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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6:60~65 2020-02-16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5천명이 넘는 배고픈 군중을 기적의 떡으로 먹이시고, 사람이 영생을 위하여 궁극적으로 먹어야 될 양식을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대부분 떠나고 가까이 있는 제자들조차도 오히려 혼란해 하고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신 주님은 더욱 깊은 영생의 교훈을 증거하시지만 역시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지속되고 있다.

겉으로는 듣고 있지만 마음 속으로는 불평하는 반응을 보는 우리 자신들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만약에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면 역시 이 또한 감사할 제목이다.

모든 구속의 역사가 완성되어 선포된 후에도 진리의 이해에 한계를 갖는 오늘 우리의 모습가지고 당시의 주님앞에 있었다면 과연 ‘나는 어떤 이해를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우리 각자의 마음을 그대로 꿰뚫어 읽으시는 주님께 어떤 책망을 들었을까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비록 육신적으로 이해가 어려운 주님의 교훈이지만 역시 오늘 우리에게도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63b)는 말씀이 생명이며 우리가 반드시 소화해야할 진리임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여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 시는 우리 자신으로부터의 신앙이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진 진리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소화할 때 영적인 삶에 어려움이 없을 것을 증거하신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중요한 믿음의 과제를 늘 의식하고 읽으면서도 여전히 성경말씀을 한계있는 나 자신의 지식과 생각으로 판단하고 이해하기 때문에 여전히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라고 판단하고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세속적이고 육신적인 비유나 예화가 더 쉽게 들리기 때문에 그런 것을 기대하고 바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Ⅰ. 여전한 영적인 어리석음,(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이 말씀은 구체적으로 바로 앞의 v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는 말씀에 대한 혼란의 반응이다.

이 생명의 떡에 관한 주님과 대화의 뒷부분들의 각 단락(paragraph)의 시작마다 유대인들의 오해로 시작되는 것을 계속해서 보게 된다. 이것을 앞에서 언급할 때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영적인 주님의 교훈을 땅에서 난 육신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라고 말하였다.

다시 되돌아 보면 v41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라고 기록되고 바로 지난 시간의 시작도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52) 했던 것을 보는데 다르지 않음을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늘과 땅의 차이 같은 것으로 서로 조화될 수 없는 빛과 어두움과 같은 것임을 본다. 어두움은 빛을 감당할 수 없어 도망치고 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해이고 하루살이가 한달을 일년을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에서 고난 당하시고 죽으실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 라고 주님을 위한 것처럼 간청 드렸다가 오히려 책망을 들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23)

성령의 삶을 강조하는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결정적으로 그러한 이유를 증거하고 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5~8)

이것과 같은 안타까운 표현들이 반복되는데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는 말씀과 함께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는 바울의 표현과 다르지 않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하나님의 말씀이 100% 이해 될 때만 순종하려 한다면 구원을 얻을 백성이 없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해는 되지 않더라도 그것은 100% 믿을 만한 말씀이기 때문에 순종해 놓고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 과거 믿음의 사람들의 자세였었다.

이런 이유에서 이해되지 않는 말씀도 순종하고 나면 그만큼 확신은 커지고 믿음은 자라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음을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를 본다. 다만 경계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빙자한 사람이 하는 말에 순종하라는 것은 아니다.

불순종하려는 자세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어려울 뿐이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엘리 제사장이 자신을 부르는 음성으로 들은 사무엘처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9, 10)라는 자세는 결국 모든 주님의 신비를 이해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오늘도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들으면서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는 생각이 든다면 자신의 믿음의 상태와 신앙적 이해를 점검하여 말씀을 생명으로 소화하는 …



Ⅱ. 살리는 것은 영이다.(61~63)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고 수근거리는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저들이 비로소 이해할 것을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근거리는 줄 아시고…”(61f) 말씀을 듣고 “아멘!”이라고 할 수 없을찌라도 수근거리는 모습은 분명 바람직하지 못한 자세라고 하였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되묻는 것이 옳은 자세가 될 것이다. 그러나 옳지 못한 수근거림의 모습을 아신 주님께서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61b) 참 안타까운 현상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소화되지 않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오히려 걸림이 되는 것이다.

여기 “걸림[σκανδαλίζω, 걸려 넘어지다, 함정에 빠지다, 실족하다, 죄에 빠지다.]이 되느냐” 하셨는데 주님께서 이미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11:6; 눅7:23) 말씀하신 내용과 같은 표현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의 교훈이 소화가 되지 않으면 생명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범죄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주님의 교훈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우리의 믿음은 장성해야만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히4:2) 말씀함으로서 꼭 같이 내려지는 말씀이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함께 하지 못하면 영육에 모두 유익이 되지 못함을 지적하고 있다.

함에도 우리 주님은 저들의 안타까움을 미래적인 소망으로 소화하신다.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62)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전에 있던 곳’ 즉, 하나님께로 다시 올라가실 것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나 화육(化肉, incarnation)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시고 승천하셔야 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3일만에 다시 부활하시고 40일 후에 다시 승천하실 것을 내다보시면서 하신 말씀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 성령을 이 세상에 다시 보내실 때에야 그들이 이런 이치를 이해하게 되리라는 구속의 역사를 통해서 비로소 이 영적인 이치가 이해될 것이라는 가르침을 주고 계신 것이다.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를 할 때 비로소 다음의 주어지는 말씀도 바르게 이해가 될 수 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63) 이런 영적인 이치를 이해하는 것은 장차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고 보내실 성령의 감화 없이는 깨닫지 못할 것이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가르침이다.

이들이 주님 가까이에서 듣지만 이해하지 못하고 소화하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그들이 육신적 기준에서 듣고 있기 때문에 생명의 교훈을 무가치하게 이해할 뿐이고 장차 그들에게 성령이 오신 후에야 완전한 이해가 가능할 것이라는 귀한 교훈이다.

그럼에도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63f)는 이 말씀을 극단적으로 이해해서 영적인 삶에 육신은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잘못된 이해의 경계도 가져야 한다. 영적인 것을 육신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문제이지 중세의 경건주의자들처럼 육신은 영의 삶에 장애요소라는 잘 못된 이해는 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63b) 주님께서 주신 말씀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기만 한다면 모두가 다 영원에 속한 생명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때 아직은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에게도 오늘 여기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도 다르지 않은 “영이요 생명”이 되시는 말씀이다.



Ⅲ. 구원의 도구들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셨다.(64~65)

이 제목에서 “구원의 도구들”이라고 하니 어떤 다른 연장이 구원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역사 속에 쓰임받은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교회를 예정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예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구원의 역사와 복음을 인류에 주시기 위한 도구가 되는 사람들조차도 철저하게 준비하셨음을 말하는 것이다.

먼저 뒷절인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65)는 말씀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미 v44에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라는 말씀에서 먼저 하나님의 초청과 이끄심이 없으셨다면 누구도 주님의 은혜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라는 교훈을 생각했었다.

그럼에도 창세이후 아담의 타락에서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회복에 이르기까지 구원을 이 역사위에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철저하게 사람들을 준비하시고 사용하셨음을 OT로부터 구속의 은혜가 완성된 NT에 이르기까지 보게된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창세전의 예정은 개개인의 구원의 예정이라기 보다는 이 땅위에 교회가 완성되기까지의 과정 속에 사용하신 일꾼들의 예정임을 하나님으로부터 사용되었던 일꾼들의 입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들 수 있다.

이름을 감춘 시편71:6의 하나님의 종은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 바 되었으며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 바 되었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고백하고 있음을 듣는다.

그런가하면 대선지자로 분류되는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자신들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선택을 고백하고 있음도 읽을 수 있다. 먼저 이사야는 “섬들아 내게 들으라 먼곳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사49:1) 라고 증거한다.

반면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택하신 반대의 입장에서 증거하고 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렘1:5)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열두 사도들을 마음에 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데서 이를 더욱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예수께서 …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64b)

물론 여기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처음부터 아심이러라”(64)는 말씀이 가룟 유다를 말씀하심과 함께 적어도 사도들은 아닌 당시까지 주님을 따랐던 다른 사람들이었음이 분명한 이유는 나중 베드로 사도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는 고백과 함께 가룟 유다를 제외한 최소한 열한명은 끝까지 남았음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64f)는 복수(複數, plural) 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 사도들이 아닌 제자들 중에 아직까지 주님을 따랐지만 결국 떠나갈 사람들을 이미 알고 계셨음을 이해할 수 있다.

시작 부분에서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60)라고 불평하는 내용이나 여기에 대한 주님의 반응으로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근거리는 줄 아시고…”(61f) 하신 ‘제자들[μαθηταί, 복수형← μαθητής, 배우는 사람, 학생, 제자]’과 사도들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이 또한 오늘 우리에게도 경계되는 말씀이다. 함께 주님 앞에 모여서 찬양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듣고 연보하며 예배하는 우리 가운데 안타깝게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주님은 이미 아신다는 두려운 의미가 되기 때문에 우리 각자의 믿음을 견고히 가지고 믿음으로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행히도 우리의 믿음은 미래형이라는 약속이다. 지금까지 믿지 못하고 순종치 못해도, 지금부터 믿고 순종하면 과거를 묻지 않으시는 주님이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사실 조차도 이미 보시고 아시는 전지(全知)하신 하나님이시다.

이 사실은 이미 OT에서부터 약속하셨다.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행한 공의로 살리라”(겔18:21~22, 27~28, 33:14~16, 19)

우리는 말하기 어려운 어떤 속마음을 남편에게도 아내에게도 자녀에게도 부모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힘들어 하지만 우리 주님은 이미 그런 마음조차도 읽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다만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교훈을 듣고도 믿지 못하는 불신이 있었다면 오늘 복음이 완성되고 성령의 시대이지만 역시 불신의 마음을 가질 수도 있다는 안타까움이다. 이런 이유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권면하기를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히3:13개역한글) 당부하고 있다.

서로의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불신으로 굳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권면으로 여기에 대한 치료는 어렵지 않은 이유는 지금이라도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은 어제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는 약속 때문이다.

영원에 속한 생명과 영생이 다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것과 그것을 거절하고 불신하는 단순한 차이라는 것에 우리의 선택이 중요함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영성의 부족함일 뿐이지 하나님께서 깨단지 못할 말씀을 주실 분은 아니시기 때문에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는 불평보다는 성령의 역사로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은혜로 들을지언정 걸려넘어져서는 안되겠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주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받아 영생을 누리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분임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또 우리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 육신이 장애가 된다는 극단적인 이해보다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고전9:27f) 이라는 바울의 자세를 본받아 하나님의 생명의 진리에 우리 몸을 복종시키는 믿음의 자세을 가져야 한다.

우리 중에 누구라도 죄로 마음이 완고하게 되어 불신에 떨어지지 않도록 서로 격려하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감격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주님께 오게하신 사랑 때문임을 믿고 또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시는데에 쓰임 받도록 최선의 믿음과 순종을 드리는 예정된 일꾼으로 충성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