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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시작이면서 어두움의 역사에 드디어 빛이 발하기 시작한 모습이다. 광야의 외치는 소리였던 세례자 요한은 바른 소리를 하다가 그 소리 때문에 투옥되고[나중에 14:1~12에서 언급 되기 때문에 그 때에 자세히 살피기로 한다.] 단순한 소리가 아닌 진리요 생명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의 광명이 암흑의 세상에 정오의 빛같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 빛이야 말로 생명을 잃고 영원에 눈 멀어 버린 인류에게 소망을 끼치는 광명한 빛이시다.
Ⅰ.사람들의 부정적인 선입견은 항상 자기를 죽인다.(12~14)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이나 유대 지역에서도 역시 사역을 하셨지만 마태를 비롯한 공관복음은 주로 북쪽 갈릴리 전도사역을 기록하고 나중에 기록된 요한복음은 주로 남쪽의 예루살렘을 근거한 전도 사역을 보충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오늘 우리처럼 삶의 거처를 옮겨 다니신 것으로도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다. 베들레헴에서 나시고 나사렛에서 자라시고 가버나움에서 사시고 예루살렘에서 꽃다운 생애를 마감 하셨다. 그러나 이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마태는 확신하고 있다. 말씀마다 “이는 선지자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거나 “기록되었으되” 라고 예언의 말씀을 상기시키는 마태는 이 말씀에도 역시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14)고 기록하고 있다.
1.알고 본다는 것 때문에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사렛에서 자란 것도 그냥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마2:23)는 기록대로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였지만 어려서 부터 자라는 모습을 봐왔던 이 나사렛 사람들은 결국 자신들에게 온 복을 차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만다.
나중에 역시 13:53~58에서 상고하겠지만 마가복음6:1~6을 보면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①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②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③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는 기록을 본다.(눅4:16~31) 듣고 놀라고 감탄했지만 자신들이 가진 선입견 때문에 은혜를 배척해 버리는 안타까움을 본다.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 갔을 때에도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요7:15)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요7:41)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요7:52)라고 노골적으로 배척을 했다. 빌립은 친구인 나다나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했을 때도 역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요1:46)고 무시해 버린다.
우리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제한이 많은가? 그런대도 먼저 알고 있다고 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가로 막는 것을 오늘 우리 시대에도 보곤 한다.
함께 자라온 사람들이 성경을 가르칠 때도 그렇고 과거에 좀 부정적이었던 사람들이 회개하고 변화된 삶을 살려고 할 때도 역시 경상도 말로 “아니구 지가, 지나 내나” 라는 식이다. 그러나 분명히 알 것은 그랬다가 손해 보는 것은 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2.그렇다고 하나님의 은혜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고루 내리는 비처럼, 모든 대지에 고루 비치는 태양처럼 풍성하고 넘친다. 그러나 이러한 말할 수 없는 은혜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고 역할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한 자들에게 내리던 은혜는 다른 사람에게 가게 되어 있기 때문에 받지 못하는 자에게 손해가 될 뿐이다. 나사렛 사람들이 거절한 그리스도는 가버나움 사람들이 누리게 되는 것처럼 이스라엘에게 내려지던 은혜와 복은 거절됨으로 이방인에게 가게 되었다.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롬11:20)
우리의 완악하고 모자람에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해야 하고 받는 은혜를 귀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3.주님을 가까이 모시면서도 교훈대로 살지 못하면 형벌이 더 크다.
나사렛 사람들의 거절로 주님은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게 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시면서 수많은 교훈과 표적으로 복 주셨지만 의외로 가버나움은 주님을 진노케 만들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마11:23~24) 하신 것처럼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12: 47~48)시는 경계도 두려움으로 들어야 한다.
진리는 얼마나 소유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얼마나 진리를 따라 사느냐가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다. 진리를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면서도 행함에 인색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책망을 꼭 경계로 삼아야만 할 것이다.
Ⅱ.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어둠이 도망가게 되었다.(15~16)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1.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모든 인류는 미래가 칠흑같이 어두운 절망의 존재들이다.
스불론은 이스라엘의 12지파 중 10번째로 함께 ‘거한다’고 하는 의미로 레아로 말미암은 6째 아들이다. 그런가 하면 납달리는 라헬의 시녀 빌하로 말미암아 난 2번째 아들로 야곱의 전체 아들들 가운데서는 6번째 낳은 아들로 ‘경쟁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이름으로 그다지 이스라엘 속에 특별한 인물들은 아니다. 그런가 하면 야곱이 애굽에서 죽으면서 이 두사람에게 축복한 것을 보면 “스불론은 해변에 거하리니 그 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 지경이 시돈까지리로다”(창49:13) 하였고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창49:21) 라는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축복의 내용을 읽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두 지파의 위치 역시 이 야곱의 축복한 대로 위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두 지파의 사람들은 온 인류의 상징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성 싶다.
움직임이 없이 거하는 사람들이든지, 남보다 잘 살겠다고 낳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끝없이 경쟁하는 사람이든지, 바다를 터전삼고 고기를 잡던 무역을 하든, 사슴이 뛰노는 산속의 수풀에서 나무를 키우고 목축을 하며 농사를 짓는 사람이든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그 분주함과 한가함이 다 무료하고 의미가 없는 소망 없는 사람들이며 특히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이방의 갈릴리도 빛을 필요로 하는 미래가 어둡기만 한 흑암의 백성들일 뿐이다.
이런 입장에서 예외가 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여기에 그리스도를 알기 전 과거의 우리 모두도 예외는 아니다. 바울 사도는 이 상태를 묘사하여 이르기를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2:11~12) 그러한 온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광명한 새벽 별임에 틀림이 없다.
2.이러한 절망만 가득한 온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운명을 바꿔 주셨다.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16공동) 본래 이사야 9:1~2의 본문 내용은 북조 이스라엘이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 침략당하여 비참한 처지에 있다가 구원을 얻은 사실을 묘사하는 말씀이다. 모든 인류는 원치 않게 사탄의 지배 하에 범죄하며 고통하면서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비극에서 자신의 생명으로 인류의 생명을 십자가에 대속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평화의 왕으로 자신의 보호를 요청하는 자들에게 자유와 기쁨을 주실 수 있는 평강의 왕이시고 이 주님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때 전부터 예정하신 대로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능력으로 마귀 사탄을 무너뜨리시는 모습 자체가 진정한 소망과 기쁨의 빛이다.
사도 요한은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다”(요1:9)고 확인한다. 주님께서도 이 사실을 직접 선언 하시기를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이 놀라운 은혜의 역사로 오늘 우리가 광명의 천국의 약속을 가지고 절망이 아닌 소망의 삶을 살게 됨을 감사하고 찬양하자! 할렐루야!
오늘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는 곳마다 어두움은 도망가고 생명의 빛을 보게 되는데 이 귀한 역사에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나를 쓰시기를 기뻐 하신다. “믿습니까?”
259:1.빛의 사자들이여 어서 가서 어둠을 물리치고, 주의 진리 모르는 백성에게 복음의 빛 비춰라, 빛의 사자들이여 복음의 빛 비춰라, 죄로 어둔 밤 밝게 비춰라 빛의 사자들이여.
오늘도 먼저 선택하신 우리들을 통해서 이 광명의 빛을 세상에 비추시기를 우리 하나님은 간절히 소망하시고 기대합니다.
Ⅲ.회개의 요청은 복음 중에 복음이다.(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우리는 앞에서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 나타난 세례 요한의 첫 소리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마3:2) 였던 것을 읽었다. 물론 요한의 회개의 요청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원을 위한 회개의 요청과는 다르다. 세례 요한은 완전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들이도록 이스라엘의 완악한 마음을 회개케 했다면 주님께서는 완전한 천국 시만이 되기 위해서 세상과 죄를 향하여 가던 삶을 돌이켜 영원히 살게 하는 복음을 믿고 순종할 것을 당부하시는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나라와 직접 연결 되어 있고 회개가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수 없고 천국은 회개에 대한 상급이다. 그러므로 회개가 없는 천국은 있을 수 없고 회개를 요청하지 않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없다고 까지 말한다.
물론 천국을 향하여 하늘나라의 백성답게 살고 있다면 그런 삶은 회개할 필요가 없지만 회개했다고 말하면서도 죄의 성품이 나를 더 강하게 끌리고 있다면 회개해야만 한다. 우리는 지난번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이 요청을 상고한바 있지만 사실 회개하라는 당부를 달게 들을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 회개의 요청을 기쁘게 순종하는 사람은 절대로 후회할 일이 없다. 그러나 반대로 이 회개의 요청을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오셨을 때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빠를수록 좋은 것도 철저할수록 좋은 것도 회개다.
회개한 자에게는 천국이 가깝고 회개를 미루는 사람들에게는 지옥이 가깝다. 우리 사람들에게 선택은 오직 둘 뿐이다. 믿는 우리들은 사실 하나님의 넘치도록 약속하신 복들을 자신의 것으로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온전한 회개를 이루지 못해서 잃는 경우가 많다. 죄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도 잘 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두려운 상황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양다리 걸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데도 그 기회를 잃어 버리면 절망일 수 밖에 없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 도다”(계2:21)
1.회개의 요청은 듣기는 거북해도 듣고 응하는 사람은 복이다.
성경에서는 끊임없이 회개를 부르짖는다. 그만큼 죄에 익숙해 있는 우리가 천국의 백성으로 변화 받기 의해서는 회개가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한 자들의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시민으로 죄인들을 조건 없이 받아 들이심에 있어서 사람에게 그 무엇도 요구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회개”를 당부하신다. 세상을 향해 가는 그 모습 그대로 계속 갈 수는 없다고 가르치신다.
과거의 삶이 어떤 하든 그것은 불문에 붙이겠지만 그 관습과 죄악 된 습관은 철저하게 버리고 오라는 것이다. 적어도 이 요청에 응한 사람들이 오늘 주님 앞에 믿는 사람들이고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죄성을 버리지 못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이고 교회 속에서도 바람직하지 못한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 주님은 과거의 어떤 죄든지 불문에 붙이시고 우리를 받으셨다. 우리가 당할 모든 절망과 비극을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으로 철저하게 감당하셨다. 그리고 요구하시는 것이 “나의 희생의 가치에 합당하게 살아다오!” 라고 부탁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하나 하나의 세상적 가치와 생각과 행동을 고칠 때마다 주님은 박수를 보내실 것이다.
2.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신앙에 있어서 일반적인 것들을 얘기함 보다도 특별한 예를 생각하면서 이 문제를 이해했으면 한다. 사도행전 8장에 사마리아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파견하여 안수함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많이 주면서 시몬이 자신도 같은 능력을 갖게 해 달라는 요구에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21~23) 라고 책망하면서 회개를 요청한다. 하나님의 은사적인 면에서도 하나님의 뜻보다 인간적 수완과 욕심으로 취하려 하는 것도 “악함” 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세상과 다른 것은 세상에서는 돈만 있으면 자신의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살 수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주님의 주심이 무엇이든지 감사하고 만족할 줄 아는 것이 은혜를 누리는 비결이다. 시몬은 그전부터 사마리아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사도와 같은 능력을 주신다면 더 큰 역할을 할 법도 한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그러한 생각을 “악함” 이라고 회개해야 할 이유로 가르치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 속에서 이러한 부분을 더러 발견하곤 한다. 그러나 회개해야 할 자세라는 지적에 깊이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성경 속에서 회개치 않은 것들에 대해서 경계하는 몇 가지를 더 살펴보고 마무리 했으면 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다시 방문하려 하면서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12:21)고 걱정했고 요한 계시록에서는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계9:20~21)는 안타까움을 경계하고 있다.
회개는 우리 인간의 의지로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할 때 가능할 것이다.
구약의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애굽의 관습을 회개치 못함으로 대부분이 광야에서 망했던 것처럼 오늘도 세상이라는 광야를 거쳐서 천국에 들어 가는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이다. 바울 사도는 과거의 이러한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불평)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불평)하지 말라”(고전10:10)고 당부한 바 있고 다윗은 시편37에서 경계하여 이르기를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1)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8)”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보면 의롭게 살려는 사람들이 불평할 수 있는 것임에도 이를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조차 세상의 습관이기 때문에 버려야 할 회개의 항목들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감사하는 사람들로 찬양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세상의 일반적인 관습들을 회개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Conclusions: 우리는 때로 조금 알고 본다는 것 때문에 은혜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내가 잃어 버리면 자신만 손해다. 주님에 관해서 많이 안다고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행하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땅에 오심은 이 죄악의 어두움의 땅에 생명의 빛의 시작이며 이 빛은 계속 많은 사람들에게 비취도록 먼저 빛을 받은 우리들이 넓혀 가야만 한다.
구원의 복음 생명의 복음은 언제나 회개의 복음이다.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치 않아서 망한다. 우리를 부르신 주님은 어떤 것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시고 다만 과거 세상에서의 죄악 된 삶을 회개한 삶을 요구하신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의 선하신 도구로서 칠흑같이 어두운 마지막의 죄의 어둠을 빛으로 밝히시는 주님의 생명의 도구로 역할 하시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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