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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배 전도자
눅 7:40~43 2003-11-14
사함을 받은 일이 많은 자는 많이 사랑하느니라[7:36~50]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시기에 대단히 많은 여인들이 주님을 따르고 섬겼고 그들 중에는 사연 많은 여인들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름을 나타낸 여인들이 있는가 하면 이름도 언급되지 않은 여인들과의 일화를 성경은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8:2~3)

오늘 이 본문의 여인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주님을 만나고 섬기는 모습에서 그의 과거의 삶과 평가에 관계없이 오늘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할 정도로 겸손하고 진실하며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비슷한 내용이 마26:6~13; 막14:3~9; 요12:1~8에도 기록되고 있다.]

사실 이 아름다운 사죄와 헌신의 모습을 통해서 너무나 무미 건조하고 의례적인 오늘 우리의 신앙에 도전을 받게 된다. 우리는 지난 주님의 날에도 우리의 입술로 고백하고 시인하는 역사를 통해서 나 자신이 확신을 얻고 다른 사람을 구원에 참여시키는 은혜의 역사를 감당하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하는 삶의 모습을 바로 비추어보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표현하고 드러내는 정도를 가름하여 보다 바람직한 믿음과 사랑을 가질 수 있는 ‘사함을 받은 일이 많은 자는 많이 사랑하느니라’는 주님의 권면을 우리 각자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기를 주님의 복되신 이름으로 …

Ⅰ.주님은 죄의 경중(輕重)을 따지지 않으신다.

주님은 교만하기 그지없는 이 시몬이란 바리새인의 식사 초청도 거절치 않으셨고 이 죄 많은 여인의 섬김도 거절치 않으셨다. 사실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던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13) 하신 말씀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을 식사에 초대한 바리새인은 자신과 이 죄 많은 여인을 두고 주님을 시험하는 무례함까지 보이고 있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39) 하고 혼자말로 중얼거리지만 이것을 주님은 먼저 아셨고 성령께서도 들으셨기 때문에 오늘 이 글을 누가를 통해서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重罪인과 수도사의 기도]

사람들은 용서받지 못할 죽을 죄인과 가벼운 죄인을 구분하고 보다 낫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 시몬처럼 그렇지 못한 자를 정죄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모든 사람이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일 뿐이다.

우리 모든 인류는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로든 주님을 만나야만 한다.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십자가에 나아가야 하며 반드시 주님을 만나야만 한다.

주님은 어떤 사람의 과거의 상태를 기준으로 만나지 않으셨다. 또 만남을 요청하면 거절치 않으셨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만난 후의 상태이다.

요한은 우리에게 경계하여 이르기를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8~10) 고 지적한다.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계하여 사죄를 받든지 스스로 의인인체 하지만 형벌로 가야 당연한 지옥의 자식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달은 사실에 감사를 드려야 한다. 사죄 받고 사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을 가져야 한다.

또 어떤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는 완전히 용서받지 못할 죄인은 없으며, 십자가의 은혜와 회개 없이 사죄 받을 작은 죄가 없다는 사실을 증거 할 필요가 있다.

Ⅱ.사죄의 감격은 주님을 대하는 행동에 나타난다.

사죄 받은 자의 섬김을 배운다. 바리새인과 그 집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죄 많은 여인[창녀]으로 불려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미 주님 앞에 가면 사죄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음을 알고 있었고 그러한 자신의 믿음을 사람들의 눈치 보지 않고 표현했다. 여기에 표현되는 것으로 봐서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죽어 없어져야 된다고 생각했던 여인이었던 같다. 그러나 이 여자가 과거에 무슨 죄를 저질러서 사람들에게 그런 평가를 들었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37~38)“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이 여인은 당시 바리새인 시몬에게나 함께 한 사람들에게 죄인 취급을 받았지만 오늘 이 여인 같이 주님을 대하거나 섬기지 못함을 무언으로 우리에게 책망하고 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날 때나 예배하기 위해 올 때 어떤가? 바리새인의 자세인가 이 여인의 자세인가?

①주님 앞에 최고의 겸손을 나타낸다.[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요즘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라도 보고 손이라도 잡아 보려고 야단법석이지만 이 여자는 그야 말로 말석의 자리 예수의 뒤로 와서 발 곁에 엎드려 고개를 숙인 체로 오로지 주님의 발에 눈물을 쏟고 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4:6)고 야고보는 권면하고 있다.

②주님께 오자말자 회개의 눈물을 흘린다.[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사실 오늘 죄가 발각되어도 ‘재수 없어 나만 걸렸다’고 뻔뻔한 것을 보면 이 여인의 회개의 모습이 아름답다. 주님께서 “너는 지탄받아 마땅한 죄인이다!” 라고 하신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 죄의 절규를 주님 앞에 눈물로 토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숨기다, 숨기다 발각이 되면 어쩔 수 없이 시인하는 것은 회개라고 할 수 없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신이 먼저 죄를 그대로 가지고 많은 사람들의 매서운 눈초리를 그대로 의식하면서 주님께 나와 용서를 주실 줄 확실히 믿고 주님 앞에 눈물을 쏟고 있다.

주님은 회개를 가장 아름답게 보시기 때문에 자신을 청한 바리새인과는 너무나 다른 이 여인을 그윽한 긍휼의 눈으로 내려다보시면서 이미 용서를 주고 계셨을 것이다.

③최고의 헌신의 자세로 주님을 섬긴다.[자기 머리털로 씻고]예수 그리스도의 발을 씻어드린 그 머리채가 요즘 흔한 permanent 형의 머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유대 사회는 물론이고 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여인의 머리는 자신의 정절만큼이나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 사실 아닌가![삼단 같은 머리채] 그럼에도 이 여인은 눈물과 머리채로 시몬이 의무로도 씻어드리지 않은 주님의 먼지 묻은 발을 씻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자존심과 가치, 아름다움을 다 걸어 주님을 섬기고 있는 것을 본다.

④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모습이다.[그 발에 입맞추고] 예수 그리스도의 발도 우리와 꼭 같은 먼지를 뒤집어쓴 발일 뿐이다. 그러나 여인은 주님을 극진히 사랑하는 나머지 먼지를 눈물로 씻고 짭짤해졌을 그 발에 연신 입맛추고 있다. 사랑의 가장 구체적인 모습은 그 사람의 가장 추한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약점조차도 감싸 안을 수 있다는 것에서 이 여인은 주님의 사죄의 감격을 이미 누리며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는 자신을 용서하시는 주님을 극진히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⑤자신의 가진 것에서 최고의 가치를 드린다.[향유를 부으니] 기구하고 비참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일수록 돈이 나갈 만한 것을 꼭 하나쯤 장만하고 아차 하는 순간에는 그것을 가지고 위기를 모면하려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여인의 향유 옥합은 남들로부터 욕을 들으면서 죄지으면 돈을 모아 사 가지고 생명처럼 귀중하게 아끼고 있었던 것임에 틀림이 없다. 머리에나 향으로 바를 수 있는 이 자신의 인생에 최고의 가치를 지금 주님 발에다 붓고 스스로 감격하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세상에 한 주간동안 파묻혀 살며 알고도 모르고도 주님을 거슬린 죄들을 가지고 이 여인처럼 주님 발 곁에 엎드리듯이 겸손으로 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오늘 여러분들은 주님을 예배하러 나와서 너무 겉치레로 기도를 하지는 않았는가?

Ⅲ.은혜 받은 만큼 사랑한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47, 50)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 시몬에게 한가지의 비유로 물으셨던 말씀이 바로 V41~43이다. “…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그리고서는 시몬이 대답하기를 ”…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 네 판단이 옳다“ 이와 비슷한 내용의 비유가 마태복음 18:23~35 에 壹萬 달란트 빚진 자와 百 데나리온의 탕감에 대한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 그 내용의 요지도 평생을 벌어도 갚을 수 없는 죄인의 사죄에 관한 비유로 壹萬 달란트 빚진 자를 비유한다면 인간관계의 적지 않은 부채에 관한 말씀이었고 영원히 갚지 못할 죄의 용서를 받은 종은 그 감격을 잃어버리고 사소한 것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교훈으로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다시 주님께서는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47) 는 말씀을 하신다. 이 말씀이 ‘주님을 많이 사랑하면 많이 용서받고 적게 사랑하면 적게 용서받는다’는 식으로 오해될 소지는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자세히 살펴보면 분명히 “그러므로 이 여자는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 증거로 이 여자는 나를 많이 사랑하였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사랑도 적게 나타낸다."[현대어]는 번역에서 이해하게 되듯이 사죄에 감격이 크면 클수록 주님을 향한 사랑과 희생과 헌신이 많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고 이러한 일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쉽게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背恩忘德한 오늘의 우리 사람들은 사실 ‘물에서 건져 놓았더니 보자기 내어놓아라’는 식으로 받은 은혜를 빨리 잊어버리는 시대가 되었지만 말이다.

우리의 나의 신앙의 표현은 내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표현이라는 데서 반성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죽어 사 주신 주님의 사랑을 우리는 너무나 가볍게 잊어버리고 주님을 섬기는데 너무 인색하고 계산적이지 않는가 생각할 때가 많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의 말미에서도 역시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50) “네가 나를 많이 사랑함이 너를 구원하였다!”가 아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고 하셨다는 사실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자세는 다른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믿음으로 나타낸다는 주님의 교훈이다.

오늘도 우리 각자에게 주님께서 보시면서 “네 사랑함이 많은 것을 보니 너는 많은 죄를 용서받은 사람답구나!” 라고 충성되게 섬기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것이다. 믿는가

Ⅳ.사죄와 평안을 확신 받았다.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48, 50)

‘우리는 주님을 만날 때마다[예배를 끝낼 때마다] 이러한 확신과 감사를 얻는가?’ 주님께서도 사랑과 충성은 언제나 칭찬하신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믿고 순종하고 세례를 받고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에게 불변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한 은혜를 실재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모든 사람 다가 아니고 매 시간마다는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이 이름 없는 여인과 같이 자신을 죄인으로 지목하고 비수 같이 쏘아보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주님을 향하는 하나의 마음으로 겸손과 회개와 헌신과 사랑과 자신이 가진 최고의 가치를 가지고 섬길 때 비로소 자신의 것으로 경험되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는 어떤 경험과 아픔을 겪던지 이러한 자세로 매 예배시간마다 주님을 만난다면 오늘도 주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위로하시고 예배 중에든지 끝내고 돌아가는 나에게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말씀하실 것이다. 그러나 전제되는 것은 우리가 이 이름 없는 여인처럼 사람을 의식함이 없이 최고의 가치로 주님을 섬길 때라는 것이다. 오늘도 주님을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이러한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주님의 복되신 이름으로 …

죄와 수치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와서 해결 받지 못한 사람이 있었는가? 십자가의 우편 강도[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2~43], 개 취급을 당하던 수로보니게의 헬라 여인도(막7:24~30) 일곱 귀신이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도(눅8:2) 어떤 인생의 문제든 진실로 주님 앞에 가지고 오기만 하면 해결 받지 못한 사람이나 문제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주님의 약속대로(마26:13; 막14:9) 오늘까지 우리의 예배에 아름다운 제목으로 이야기되어지는 이 여인이 이처럼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된 것은 단순히 그녀의 생각으로 그쳤다면 가능했겠는가 하는 것이다. 자신의 사실적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동네의 사람들만 생각했어도 예수 앞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고 그것이 부끄럽고 무서웠다면 아마도 고민하다가 그녀의 절망적인 인생을 끝내고 말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생각에만 이 공상, 저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이 여인의 인생은 결코 아무런 변화나 감격을 체험치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오늘 우리에게 이 죄 많았던 여인이 소리 없이 가르치는 사실은 주님께 나오는 데나 섬기는데 결코 머뭇거리거나 등한히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듣고 행함으로 순종하는 모든 자의 것임을 확신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