랑을 모두 포함한다. 여기서 “형제를 사랑하여 …”는 형제간의 깊은 사랑의 관계를 의미하는 보다 인간적인 사랑이다.[헬, philadelphia]
다음에 나타나는 “우애하고”는 또 다른 의미이다. [헬, philostorgos, philos(형제애)+storge(부모 자식간의 자연적 애정)] 요즈음은 이러한 사랑이 희미해져서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낱말이 되어가고 있다. 부모, 자식간의 목숨을 바치기까지 하는 의무적인 사랑을 수반하는 의미로 새끼로부터 부양을 받지 못하지만 자기의 목숨으로 새끼의 생명을 지켜내는 동물적인 사랑을 포함하는 사랑을 뜻한다. 그리스도안에서의 사랑은 하늘과 땅, 물 속과 우주를 총 망라하는 깊은 사랑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을 위해서 주님께서 피를 흘리셨다. 그러므로 당연히 우애하고 존경하는 것을 먼저 하는 사람이 주님의 사람이다.
“… 서로 먼저 하며” 문자 적인 의미가 [헬, proegeomai]‘앞서서 간다’ 라는 뜻을 가진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사랑 받기에 굶주려 있다. 아내들은 남편이 사랑을 안 해 준다고 불만이고 교회 안에서는 사랑이 없다고 불평들을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입은 사람은 사랑하는데 언제나 내가 앞서 간다는 것이다. 남이 사랑하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내가 먼저 사랑의 손길을 내민다. 주님께서 만약에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을 찾기까지 기다리셨다면 6천년의 역사가 지났어도 아직 사랑이 무엇인가를 몰랐을 것이다.
세상은 사랑 받기를 간절히 갈망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래서는 안 된다. 그것은 대단한 무순이다. 자신이 먼저 사랑하지 못하면서 ‘교회에 사랑이 없다!’는 말은 ‘나는 미움의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슬픈 표현이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373:3“어떤 사람 우상 앞에 복을 빌고 있으며, 어떤 사람 자연 앞에 사랑 요구하도다, 먼저 믿는 사람들 예수 사랑 가지고, 나타내지 않으면 저들 실망하겠네, 예수 사랑 가지고 예수 사랑 가지고, 나타내지 않으면 저들 실망하겠네”
Ⅲ.사랑은 열심을 가진다.(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연애의 경험들을 해 본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은 부지런하다는 것을 실감했을 것이다. 부모님이 못나가게 해도 무슨 핑계, 무슨 이유를 다 만들어 만나려고 안달이고 상대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온 갓 부지런을 다 떤다. 세수도 잘 안 하던 친구가 거울을 쳐다보고 로션을 찍어 바르고 요란을 떤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애하는 사람을 쉽게 알아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입고 또 사랑한다면 당연히 그러지 않을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끝내면서 무서운 선언을 하는 것을 듣는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16:22) 사랑이 식어진 가운데 주님이 임하신다면 참으로 비극일 수밖에 없다.
박해 속에서 신앙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으로 온 갓 시련과 고초를 겪으면서도 예배당에 가는 것이 그렇게 좋아서 부모가 시키는 일을 다하기 위해서 밤중에도 일을 했다는 이야기를 더러 들었다. 그러던 우리 대한민국의 신앙인들이 오랜 동안 박해도 없고 어려움도 없다보니 이제는 교회 오는 것을 짐스럽게 여기는 안타까운 시대가 되었다.
엄밀하게 말해서 ‘교회의 예배에 오지 않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표현하면 지나칠까? [헬, to pneumati zeontes, 영혼을 뜨겁게 하라!]
주님을 섬기는데 게으른 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열심을 일어 버렸다면 어디서 그 열심을 잃었는지 생각하고 회개하여 회복해야만 할 것이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뜨겁거나 차지 않으며 토해 내치시겠다고 경고하셨다.(계3:14~16)
요즘 아이들이 컴퓨터 게임을 즐기는 것을 보면 주님을 섬기는 것이 정말 컴퓨터 게임을 즐기는 것만 못할까, 생각하게된다. 좀 절제하라는 이야기도 먹히지 않고 시간만 있으면 어느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거의 광기에 가까운 아이들이 많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을 뿐만 아니라 이제 다시 오시겠다는 언약과 함께 영원한 기쁨과 영광을 약속하고 계신다. 이런 주님을 뜨거운 가슴으로 사랑하지 못할까?
Ⅳ.사랑에는 언제나 소망과 기쁨이 있다.(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사랑과 소망은 언제나 상관관계에 있다. 남편을 지극히 사랑하는 아내는 남편이 집에 돌아오는 것을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 이러한 아내에게 남편의 귀가는 소망이 될 것이다. 음식을 준비하며 콧노래를 부르며 혹시 남편이 들어오다가 마음 상할 것이 없나 집안을 살필 것이다.[오늘은 와서 어떻게 할까?] 그러나 만약에 사랑이 식어진 가운데 짐스러운 남편이라면 집으로 돌아오는 남편에 대한 소망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부부간의 애정 테스트는 잠시라도 떨어져 있을 때 서로에게 갖는 기대감과 비래한다.] 주님에 대한 믿음이 우리의 확신이라면 그 주님을 사랑하면서 소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며 거기에 최고의 가치와 목표를 둔 사람이라면 그 때까지 어떤 환난과 고통이 온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약속하신 영광된 만남의 소망 속에 고난은 무난히 견디고도 남을 것이다.
오늘 나의 주님에 대한 사랑指數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얼마나 사모하느냐와 비례한다. 주님이 나의 인생에 최고의 가치요 목적인 사람, 그것에 모든 것을 맞추고 사는 사람은 기대와 설렘으로 어서 오심을 소망할 것이고 만약에 그렇지 못하다면 ‘조금만 기다려 주셔요…!’ 하면서 두려워 할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라는 사람들은 세월이 흘러도 같은 부탁을 계속해서 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마라나타[헬, maranatha!v](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가 어려운 사람은 어디서 떨어졌는가를 찾아서 회개하고 처음 사랑을 가질 필요가 있다.[에베소 교회-계2:5]
여러분 소망 중에 즐거워합니까? 이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기본이다. 소망은 사랑과 믿음에만 있다. 그런 사람은 지금 당하는 어려움이 어떤 것이든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에 사는 사람들을 향하여 격려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37)
이런 사람들의 환난이나 고통은 오히려 기도하게 만든다. “기도에 항상 힘쓰며”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어려움이 온다면 이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드는 것이므로 오히려 감사하면서 엎드리십시오. 사랑에 확신이 오는 사람에겐 어떤 어려움도 반드시 넘어야할 또 하나의 작은 산으로 보일 뿐 절망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문제는 사랑 받음에 확신이 없는 사람에게 고난은, 특히 환난은 절망의 요새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주님의 사랑에 확신을 갖고 다시 오심을 소망하며 그 선하신 약속에 거하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Ⅴ.사랑은 아까울 것이 없다.(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우리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 사람에게 아까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역시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의 관계에 있다면 계산이라는 것이 없다. 계산은 반드시 거래관계에나 있는 것이다. 우리말에 “아내가 예쁘면 처가 집 소 말뚝에도 절을 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사랑 받음이 감격이 된다면 그의 사람들, 즉 성도들과 교회와 그리고 하나님의 일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데 역시 인색함이 없을 것이다. 그의 사람들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섬기고 드릴 수 있음에 충분한 감사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데도 그에게 시간이든 물질이든지 드리기를 아까워한다면 주님은 다른 방법으로라도 그것을 빼앗아 가실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건강이나 물질을 잃어 버렸다면 ‘아 주님께서 나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구나!’ 하고 위로하시고 다음부터는 주님께 드림에 계산이 없기를 바란다.
진정한 사랑은 가면을 쓰지 않는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는 지혜로 살 것이다. 사랑은 겸손하게 하며 사랑의 표현을 먼저 하게 만든다. 사랑은 절대로 게으르지 않는다. 수고에도 모임에도 게으름이 없이 오로지 주님의 뜻에 맞추려고 애쓰게 되어 있다. 그러한 사랑은 환난과 역경 중에서도 오히려 즐거워하고 더욱 열심히 기도하게 될 것이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에 대해서 결코 아까울 것이 없다. 시간과 물질과 목숨까지도 기꺼이 드리기를 즐거워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검증은 ‘내가 진정으로 주님의 사랑 받음에 확신이 있는가, 내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가?’의 검증이 될 것이다. “마라나타!”로 서로를 격려했던 그 믿음이 오늘 우리의 교회에도 삶에도 날마다 고백되어 질 수 있기를 주님의 복되신 이름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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