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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0:22~30 2020-08-02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려서부터 말씀하셨듯이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2:49b)하신 것처럼 또는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마21:13; 막11:17; 눅19:46) 라고 증거하셨던 것처럼, 갈릴리에서 더 많은 사역을 하셨고 비록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어 있었지만 기도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집으로 알리시고 자신이 진정한 성전이심을 일깨우시기 위해 수없이 성전에 다니시고 가르치셨다.

사실 수전절은 OT성경에 기록되거나 명령된 절기는 아니지만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끊어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의 암흑기라고 일컫는 시기에 있었던 일이나 만들어진 절기가 NT성경에는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오늘 나타나는 수전절같은 절기이다.

물론 오늘 우리에게는 이 수전절은 의미가 없지만 이 절기에 모여든 사람들을 가르치시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여전히 귀중하기 때문에 때나 절기가 아니라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 어디에 계시든지 또 어떤 가르침을 주시든지 듣고 순종하면 생명이 될 것이다.

이 요한복음을 나누면서 계속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세상에서 필요한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속에까지 가치가 있는 영원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은 한번 받아쓰고 버리는 요즘 너무나 흔한 일회용품이 아니다.

세상의 일회용품은 요긴하게 또 편리하긴 하지만 사용하고 나면 쓰레기로 남아서 환경을 상하게 할 수도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들은 어떤 경우도 자신에게나 주변에까지 절대로 해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누면 나눌수록 영육(靈肉)을 절대적으로 풍성케 하는 귀한 것이다.

오늘의 제목처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라는 선언은 이 우주 가운데 어떤 존재라도 방해하거나 무효하게 하거나 빼앗을 수 없는 절대적인 선물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힘입어 영생을 얻어서 사는 사람들이라면 이 세상의 변화나 차이에 관계없이 이 약속을 확신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이런 확실한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세상은 물론 이 우주 가운데에는 두려움의 대상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존재일지라도 하나님 아버지를 이길 존재는 없기 때문이고 또 아무리 큰 권력이나 힘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다만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Ⅰ.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다 죄, (22~24)

오늘의 첫번째 내용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다그치는 불신의 유대종교지도자들 가운데 압력을 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22~23) 주께서는 사람들의 반응에 관계없이 일하시며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심을 본다. (수전절과 솔로몬 행각-별지)

주로 이스라엘의 비 오는 계절인 이 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전에 다니셨고 넓은 솔로몬 행각에 다니셨던 것으로 요한은 기록하고 있는데 이 솔로몬 행각은 나중 이 땅에 교회가 탄생한 후에도 사도들에게 요긴한 전도와 교제의 장소가 되었던 것으로 누가는 기록하고 있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행3:11)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행5:1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유대인들의 의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순차적으로 자신에 대한 진리를 풀어주고 계시지만 오로지 불신의 눈과 믿지 못하는 귀로만 듣고 보는 저들에게는 어떤 가르침이나 설명도 호소력을 갖지 못했다. 바울은 믿음이 약한자와 강한 자들 사이에 먹는 문제를 두고 말하다가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14:23)

OT의 대선지자들은 이미 이들의 불신을 예언한바 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사43:8)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 지어다”(렘5:21)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구속의 십자가를 지시기 전까지도 분명하게 말씀 하시지 않으신 이유는 당시의 로마와의 정치적 상황에서 오해할 여지가 많았기 때문이었고 주님을 삼 년 간이나 따라 다녔다고 하는 제자들 조차도 오순절에 성령의 침례를 받기 전까지는 오해했던 것도 사실이다.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시고 하나님 아버지 곁으로 승천하시려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1:6b) 라는 육신적인 질문을 하는 것을 보면 주님의 이러한 심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24f) 유대인들의 행동을 제대로 표현하면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둘러싸고 일종의 압력을 넣고 있는 모습이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렵니까?”(표준새)

그렇다고 주님께서 숨긴 것도 아니고 뒤에 나타나는 표현대로 하나님의 아들 된 많은 표적과 이적들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 분명한데도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었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것을 숨기거나 하신 것이 없었음에도 이들의 자세는 이렇게 무력적임을 보이고 있다.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 하소서 하니”(24b)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셔도 믿지 못하면서 오히려 이런 의심의 자세로 다구치고 있다.

사실적인 어떤 것도 의심하는 자세로 계속 접근하면 오히려 의심이 더 생기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세상의 이치이다. 부모를 의심해 보면 정말 그런 것처럼 느껴 지기도 한다. (for Ex.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믿음의 귀중한 이치를 증거하고 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이런 이유에서 맹목적인 것은 위험하지만 믿음은 중요한 것이다. 여러분 모두 당연한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에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모두 되시기를 …



Ⅱ. 예수 그리스도의 양이 아니기 때문에, (25~27)

이들의 이런 압력이나 협박에 기죽을 예수 그리스도가 당연히 아니시다. 비록 그들이 의심하며 협박을 한다고 할지라도 진실을 말씀하시는 주님이심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25f) 늘 이야기하는 대로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믿음이 부족한 것이 문제일 뿐이다.

적어도 믿을 만한 증거를 분명히 저들에게 수없이 많이 보여주셨음에도 자신들이 믿지못하면서 그 불신의 이유를 주님께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25b)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까지 물론 수많은 이적들을 어느 민족보다도 많이 보아오며 산 민족이 이스라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선지자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많은 표적을 보인 선지자는 없었다. 질병치료는 주님께는 너무 흔한 이적이셨고 자연을 움직이고 작은 음식으로 많은 군중을 먹이는 것은 물론 죽은 자를 살리는 역사들을 예수님처럼 행한 선지자는 없었다.

그리고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25b)하신 것은 무엇보다도 이런 수많은 이적들은 모두 하나님 아버지 이름으로 행하심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신 아들 메시야 되심을 증거하는 표였다는 말씀이다.

나중 오순절날 베드로 사도도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행2:22)고 증거하고 있듯이 이 요한복음에 기록된 일곱가지의 이적만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이해하는데 충분한 증거가 되지만 끝까지 저들을 외면해 버리고 만다.

이런 이유에서 예수께서는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거든 나를 믿지는 않더라도 그 일은 믿어라…”(38f)고 증거하심을 볼 수 있다. 주님께서는 보이는 자신은 믿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주신 이적들은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개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하면 ‘그래 얼굴은 몰라도 행동하는 것을 보니 그 아들이 맞다.’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부족할지라도 그의 행하는 것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드러낸다면 믿을 수 있어야 한다는 증거이다.

결국 결론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 도다”(26) 하신 것이다. 주님의 양 된 백성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셨고 구별하셔서 잘 순종케 하셨기 때문에 이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음을 바울과 베드로는 신앙적 섭리와 신비로 증거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롬8:29)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벧전1:2)

그리고 주님 자신을 듣고 따르는 문제가 반드시 자신의 양들과 만 이루어짐을 선언하시는 내용이 연이어지는 말씀이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27)

이미 앞에서 양과 목자의 교통의 관계를 말씀하셨던 것처럼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3m)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4)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16b)라는 보다 실제적인 표현이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26) 말씀하시고 이와는 반대로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라는 간격을 선언하신다. 일단 무엇을 하든지 서로의 소통이 먼저이기 때문에 이 음성을 듣고 듣지 못하는 차이가 대단히 중요한 요소가 된다. 사실 각자의 신앙 상태조차도 어쩌면 비록 사람을 통해서 대언(代言)되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잘 들려지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시금석(試金石)이 될 수도 있다.

당연히 음성을 알아듣는 양들을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아신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그들을 알며” 이렇게 일방통행이 아니라 서로 간의 양방통행이 될 때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는 순종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당연히 이것은 듣고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거듭나기 위한 침례의 순종으로 가는 수순과 같고 복음에 대해 바르게 반응하는 거듭남의 순종의 모델이 되는 말씀이기도 하다. 이제 이렇게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27)는 결과가 되었을 때 그들의 영원을 책임지시겠다는 권능과 서약이 오늘 내용의 마지막 부분이다.



Ⅲ. 빼앗기지 않을 주께서 주시는 영생, (28~30)

여기에는 지난 주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성의 신비를 첨부하고 있다.

28f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은 7~10절의 말씀과 연결되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풍성한 꼴을 얻을 것이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7~10)는 사실의 확인이다.

28b의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한 말씀은 바로 뒤의 v29과도 연결되면서 11~18절의 내용의 확인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심으로 다시 주시기 때문에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없는 권세를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

이를 다시 전후를 바꿔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한 계획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창조주요 온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을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가지셨고 바로 그 생명을 주님을 순종하는 양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것을 받은 양들은 절대로 잃어버릴 일이 없다는 말씀이다.

박힌 못을 한번 더 두들기듯 이 사실을 다시 확인하시는 내용이 v29이다.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이 내용이 난외주에는 “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만물보다 크매”라고도 보충되고 있지만 이것은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비록 과거에는 죄의 종들로 어두움의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려 거듭나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양무리를 삼은 것에 대하여 비난하거나 시비를 걸 대상이 없는 것은 그 양들은 엄밀하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셨고 힐난하고 비난하려고 하는 그런 존재들 조차도 하나님의 권세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피조물들인 까닭이라는 확신이다.

또 난외주의 내용으로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좀더 큰 양들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이 우주 만물을 주고도 바꾸지 않으실 귀중한 존재들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양들이라는 고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16:26; 막8:36; 눅9:25)

사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나 하나님께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우주를 준다고 해도 바꾸지 않으실 귀중한 존재로 취급하신다는 확신이다. 비록 밤낮으로 참소하는 마귀 사탄은 우리의 과거를 두고 정죄하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내 아들이 죽었었다.”라고 변호하신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 서로 간에도 이러한 귀중성을 생각치 않고 짐짓 하늘의 백성 된 그리스도인을 보이고 나타나는 모습만을 가지고 때로 비난하고 가볍게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 주님조차도 이렇게 그분의 양 된 백성들을 귀중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서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런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 로마서8:31~39이지만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

무엇보다도 당시의 유대인들은 분노하고 오해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확신이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30) 물론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도 육신의 기준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모두 진실로 진실로 즉, 사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조금도 타협될 수 없이 매우 엄격한 이 주님의 선언은 이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이미 선언된 말씀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쉬운 이해는 아니지만 이 요한복음에서만 해도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분이심을 여러 번 증거하신 바 있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5: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4:9)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17:21)

사람이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성경에 쓰여 지지 않은 보다 합리적인 이해를 위한 단어를 만들 필요 없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그대로 믿고 순종만 한다면 이런 이해도 그다지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어쨌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는 한 분이시며 이 땅에 구원의 역사를 주도해 가시는 성령도 같은 한 분이시다.

진리 그 자체 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에 관한 어떤 것도 숨기신 적이 없으시다. 그러나 아무리 확실한 증거라도 불신으로 접근하는 사람에게는 확인될 수 없는 것도 신앙적 믿음이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도록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은 그것이 주님께서 오신 목적은 아니었을지라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행해진 그 이적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증거하는 확실한 증거는 된다.

하나님 아버지와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로 통해서 주시는 구원은 우리 자신이 버리지 않는 이상은 절대로 잃을 염려가 없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구원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이길 권세는 이 우주 가운데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은 바로 그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