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말씀을 클릭하면 성경구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종배 전도자
요 9:35~41 2020-07-12
네가 인자를 믿느냐?  
이 시각장애자였던 사람은 눈을 뜨고 새로운 인생이 되었지만 지난 마지막 부분에서 유대종교지도자들에 의해 “…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 내어 보내니라”(요9:34)는 내용과 같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22) 라는 결정대로 출교를 당하고 사회적으로는 보호의 울타리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이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나 주시고 다시 그의 신앙을 확인하시고 위로하시는 데 여기에 또 바리새인들이 달라붙어 항의하는 모습으로 이 요한복음 9장의 메시지는 마무리되고 있다.

우리는 이 시각장애자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눈을 뜨고 새로운 새생명을 살지만 그의 눈 뜸이 기존 종교에 있어서는 오히려 많은 문제들을 일으켰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최종적으로는 마침내 자신의 영육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만나보게 되고 위로 받는 일련의 상황을 본다.

어쩌면 이 9장의 시각장애자의 사건 진행은 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비유될 수 있다. 우리는 육신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뵙지 못했지만 그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눈을 뜬 새로운 인생이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세상사람들이나 진정한 생명이 있는 신앙이 아닌 종교에 의해서 핍박과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며 신앙의 삶을 지속한다.

마침내 우리 각자의 생애를 마치든지 세상이 끝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으로도 만나 영생에 들어가 영원한 위로를 누리게 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바로 이 시각장애자의 일련의 사건 진행과 다르지 않음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맹인이었던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당하는 막다른 과정에서 우리를 만나 주시고 위로하시는 분이시다. 다만 이 시각장애자였던 사람과 같이 모든 시험과 어려움에서도 주님을 굳건히 의지하고 믿음을 잃지 않는 신앙의 사람에게 그렇게 해 주신다. 이런 입장에서도 이 사람은 우리에게 모범이며 귀감이다.

어찌 보면 부모조차도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가도록 버려 뒀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로 자신을 위하여 손해보는 사람을 그대로 절망으로 끝나게 버려 두는 분이 아니시다. 변함없이 주님을 증거하고 변호하다가 쫓겨났지만 그를 주님께서 만나주시고 격려하심을 본다.

언제나 신앙하는 사람의 마지막에는 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그리고 가장 공정한 심판으로 믿음으로 이긴 사람의 손을 들어주실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최후의 심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짧은 인생에 승부를 거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에 승부를 거는 사람들이다.

마지막 계시록에서도 이 약속을 분명히 하고 있다. 7교회의 사자들에게 모든 당부를 다 한 후에 반드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2:7) “이기는 자들에게는, 어떠 어떠한 것을 주겠다.”는 약속을 각각 주고 계시다.

믿음의 사람들은 죄를 정복해 주신 말씀과 성령과 함께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유혹을 이기고 환난을 이기며 인생의 좁은 길의 마지막에 만날 예수 그리스도를 부끄럼없이 만나기 위해 매진하는 사람들이다.



Ⅰ. 하나님의 아들을 믿느냐! (35~36)

이 시각장애자였던 사람의 안타까운 상황은 그이 이웃들도 그를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가서 힘겹게 하고 부모도 자신들의 어려움과 손해를 두려워하여 아들에게 문제를 떠 넘겼지만 이렇게 힘겹고 고독한 과정을 거친 이 사람을 주님께서 만나 주신다.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35f) 자신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두 알아주신다. 세상의 사람들은 자신이 억울한대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일 특히 억울함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들이 행한 것과 겪은 것을 모두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안다. 내가 아노라, 내가 아노니!”고 교회들에게 마다 말씀하심을 확인할 수 있다.

에베소 교회에게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2:2~3) 말씀하시고 이후의 모든 교회들에게도 같은 확인을 하신다. 이런 것만 확인해도 위로가 되고 생명이 된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 주님께서 듣지 못하는 것이나 알려지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잘한 것도 못한 것도 모조리 알고 계시다. 왜냐하면 전지(全知, omniscience) 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 시각장애자였던 사람이 겪은 일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을 알고 계신다.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35b) 주님은 어려움을 겪은 그를 만나 주신다. 조용히 만나 주신다. 여러분 모두도 어려움 속에서는 조용히 주님을 찾으시면 만나 주실 것이다. 이것이 또한 주님을 믿는 백성들의 또 다른 특권이다. 내가 감당하지 못할 일을 당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만나 주신다. 감사하지 않은가?

이 사람을 만나서 물으시는 것이 무엇인가? “네가 인자를 믿느냐?” 물으신다. 다른 말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느냐?” 물으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도 우리의 죄와 인생의 짐을 다 감당해 주셨음을 믿고 있는지를 물으실 것이다.

이러한 확신과 믿음만 있다면 지금까지 당한 것은 보상될 것이고 이제 위로 받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안타깝게도 고통과 손해와 환난을 보상받을 방법이 없다. 그것도 인생의 막다른 마지막에서 모든 인류에게 이것은 반드시 확인될 것이다.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36) 이 고백 속에는 얼마나 주님을 만나 뵙고자 했는가 하는 간절함이 서려 있다. 준비된 믿음이면서 확인하는 믿음이 함께 담겨 있다.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아무에게나 “믿나이다!” 하지 않고 믿음의 대상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즉, 믿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면 “볼 수만 있다면, 알 수만 있다면 믿겠습니다.”라는 준비된 믿음이고 이 믿음을 위해서 이 사람은 벌써 여러 어려움을 겪어왔다.

오늘날 확인되지 못한 그리스도를 믿다가 낭패를 당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는데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확인하고 있는 것도 바람직한 믿음의 자세이다. 절대로 아무에게나 믿음을 고백해서는 안된다. 반드시 나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주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어야 한다.



Ⅱ. 심판의 요소, (37~39)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으로 자신의 눈으로 주님을 뵙는 이 시각장애자였던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믿음을 다시 고백 받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오셨지만 또 다른 오신 목적을 통해서 어려움을 통과한 이 사람을 격려하고 계시다.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36b)라고 안타까워하는 이 사람에게 주님은 드디어 자신을 나타내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37) 이 요한복음에는 주님의 자기 선언이 여러 곳에 나타나는 것 또한 특징이다.

“내가 그다.” “나는 ~ 이다.”라는 표현은 이제 다음 장에서도 보게 되겠지만 어느 말씀보다도 이 표현은 4장의 수가성의 여인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말씀과 같은 표현이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요4:25) 라고 고백하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요4:26)라는 모습과 같다.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38)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보여주심에 대한 응답이다. 계시하심에도 응답하지 않는 것은 의미가 없고 생명이 되지 못한다. 육신의 눈으로도 이 세상을 볼 수 없었던 이 맹인이었던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먼저 육신의 눈을 떴고 이제는 영적인 안목도 밝아져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경배한다.

항상 우리의 삶은 고백과 같이 가게 되어 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38) 그토록 보고싶던 주님을 만나고 자신의 주인 되심을 고백하고 최고의 예우를 올린다. “절하다[προσκυνέω, 예배드리다. NT 60회 사용된 낱말] 예배는 강제적이고 의무적이기 보다는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감사를 표현하는 최상의 방법과 자세이다.

여기에 대한 주님의 반응을 표현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39)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사람을 만나 격려하심에도 심판의 내용이 선언되고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39f) 이미 앞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7)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NT의 다른 서신들은 그만 두고 이 요한복음에도 이런 표현이 더러 언급되고 있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12:47)

그럼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심판하시려는 목적으로 오시지 않으신 것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구원을 위한 은혜를 거절함이 역으로 심판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인용된 3:17 다음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8~19)

바울을 통해서도 같은 논리를 말씀하고 있다.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2:12)

이런 요소를 자연을 통해서도 여러 번 비유한 바 있다. 비나 햇볓은 분명히 생명의 요소이지만 죽어 있는 존재들에게는 오히려 빨리 상하게 하는 요소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39b)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영적으로 맹인 되어 있어서 영원에 속한 것을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여 하나님과 영원에 속한 귀중한 것들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이 바로 이 일 때문임을 간증한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행26:17~18f)

우리 사람의 육신의 눈은 사실 짐승의 눈보다 결코 밝지 못하다. 그래서 잘 보지 못하고 볼 수 있는 것 밖에 볼 수 없다. 그럼으로 모든 것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볼 수 없고 잘 못 보는 경우도 많다. 안타까운 것은 그럼에도 볼 수 있는 한계를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고싶어 하는 것도 많고 무엇보다도 사람에게만 주어진 신령한 것들을 볼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영적인 눈을 띄워 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의 바리새인들 같이 자신들은 모든 것을 보고 안다고 하는 교만한 자들에게는 영적인 눈을 주시지 않으시고 겸손하여 이 시각장애자였던 사람과 같은 자들에게는 밝히 보게 하셨다.

이러한 사실들을 주님께서 “…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11:25~26)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구원의 역사를 거절하는 안다고 하는 교만한 자들에게는 신령한 것을 감추시고 겸손한 자들에게는 밝히 볼 수 있는 영안을 주시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목적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된 것은 완악한 사람들이 죄성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을 주시려 오셨지만 거절하는 쪽으로는 심판적 요소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Ⅲ. 진정한 맹인. (40~41)

시각장애자였던 사람에게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39)란 이 말씀은 사실 바리새인들 만을 두고 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주변에 있던 저들의 반응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자신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을 그냥 듣고 지나친다면 바리새인이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시비를 걸고 달려든다.

바리새인들은 주님께서 시각장애자였던 사람을 만나 격려하시면서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 되게 하려 함이라”(39b)고 주님의 사역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는 말씀에 자신들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라 듣고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40) 묻는다.

이들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던 것으로 요한 사도는 표현하고 있는데 이런 입장이라면 함께 있었다고 하는 것의 의미가 없다. 주님과 함께 머물렀다면 주님을 배우고 행하신 역사를 통해서 자신들의 삶을 회개하면 얼마나 좋을까 만은 함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책잡으려는 목적 한가지였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진정으로 봐야할 것을 보지 못한 그야말로 맹인이었다.

그들은 부끄러움도 없이 묻고 있다. “우리도 맹인인가?” 여기에 대해서 주님은 분명한 답변이 있으시겠지만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오히려 저들이 종교지도자들로 율법을 본다고 하는 것이 그 율법이 예언한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표현을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41)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하신 말씀은 알고 행치 않는 저들의 모순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눅12:47~48f)라는 말씀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이다.

나중에 다시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15:22)라는 내용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세상에서도 어떤 사건을 본 사람은 그 사건에 대하여 보지못한 사람보다 책임이 있는 것처럼, 안다고 하는 것 자체가 그만큼 책임을 가지게 되는데 신앙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알면서도 그것을 행치 않는 것은 사실 아는 것이 아니’라는 세상의 철학의 논제도 있다. [知行合一]

유대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행하지 않고 다만 가르침 받는 사람들에게만 율법을 지키라고 강요했던 것은 주님께서 책망했던 내용들도 볼 수 있다.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눅11:46)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안다고 하면서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면 안다고 하는 것 만으로도 책임을 회피한 것이 되기 때문에 정죄될 수밖에 없다. 이런 입장에서는 진리를 더 깊이 안다고 하는 것 자체가 복이 아니라 그 아는 진리를 지키지 않으면 오히려 죄가 됨을 지적하신다. 그러나 어려운 것은 아니다. 아는 것을 순종하여 행하면 당연히 복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의 어떤 이치를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다고 바보취급을 당하고 욕을 듣기도 하는데 그것은 그래도 덜 심각한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그것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더 두려워해야만 할 것이다.

결국 진정한 맹인은 이 나면서 세상을 볼 수 없었던 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고 알고 가르친다고 하면서도 그 율법이 지시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볼 수 없었던 종교 지도자들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진리로 알고 믿으면서도 이 말씀이 가르치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는 종교 생활하는 사람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느냐?”는 물음은 모든 사람이 당면하는 질문이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아니면 이 생이 끝났을 때라도 반드시 한번 답변을 해야 할 과제이다. 왜냐하면 그 주님께서 모든 인류의 절망인 죄로 인한 저주를 대신 져주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에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요소가 된다. 오늘날도 바르게 신앙의 삶을 사는 사람 옆에 사는 사람은 의도하지 않아도 그리스도인의 빛 된 삶이 불신의 사람들에게 죄를 들어내게 하여 심판의 요소로 나타난다.

무엇이든지 본다고 하는 것, 안다고 하는 것은 책임을 동반한다. 보고 아는 것을 행하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알지 못하는 것이 낫다. 육신의 시각장애는 육신의 한평생의 장애일 뿐이지만 영적인 맹인은 영생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불쌍한 소경이다.

지금 주님을 그리스도로 확신하고 생명의 풍성함을 주시는 대로 누리며 영생의 영광을 기대하며 말씀대로 살아서 우리 각자의 삶에 은혜와 진리가 풍성한 천국백성의 삶을 살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