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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죄에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와 꼭 같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은혜의 역사 속에 반응하는 여러 계층 사람들의 대응과 신앙의 지도자들의 자세,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 베들레헴 짐승의 우릿간 구유에 나셔야만 했던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이 땅에 오심에 대한 우리 각자의 자세를 생각 했었다.
요한 사도가 그의 복음서 첫 부분에서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1:10~11) 라고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에 의해 지음을 받은 세상, 택한 백성 이스라엘 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오심을 환영하지 못하고 영접은 고사하고 그를 약속의 땅에서 쫓아내려는 간교함이 그리스도의 탄생의 시작에서부터 공공연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본다. 죄의 사람들은 예수께서 분명히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비상처럼 싫어하는 것을 보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 은혜와 구원의 역사에도 사악한 인간의 간교함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결코 간교한 인간에 의해 자신의 계획을 철회 하시거나 변경하지 않으심을 본다. 특히 왕좌에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의 탄생을 자신의 정적의 출현으로 잘못 판단해서 자손 대대에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일을 방해하고 괴롭히는 헤롯 가문의 죄악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의 모델이 되고 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요셉과 마리아는 지속적으로 “현몽하여 가로되〃(13, 19),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22)” 하나님의 사랑의 인도를 받고 있는 것을 본다.
Ⅰ.이 역사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있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것처럼 이 역사는 돌고 돌아서 다시 제 자리로 가는 순환적인 역사가 아니라 꾸준히 한 목표를 향하여 접근해 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데는 분명한 목표와 의도가 있으시다. 이 세상과 우주와 시간이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를 가지시고 창조하신 이 역사는 분명히 시작과 끝이 있다. 표면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일까지도 우리가 그 이면을 볼 수 없기 때문이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비록 어리석어 보이고 약한 것 같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 바로 역사의 주인공들이다. 이 역사를 의도적으로 움직여 가시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 사람들만이 이 역사가 아무리 어둡고 침울해도 소망을 갖는 것은 최종적인 승리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어둠 속에서 빛을 보고 이상을 잃어버린 인류가운데서 미래를 내다보는 비전의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비전의 사람이었던 요셉은 애굽의 압제 아래서 종살이를 하면서도 그가 숨을 거두기 전에 “…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창50:25)는 약속을 받아 내는 것을 본다. 비록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회복될 이스라엘에 돌아갔을 때 부끄러움이 없기 위하여 자신을 정결케 보존하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볼 수 있다. 미래의 비전에 사는 사람들은 현실을 살면서도 미래를 살고 이 역사의 마지막을 내다 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금의 순간을 되는대로 함부로 살지 않는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사람들이요. 이 땅의 어떤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최종적인 승리를 내다보면서 낮의 사람으로 이 어두운 밤의 역사를 빛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이 역사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가 분기점이다. 범죄 후 이 역사의 시작은 여자의 후손의 예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그리고 약속대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나게 하신 이유)에게서 나게 하시고”(갈4:4) 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위하여 역사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이전의 불분명한 계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언해 왔고 그리스도께서 오신 시기를 마지막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히1:2) 그리고 성령의 부음도 말세라고 요엘을 통해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2:17)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와 성령의 오심은 마지막의 때라는 말씀이다. 이 마지막은 진정한 종말을 위하여 준비 되었고 목표하여 달리고 있다. 이 것이 없다면 모든 역사는 의미를 잃을 것이다.
Ⅱ. 빛과 어두움의 역사가 함께 존재한다. (13~15)
(13)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동방의 박사들이 떠난 후에 천사는 다시 어린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요셉에게 꿈으로 계시를 준다.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13) 언제나 하나님이 한 수 위로 선수를 치신다.
어두움의 역사는 창세전부터 있었고 유다는 그의 서신에서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 …”(유1:6)을 형벌하실 것임을 증거하고, 이 역사는 그 어두움을 소멸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3:8)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다스리고 주관 하신다면 왜 이런 슬픔과 고통이 있는가?” 라고 질문을 던지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면 더 비교될 수 없는 피 흘림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언제나 어둠의 세력은 빛의 역사를 가로막으려 하고 방해공작을 펼치지만 약하여 죽은 것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은 사실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 것이고 이제 마귀 사탄은 마음대로 권세를 휘두르지 못하게 묶임을 받았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역사의 종말에 이 악의 세력을 완전히 도말 하실 것이다.
사탄은 이 땅에 죄악과 멸망과 형벌의 역사를 끝내기 위해서 오신 독생자의 생명을 근원부터 차단하려고 사악한 헤롯을 계속 충동질 하고 있고 이것을 미리 아신 하나님은 순종의 사람 요셉에게 천사를 통하여 피신케 하여 구원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진행하신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헤롯의 마수를 벗어나기 위해 애굽으로의 피신도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확인하고 있다. 호세아11:1의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었거늘” 이라는 말씀은 오히려 애굽의 고난 가운데 자유케 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로서 애굽에 들어감이 아니라 오히려 그곳에서 은혜로 해방시키신 역사를 말씀하는 것으로 연이어 돌아 나오실 주님의 행로는 오히려 죄악이 관영하는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불러내실 모형이 되신 것이다.
이러한 또 한편의 작은 성취를 위해서도 역시 요셉과 마리아는 순종으로 채운다.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14~15f)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역사를 위한 예수의 탄생에도 사악한 인간은 많은 피를 흘리게 했다.(16~18)
(16)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 (18)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또 한번의 사악한 헤롯의 본색이 들어 나고 만다. 사실은 박사들이 헤롯을 속인 것이 아니라 헤롯이 박사들에게 거짓말을 했었다.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마2:8) 한 것은 사실 찾아 죽이려 했던 의도가 분명하고 이 사실을 알아차린 박사들은 사악한 헤롯의 일방적인 약속을 저버린 것 뿐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에 눈이 먼 사악한 군주들은 자신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서는 아무리 많은 생명이 희생되어도 상관치 않은 어두움의 세력을 힘입는 대표적인 인물임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만다.
앞에서도 말한바 있지만 만약에 박사들이 진리의 계시를 받는 사람들로서 예루살렘이 아닌 베들레헴으로 바로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했다면 이 같은 엄청난 희생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가정일 뿐 마태는 이 안타까운 사건 조차도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를 이루기 위함이었다고 증거하고 있고 이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메시야의 탄생을 위한 희생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메시야의 이 땅에 탄생에도 많은 죄없는 어린 생명의 피를 필요로 했던 것이고 이 것은 절대로 하나님의 의지가 아니라 사악한 인간의 죄성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라헬에 관한 탄식의 예언은 상징적인 의미로 취급된다. 창세기 35:16~20에 외가 라반의 집에서 이룬 많은 재산과 가족들을 이끌고 돌아오는 야곱의 실재적으로 진정한 아내였던 라헬이[역대상5:1~2에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베냐민을 잉태하고 산달이 가까운 가운데 이 여행이 이루어졌고 마침내 라헬은 둘째인 베냐민(오른 손의 아들)을 낳고 슬픔의 아들의 뜻인 ‘베노니’라는 이름을 남기고 여행에서 죽는다. 야곱은 라헬을 바로 이 베들레헴 길 에브랏에 장사 한다. 예레미야는 이 사실을 다시 포로로 잡혀가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인하여 자식들을 잃는 안타까움에 이 라헬이 일어나 탄식한다는 상징적인 예언을 했고 다시 헤롯으로 인하여 억울하게 자식들을 잃는 베들레헴 어머니들의 탄식으로 이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어두움의 역사에 계속적으로 빛을 주시고 계시지만 그 역사는 어떤 순간에는 가려진 것처럼 어두워 보이고 약해 보이지만 이역사의 어두움과 밝음 양면을 다 보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사랑은 절대로 실패하거나 패배할 수 없는 전능하신 역사의 주인으로서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나타내시고 계시기 때문에 의의 백성들이 때로는 죽임을 당하고 환난을 당할지라도 반드시 이김을 주실 것이다. 바울은 고백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
어두움과 빛이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역사는 선하신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기 때문에 의와 빛의 백성은 반드시 이길 것이다.
그리고 이 어두움을 비치는 등대의 역할, 파수꾼의 역할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씻음을 받은 오늘 우리의 몫이다. 주님께서는 산상보훈에서 가르치시기를 “눈이 나쁘면(미래, 천국, 하나님을 보는 비전)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마6:23) 라고 탄식하신다.
한편이 이 빛과 어두움이 공존하는 역사; 한 편이 어려움을 당하면 다른 한 쪽은 행복해지는 상대적인 명암(明暗)의 역사는 완성된 영광의 나라에서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Ⅲ.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라.(19~23)
(19)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20)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21)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니라 (22)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본문의 말씀은 세 번씩이나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14b)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17~18)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23) 고 확인되어지고 있다. 이 예언들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한결 같이 행복한 예언의 성취들은 아니다. 그러나 힘겹고 어렵고 위험하고 안타까운 예언도 성취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주시는 경계가 크다고 이해 되야 한다. 행복하고 가슴 설레는 예언의 성취도 중요하겠지만 안타까운 일들도 반드시 성취된다는 약속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성취되기 위해서 약속을 받은 당사자들의 신앙적 자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1.요셉과 마리아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자의 지시를 따랐다. 그 말씀을 어디에서 듣게 되든지 반드시 순종했다.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13~15f);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니라”(19~21);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22) 환경과 상황을 초월하는 순종으로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고 채워졌다.
2.하나님께서 시키시는 것들을 빠짐없이 순종했다. 이 말씀들에서는 결코 요셉과 마리아의 인간 됨을 침묵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22) 머뭇거리게 될 때도 두려울 때도 말씀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지시를 바로 따른다면 결코 거기에는 실패가 없다.
3.하나님께서는 이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를 이루기 위하여 오늘 나를 필요로 하신다.
우리는 대게 성경적인 사실들을 살필 대는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정작 우리에게 왔을 대는 어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가 그래왔다면 미래에도 다르지 않을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오늘 우리에게 어려운 것은 성경 속의 인물들에게도 꼭 같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순종했다는 사실이고 그렇다면 오늘 나도 순종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오늘 나는 우리 각자의 역할로 성취될 미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고 일하는가?
이 모든 예언들의 성취는 그 예언을 받은 사람들의 순종으로 채워지고 있음을 배워야 한다. 나의 삶을 통해서도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는 은혜의 역사를 이뤄가야 하고 그것은 특별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기만 하면 당연한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우리가 순종해서 성취할 예언들이 있다. 오늘 우리 각자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예언의 성취가 있고(은사적인 면에서 그렇다.) 우리 모두가 함께 동일하게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다.(전도, 예배, 봉사 등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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