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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배 전도자
요 18:28~32 2021-04-04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우리는 계속 재판석상에서 재판의 진행을 바라보고 있는 방청객 같은 마음에서 계속 말씀을 다루게 된다. 그러나 재판을 관전하는 것이 자기편의 승리를 기대할 수는 있지만 결코 행복하거나 재미있는 일은 아니다. 이런 이유에서 이런 말씀을 계속 다루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것을 고백한다.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죽는 것을 원치 않고 살고 싶어 한다. 그럼에도 죄악 된 심령은 나와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게다가 조그마한 권력이라도 있다고 생각되면 그 사람의 사실 된 상태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서도 죽이려 하는 생각을 더러 한다. 자신은 절대로 죽고 싶지 않으면서 이렇게 남에 대해서는 관용하지 못한다. 이런 입장에서도 스스로 죄인됨을 나타내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자신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았어도 [죽일 놈]이라는 말이 쉽게 나간다. 장소가 어디든 관계없이 사람 몇이 모이면 그 장소에서 죽어 나가는 사람이 허다하다. 사람들은 되도록이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을 죽이려고 하는 간교한 어두움의 세력들과 이렇게 너무나 가깝다.

그것도 오늘 내용에서는 생명을 다루고 영생을 다룬다고 하는 종교지도자들이 자신의 권력으로는 자신들의 이권에 방해가 되는 대상을 제거할 수 없어서 로마의 총독에게 죽여 달라고 사실도 아닌 별별 죄목을 다 거론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해 달라고 고발하고 있다.

이 18장 나머지 마지막 부분에서는 오늘 빌라도와 유대종교지도자들과 대화를 보도록 하고 다음 주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빌라도의 대화 부분을 나눠서 상고할 것이다. 또 여기서부터 19:16의 사형언도까지는 비극의 주인공인 빌라도의 무대가 된다.

이집트의 바로 왕이 이스라엘을 내보내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의 완악한 마음이 더욱 완악하게 사용되었다면 빌라도는 당시 최고의 권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의 총독으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사형에 내주는 판결을 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대대에 남는 이름이 되었다.

양심의 거리낌과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죄가 없으신 분임을 분명히 확인했고 하늘에 두려움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총독의 자리를 잃지 않으려는 정치적 욕심 때문에 천추에 한이 될 로마법에도 맞지 않는 거리끼는 판단을 하고 만다.

결정적으로는 아내의 만류[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마27:19)]라는 요청도 무시하고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19:12)라는 유대인들의 외침에 안타까운 선택을 하고 말았다.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의 전형적인 결정의 모습이었고 우리 역시 중요한 결정을 하려고 할 때 육신의 형편에 연연하여 생각하다 보면 이와 같은 잘못을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다는 경계를 가지고 살아야만 함을 배운다.

오늘 우리가 다루는 내용은 불과 5절로 적은 양이지만 온 인류의 모순과 죄악상의 표상을 보는 것이다. 솔로몬은 일찍이 “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전3:16)라고 탄식한 바 있다.

분명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달라야 한다는 당위성을 잃어버린 모순이 이스라엘 속에서 그리고 지금도 교회들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안타까운 사실들이다.



Ⅰ. 불법과 모순(28)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시는 이 땅에서의 일들은 그를 죽이려고 결정해 놓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정치권력을 악용하는 종교지도자들의 간악함의 극치이다. 이 상황을 보면 생각나는 것이 아합이 남의 땅을 차지하려는 욕심으로 당시 의인이었던 나봇을 죽이는 이세벨의 간교한 술수를 떠올리게 한다(왕상21:1~16).

이스라엘 왕의 별장이 있는 이스르엘의 왕궁 곁에는 나봇이라고 하는 사람의 포도원이 있었고 아합은 그 포도원을 자신의 채소밭으로 사용하고 싶어서 나봇에게 거래를 청한다. 그 밭 대신에 더 좋은 포도원을 바꿔주거나 좋은 값을 처 주겠다고 제안 하지만 나봇은 아무리 유리한 거래라고 할지라도 조상의 유산을 파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다고 거절한다.

그러자 졸장부인 아합은 식음을 전폐하고 침대에 누워 마치 환자처럼 지내는 것을 아내 이세벨이 보고 이유를 묻고 아합의 답변을 듣고 하는 말이 ‘당신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맞느냐!’ 말하고 ‘나봇의 포도원을 왕에게 줄 테니 식사도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지내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 나봇과 함께 사는 장로들에게 왕의 어인(御印)을 찍어 편지를 쓰기를 불량자 2사람을 나봇과 함께 증인으로 법정에 앉혀서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고 거짓증거를 하게 하여 나봇을 돌로 쳐 죽이고 연락을 달라고 한다. 마침내 그 사람들이 이 일을 행하고 이세벨에게 통보한다.

이세벨은 아합 왕에게 나봇이 죽었다고 말하고 나봇이 팔기 싫어하던 그 포도원을 차지하라고 말하자 아합이 기뻐하며 그 밭을 차지하러 간다. 물론 이 일로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아합에게 내려가서 ‘죽이고 빼앗았느냐!’하고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왕상21:19)고 예언한다.

창세기의 아벨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를 드린 것 때문에 가인에게 들에서 쳐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성경 속에 이렇게 의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는 예들은 아주 드물게 나타난 것도 어찌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그림자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고 해도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는 비교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장차 이 땅에 오셔서 우리 모든 인류를 위해 불법에 의해 고난당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 같은 모습들은 OT에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나봇이 불법에 의해 죽임당함을 이야기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불법 중에 불법에 의해 율법은 물론 유대 랍비들의 전승이나 로마의 법에도 없는 불법으로 죽음으로 인도되시는 데 그것 자체가 또한 우리의 죄의 대속을 위한 것임이 너무나 분명하다.

유대 지도자들의 첫번째 불법은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28f)는 내용이다. 안나스나 가야바와 같은 대제사장들이나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예수님을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처신하신다는 것에 대해 신성모독죄는 적용하여 사형에 해당한다고 판결을 내리게 되는데 그 종교적 법률의 근거는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레24:16)였다.

종교적으로는 그럴싸한 법조문을 찾아 사형을 시킬 수 있었지만 AD. 20년경 로마에 의해 종교로 인한 사형권을 박탈당한 가야바와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당시 총독인 빌라도의 사형판결을 받아내야만 했고 이런 결정을 한 것이 새벽에 빌라도의 관정에 끌어 간 것으로 봐서 밤에 결정한 것이 분명하다.

결국 저들은 자기들이 정해 놓은 법조차도 어기면서 자야 할 시간에 그야말로 혈안(血眼)이 되어 그리스도를 죽일 궁리만 했음이 나타나고 있다. 초기의 주경학자들이 산헤드린 공회의 규정과 함께 이 상황을 다루는 견해에 따르면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는 표현 자체가 불법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이들의 문제되는 규정을 보면 산헤드린 공회는 ①해가 뜬 후에 모여 해지기 전에 마칠 것, ②특히 사형판결 같은 것을 밤에 해서는 안되며, ③사형 같은 중형의 경우는 심문 당일로는 선고할 수 없는 것 등등이다.

그럼에도 동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채포하여 밤새 심문하고 사형에 해당한다고 판결하여 빌라도의 관정에 새벽에 끌어 간 것은 이 3가지 모두를 범하는 행동들로 사실 법리적인 원칙보다는 안나스나 가야바 같은 대제사장들은 자신들의 분감(憤感)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부끄러운 수치를 들어내 보이고 성전에서 이권을 챙기는 것에 정면적으로 도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적어도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나름대로는 법의 모양을 빌어서 빠른 시간내에 제거하려고 하다 보니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법조차 어기고 있는 것이다.

결국 밝은 빛 아래에서는 자신들의 수치가 드러날까 봐 두려워 어두움 속에서 자신들의 죄와 수치를 감추고 오히려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 죄를 뒤집어 씌워 모면하려는 비열한 어두움의 하수인들임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28b)는 모습은 하나님을 소경 취급하는 엄청난 모순이다. 본래는 유대 총독은 갈릴리 북쪽에 위치해 있는 가버나움에 관사가 있지만 명절 같은 경우에는 백성들의 소요가 발생할 것에 대비하여 예루살렘에 옮겨와 있게 되는데 유월절을 앞둔 시점이기 때문에 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마음에 칼을 갈면서도 자신들은 유월절의 규정대로 부정한 것에 접촉되면 제사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이방인의 관정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허울좋은 저들의 모습이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이런 모습을 가질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하는 모습이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만 문제가 없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조차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치명적인 위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고백하였다.

선지자를 통해서도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당부하셨다.

요한은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ἀνομία)이라”(요일3:4) 한 것처럼 법을 어기는 것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다면 유대종교지도자들이든 빌라도이든 조금은 다를 수 있겠지만 죄에 대한 의식 자체를 잃어버리게 되면 그것을 행하는 데도 거리낌이나 머뭇거림이 없어짐을 보게 되는 것이다.

신앙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순, 그것은 하나님께서 분명한 삶의 원칙인 법, 말씀을 주셨음에도 그것을 사람들이 자신들의 유리한 대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어기는 무서운 죄악이며 거기에 해당하는 심판을 반드시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진리에는 사람들이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할 뿐이지 절대로 모순이 있을 수 없다. 모순은 전적으로 거짓과 죄악과 어두움의 산물이다.

오늘 우리들에게 분명한 법이 주어져 있다. 이것으로 사람을 좋게 하려하거나 자신의 영광이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어기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것임을 두려워할 수 있어야 한다.



Ⅱ. 의인을 죽음에 넘기는 죄인들(29~30)

이제 여기서부터는 빌라도와 유대종교지도자들 간의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벌이는 법리 논쟁이다. 이것도 모순인 것은 하나님께서 보낸 메시야를 하나님을 섬긴다는 종교 지도자들은 죽여야 한다고 고발하고 이방의 총독은 죄가 없으니 놓아줘야 한다는 아이러니를 보는 것이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을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이방인의 총독 관정에 들어가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빌라도가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밖의 유대인들과의 사이를 오가며 심문을 하는 모습이 눈에 보는 듯하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29) 자신들은 들어오지도 않으면서 끌고 와 빌라도에게 심문을 맡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혐의를 전혀 찾지 못하는 빌라도가 보인 이런 반응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을 것이다.

사도행전25:23~27에는 유대의 베스도 총독이 아그립바 왕이 가이사랴에 오자 바울을 구류해 둔 경위를 설명하고 불러 하는 말이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24~25f)라고 사실을 증거한다.

그런 다음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그에게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25b~27)라는 기록을 볼 수 있다.

로마가 폭정과 정복이라는 무자비함도 있었지만 그리스의 철학을 바탕으로 나름대로는 법률이 분명하고 재판에서도 증거주의 재판을 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예수님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먼저 계셨지만 유대 기득권 세력들의 지위와 이권을 잃지 않으려는 술수와 맞물려 빌라도의 총독의 자리를 잃지 않으려는 비양심으로 하나님의 법으로나 세상 법, 어느 것에도 맞지 않는 불법이 이루어지고 만다.

역사가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빌라도는 성격이 그렇게 완만한 사람은 아닌 듯하다. 쉽게 분노하고 교만해서 사실적으로는 유대인들과의 관계도 그렇게 좋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 새벽시간에 쉬지 못하게 죄수라고 끌고 와 자신에게 내 맡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심문하는 이유는 바로 유월절 명절을 앞둔 유대인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판단이 옳을 것 같다.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29b) 로마의 법에 따른 고발자들의 논고를 듣고자 하는 순서로 보이지만, 여기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은 조금은 막연한 이유로 대하는 것을 본다.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30)

이미 저들은 공관복음(마26:63-66; 막14:61-64; 눅22:66-71)에서 보는 대로 빌라도에게 끌고 오기전에 산헤드린 공회에서 자신들의 판결은 끝내고 다만 실제적인 사법권이 있는 빌라도에게는 사형판결을 내려줄 것은 요구하러 왔기 때문에 이들과 선동된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빌라도의 판결은 ‘십자가형에 처한다.’는 판결뿐이었다.

이것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제사장들은 오히려 아랫사람들과 함께 이러한 판결을 유도하는 내용을 19:6b에서 보게 된다.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이렇게 죄인들이 한 패거리가 되어 의인을 죽이는 형태는 죄악이 범람하는 세상에서는 예수님 이후 오늘까지 아니, 이 세상 끝날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오늘 같은 모습의 일들이 있더라도 또 우리 자신이 직접 그런 일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크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기 때문에 전혀 놀랄 필요가 없다.

그래서 요한사도는 그런 일을 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격려하고 있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일3:13) 그러므로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2:20)한 것처럼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의를 행하므로 미움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다면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마3:10~12)



Ⅲ. 이미 정해 놓은 재판(31~32)

결국 빌라도는 뜨거운 감자와 같은 이 재판을 피하고 싶었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총독 자리를 잃지 않기를 원하여 빠져보려 하지만 그의 생각대로 간단하지 않은 이유는 이미 결정된 유대지도자들의 의향이 있었고 자신이 그것을 쉬 들어주는 것도 총독으로서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31f) 로마 정치와 대결 되는 양상이 유대뿐만이 아니라 피정복국들의 종교에 많았고, 단순한 종교의 계율을 위반한 것이라면 종교의 규범대로 해결하면 될 일이지 왜 이렇게까지 일를 키우려 하느냐는 빌라도의 의중이 담겨있는 답변이다.

이런 양상이 역시 바울과 유대인의 관계 속에서도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 갈리오가 아가야의 총독이 되었을 때 역시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발하자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행18:15)는 모습이 그것이다.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는 빌라도의 답변에 나온 유대인들의 반응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31b) 그리고 요한은 좀더 예언적인 입장에서 이 말씀을 이해하게 한다.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32)

주님께서는 이미 이러한 사실을 예언하신 바 있다. 같은 이 요한의 기록에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3:14)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12:32) 말씀하였다.

좀더 구체적인 기록을 공관복음에서 보는데 마태는 좀더 사실적으로 표현하셨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마20:19)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마26:2) 그리고 마가(10:33)와 누가(18:32)는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오늘의 말씀의 마무리도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32b) 이미 v9에서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하신 말씀처럼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나아가심에 더욱 예언의 성취를 이루어 가시는 주님의 신실하신 모습을 배우게 된다.

오늘 말씀은 인류의 죄를 해결하러 오신 공의의 하나님 앞에 불법의 극치를 행하는 죄악 된 인간군상들의 모습을 본다. 종교의 이름으로 정치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극악무도한 범죄는 결국 인류의 죄를 대신지시고 죽으신 독생성자의 삶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최악의 죄악을 행하고 있고 이것은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루어진 것이다.

죄가 역사 속에 들어온 아담이후부터 죄인들이 자신의 죄로 죽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속에서는 죄인들이 오히려 의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모순된 법이 순리처럼 행해지는 일이 많다.

죄악의 속성은 어둠에 속하기 때문에 그 어둠속에서 어두움과 더불어 죄를 범하고 사람을 살리려는 것보다 죽이는 것을 즐기고 있기 때문에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빛을 거부하고 오히려 죽이는 것을 즐긴다[대부분의 게임은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과 피 튀김과 파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요한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3:15)고 영생을 즉,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지적한다.

왜, 절대 공의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불법으로 죽음에 넘겨지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나)를 영원한 저주의 죽을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역사임을 생각해야만 한다.

비록 이 역사의 마지막까지 죄와 어두움이 짙게 드리워져 있지만 빛이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불의가 범람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시는 하늘나라에 합당한 복음과 빛의 사람으로 살아남아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1:27f)는 말씀을 이루어가는 …