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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0:1~10 2020-07-19
나는 양의 문이라,  
시각장애자였다가 눈을 뜬 사람을 두고 유대지도자들과 논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교훈으로 진전하고 있다. 물론 이 가르침 속에서도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사실이 유대인들로 통해서 거론된다.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21)

이 양의 문과 목자의 비유는 아마도 우리 나라 사람들을 대상하셨다면 사용하시지 않으실 수도 있으셨을 것이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일상을 통해서 양과 목자의 관계는 물론이고 바람직한 양의 우리인 교회의 모습들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또 이 10~12장까지의 대중을 향한 교훈은 마무리되고 13~16장까지는 주로 이 땅에 남겨두고 가실 제자들을 준비시키시기 위한 가르침으로 집중되고 17장의 대제사장적 기도를 하신 후에는 십자가로 나아가시는 주님의 사역의 과정을 보게 된다.

이 10장의 특징은 물론 목자와 양의 관계를 중심으로 다루지만 가르침이 끝날 때마다 거기에 따른 반응들이 나타남을 본다. 오늘의 말씀 중에서는 v6 첫번째로 부정적인 반응이 나타나지만 다음 내용인 선한 목자의 비유 후에도 v19~21에 역시 유대인들이 분쟁을 보게 된다.

이 10장의 뒷부분 절반의 내용인 v22~39에서는 또 다른 예루살렘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항하는 유대인들의 시비와 주님을 죽이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마지막 부분인 v40~42은 주님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들도 기록되고 있다.

오늘 다루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양의 문이라고 하시는 교훈은 주님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바른 통로이심을 증거하시면서 다른 통로는 역시 없음을 말씀하시는 교훈이지만 14:6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시는 확증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Ⅰ. 진리를 거스를 수 없는 구원의 바른 통로(1~2)

주님께서는 새로운 교훈을 제시하시면서 이 사실이 귀하고 중요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의 귀를 기울일 것을 당부하시는 표현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고 시작하신다. 진실이요 진리 이신 주님께서 이런 강조를 하시는 것은 그만큼 우리 각자에게 또 인류에 엄중한 교훈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칫 잘못 생각하면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만 하나님께 순종하려 한다면 과정의 모든 잘못된 것도 용납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금도 그렇게 행하는 교회나 사람들과 주님의 일꾼들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지나친 판단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는 말씀까지 여기에 적용하려는 잘못된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의 과정에서도 절대로 어두움의 법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때로는 그의 일꾼들이 그런 경우도 있긴 했지만 반드시 거기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받게 하셨다.

우리 하나님은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반드시 기억해여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인류구원을 위해 오셔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는 모습으로 사역을 감당하셨고 친히 십자가의 고통과 모욕을 당하신 것도 하나님의 공의 때문이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오늘 첫번째의 말씀이 이러한 주님의 공의성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는 표현이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1) 라고 정식통로가 아닌 바른 계통이 아닌 것 자체를 거부하시는 말씀이다.

주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계실 때부터 마지막 심판의 때까지 불법은 절대로 허용될 수 없음을 직접 경계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이 땅에서 가 아니라 마지막 심판의 때에 반드시 그에 합당한 형벌로 갚으실 것을 증거하셨다.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3)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13:41~42)는 말씀들이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2) 다른 데로 넘어가는 절도나 강도는 앞뒤 양쪽을 기웃거리며 들킬 것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나 목자는 당당히 휘파람을 불면서 들어가 오로지 양들을 만나볼 기쁨으로 두 팔을 휘져으며 자신만만하게 들어가는 모습이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바울 사도도 하나님의 교회에는 절대로 빛의 법과 함께 어두움의 법이 통용될 수 없음을 고린도 교회를 통하여 경계한 바 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고후6:14)

요한 사도는 나중 그의 서신에서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3:4) 함을 본다. 양의 우리와 문과 목자의 이야기를 계속 풀어가겠지만 먼저 주님께서 자신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질 교회에 불법은 허용될 수 없음을 분명히 경계해 주고 계시다.



Ⅱ. 양과 목자의 교통(3~6)

울타리나 담을 넘어서 상하고 훔치러 온 강도가 아닌 참 목자와 양의 교통이 바른 문을 통해 아름다운 모습으로 이루어짐을 비유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위장된 거짓 목자는 양들과 소통할 수 없음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 잘 이루어지는 소통의 관계를 두번씩이나 “음성을 아는 고로”(4, 5) 라고 지적하신다.

이렇게 서로 간에 알고 듣는 교제는 이 양과 목자의 비유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함을 v27에서도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고 확인하신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3) 여기 전체적인 내용에서 볼 때 양의 문과 목자와 양이 나타나고 사실 이 내용이 대부분의 이 말씀의 중심이다.

그럼에도 또다른 명칭이 쓰이고 있는데 문지기이다. 문을 여는 목자와 문지기를 같이 볼 수도 있겠지만 분명히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라는 표현으로 볼 때 분명히 목자를 위하여 우리의 문을 열어주는 다른 이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이 내용의 이해가 쉽지 않지만 문을 열었을 때 양들이 드디어 그의 음성을 듣고 따른다 고 연결되어지는 내용과 더불어 이해를 해야 옳을 것이다. 우리는 양을 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없기 때문에 익숙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그림은 상상이 가능하다.

대략적인 이 비유를 양과 우리를 주님의 교회로 이해하고 다음시간에 보겠지만 목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틀리지 않고 이 우리와 양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요 목자장(벧전5:4)으로 본다면 문지기는 바로 이 구원의 움직임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 문지기라는 이해에 ‘하나님을 너무 가볍게 대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15장의 포도원의 비유에서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요15:1) 비유하심에서도 비슷한 어감을 볼 수 있다.

또 문지기가 문을 열었을 때 양들이 그의 음성을 듣고 따른다는 이해로 볼 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하였으므로 사람으로 감동시켜 마음의 문을 열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순종하고 따르게 하시는 성령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위의 두 가지의 이해 중 어떤 것이라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4) 우리를 나온 양들은 푸른 초장으로 이끌려가게 되는데 목자는 반드시 앞서 가는 것은 당할 위험이나 어려움을 먼저 감당하고 해결하는 것이 양들을 위해 희생하는 목자의 모습이다. 또 이렇게 솔선수범하는 목자의 음성을 양들은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5) 아무래도 이 내용은 v1에 연결하여 이해를 해야 할 것 같다. 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울타리를 넘어온 절도나 강도를 양들은 자신들을 위해 희생하는 목자와 같이 따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지만 무엇보다도 서로의 음성을 알 수 없는 것도 순종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4)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도망하느니라”(5) 목자와 강도는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4:6) 세상과 성도가 사용하는 언어가 분명히 다른 것과 같다.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6) 너무나 저들에게 익숙한 일상의 비유를 말씀하셨지만 역시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양이 아닌 까닭에 분명히 소리로는 들었는데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내용이다.



Ⅲ. 생명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7~10)

오늘 어쩌면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이제 이 마지막 부분에서는 가르치셨음에도 이해하지 못하는 저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다시 해설하시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이 내용 역시 구원의 통로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하심을 증거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7) 다시 이르신 것으로 봐서 위와 같은 말씀이심이 분명하고 이런 중요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저들을 향한 주님의 안타까움을 엿볼 수 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역시 “나는 양의 문이라!”하신 것이다. 앞에서는 이 문에 들락거리는 양들과 목자 그리고 절도나 강도들을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더욱 분명히 자신이 이 우리의 문이라고 선언하신다.

예루살렘성에는 밖으로 통하는 문들이 여럿이 있었다. 美門, 아름다운(행3:2, 행3:10); 羊門(느3:1, 3:32, 12:39; 요5:2); 水門(느3:26, 8:1, 8:16, 12:37); 샘문(느2:14, 12:37); 魚門(느3:3, 12:39, 대하33:14; 습1:10); 옛문(느12:39); 에브라임 문(왕하14:13; 대하25:23; 느8:16, 12:39); 베냐민 문(렘20:2, 37:13, 38:7; 겔48:32; 슥14:10); 분문(쓰레기를 쳐내는- 거름문, 똥문; 느2:13, 3:13, 12:31) 대략 9개 정도의 문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에 실재적인 이름으로 도 있었던 주로 양들이 들락거렸던 이름과 비슷한 “나는 양의 문이라!”하신 것이지만 이것은 보이는 예루살렘의 문을 의미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순종하고 따라야할 백성들을 이끄시는 구원의 통로가 되심을 선언하신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께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모든 천국에 이른다는 방법이나 길은 모조품이고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거짓된 문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이유는 분명하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이유는 죄 때문이라고 선언되었고 이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는 절대로 구원으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양들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그들의 모든 죄를 친히 감당하셨기 때문에 가능해졌다. 다음 주의 말씀에서 시작되는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1)라는 말씀에서의 약속과 그것을 이행하셨기 때문에 그렇다. 세상에 왔던 어떤 훌륭하고 위대하다는 성현(聖賢)도 이런 사람은 없었었다.

이것을 바울이 선언하는 내용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는 말씀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는 확신이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8) 이 말씀도 오해될 수 있는 여지는 더러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왔던 선지자들이나 주님의 일꾼들을 말하는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고 이 땅에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고 선포한데서 화살표역할을 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또 나중 예수께서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고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진 후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었을 때 바리새인 중에 율법교사인 가말리엘이 예수님 이전에 잠시 메시야처럼 사람들을 이끌고 행세하다가 죽고 따르던 사람들이 흩어졌던 드다라는 사람과 갈릴리의 유다를 거론하는데 이들을 말씀하시는 것 같지는 않다.(행5:36~37)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그럴싸한 인류의 스승들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는 사람들을 바르게 인도했을지라도 그 사람으로 인하여 진정한 구원이신 주님을 불순종하게 되어 구원을 잃게 했다면 그것은 이런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오히려 모든 예언자들을 등에 업고 자신들이 메시야인양 백성들을 속이고 착취하고 있었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23:13) 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친다고 하면서도 로마 정부의 지휘를 받아 율법에 평생직인 대제사장직을 1년을 주기로 바꿔가며 권력을 분배 받아 행사한 것으로 볼 때 말씀을 어기고 불법을 행하는 것을 보면 분명히 문으로 들어온 자들은 아니었다.

사실 앞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이들이야말로 예언의 계통을 밟아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는 다르게 문을 통하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와 백성들을 괴롭히고 빼앗았던 절도며 강도들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예언을 따라 이 땅에 양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구원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로막고 구원을 얻지 못하도록 방해한 것에서도 그렇다.

“나는 양의 문이라!”하셨던 주님은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증거하신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9) 주님께서 천국의 유일하신 출입구 되심을 이미 앞에서 거론한 바 있다. 그러므로 “내가 문이니” 하신 것은 “내가 천국의 문이니”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제 여기에 좀더 사실적인 선언을 하신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대상에 차별이 없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10:12) 한 것처럼 이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대상은 “누구든지”이고 방법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이며 결과는 “구원을 받고”라는 공식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언약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결과는 현세와 영원의 약속이 보장되고 있다.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자유로이 출입하며 생명의 풍성함을 누릴 것을 확인하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의 양이라면 이러한 약속을 누려야만 당연한데 나는 이 약속을 누리고 있는가!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 도둑이 나타나는 이유와는 다르게 이제 다음 주에 좀 더 구체적인 내용으로 연결되겠지만 참 목자가 무엇을 위해 또 어떤 역할을 하는 가를 분명히 말씀하신다.

도둑이 오는 이유를 먼저 말씀하시는데 이 원리는 오늘의 교회나 신앙 속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10f) 이 행위는 단순히 귀하거나 값진 물건을 몰래 훔쳐가는 도둑이기 보다는 강도의 모습이다. 사실 가장 무서운 강도는 종교를 빙자한 사기꾼이다.

세상의 것들은 잃어도 다시 얻을 수 있고 위로 받을 데가 있다면 그래도 견딜 만하지만 신앙적 사기를 당하면 물질과 마음과 영혼을 다 빼앗기기 때문에 소생할 방법이 없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는 말씀과 성령과 더불어 우리의 영혼을 도둑질하려는 어두움의 세력을 바로 분별해야만 한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b)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유일한 목적이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딤전1:15) 그러나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이 희생되셔야만 했는데 다른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양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주님으로부터 누리는 하나님의 양인 그의 백성들은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처럼 넉넉한 은혜와 생명을 누린다. 주님께는 어떤 것도 모자람이 없다. 베드로 사도는 이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

바로 앞절에는 약속에 견고히 순종할 것을 당부하고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1:11) 한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풍족하기 때문에 그 분의 약속을 확실히 붙든다면 겨우 구원을 얻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넉넉히 얻을 것이다.

이왕에 우리로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오셨으므로 모자람이 없으신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풍성히 누리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